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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씨 동해지구 종친회 회장 이 취임식에 초대받아서 ‘전씨 역사’에 대한 30분 강연을 의뢰받았으며, 우리 문중에서 강연 경험은 2번 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였습니다. 한 2주 전에 원고를 동해지구 종친회장 전억찬님께 보냈었습니다.
전종득 전씨중앙종친회장은 취임 후 처음으로 지방 종친회의 초청을 받아 강릉을 거쳐 동해로 오시게 되어서 강릉 우리 문중에서 오찬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강릉 농촌한정식에 13시에 전계표이사, 전남표 종보편 집국장, 전성표 필구공문중 회장, 전한표 원로, 전찬익 필구공문중 부회장 등 7명이 오찬을 함께 하고 나서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우리 문중 사무실을 안내하여 설명해 드리고 커피 한잔을 하였습니다.
중앙종친회장, 전남표 종보 편집국장, 전계표이사는 자가용으로 동해를 향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17시경 동해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3월 6일 전유진이 출연하는 ‘불후의 명곡’ 방청이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ktx기차 승차표를 예매하였습니다.
17시 20분경 뉴동해관광호텔 3층 조선홀 행사장에 도착하였는데, 첫인상은 화환이 10개가 넘고 있어서 아주 많이 준비한 행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순서가 ‘전씨 역사’에 대한 저의 강연 순서였습니다. 전씨의 연원과 역사의 흐름을 바꾼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선조들을 소개하였고, 18파로 분파되는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스토리텔링이 있는 선조들을 소개하고,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있는 중시조 묘소가 아주 좋은 명당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삼국시대에 성씨를 가진 건만으로도 지배계층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비상(국보 106호)의 금석문으로 그간 안개에 싸여 있던 삼국시대 전씨가 과연 존재하였는지 하는 의문이 일거에 없어지고 당당한 삼한 구족(옛적에 지체가 높았던 오래된 집안)으로서의 명예를 되찾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18시부터
제1부
개회선언, 국민의례, 종훈낭독, 연혁보고, 축시낭송, 종기전달, 이임사, 취임사, 축사, 시상, 임명·위촉, 축가(정선아리랑), 축하 케이크 절단 건배
제2부
만찬, 공연(가수와 함께), 행운권추첨, 폐회, 기념품 증정
순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행사를 본 소감은 마치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클럽 행사에 온 느낌이 들었으며, 회장단에서 굉장히 세심하게 기획하고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축시 낭송이었는데, 전씨의 역사를 간략히 간추려서 요점만을 압축해서 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축하공연에서 동해지구 회원의 손녀가 노래하였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전국노래자랑 동해편에서 최우수상을 탔다고 들었습니다. 1부의 엄숙한 진행과 2부의 여흥이 잘 어울린 멋진 행사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우리 강릉지구 종친회 행사에도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22시 30분경 강릉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전씨 동해지구종친회 회장 이·취임식
일시: 2023. 03. 03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장소: 동해시 뉴동해관광호텔3층 조선홀
1. 전씨연원
① 백제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근거: 국보 106호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상)
시조 전섭(全聶)께서 백제개국(기원전 18년 건국) 공신이라는 것으로 추측해보면 2041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② 전씨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 초기에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근거 : 고려사 989년 4월 경학박사 전보인 기록)
1034년 동안이어져 내려왔습니다.
2. 전씨 종장
전(全)씨 종장(宗章)은 문중의 상징
3. 종약 오대강령
①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② 아래로는 후생(자녀)을 기르고
③ 서로 화합하고 친목하고
④ 그 공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며
⑤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4. 전씨 과거급제자
정선전씨, 옥천전씨, 옥산전씨, 용궁전씨 등 모든 전씨 전체로는 동근동조이므로 조선시대에는 61명이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장원급제2명, 아원1명, 탐화랑2명, 3형제급제자1건, 형제급제자3건, 부자급제자2건, 조부손자급제자1건, 증조부현손급제자 1건있습니다.
정선전씨는 13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출사한 공직자는 고려사 등 기록에 의하면 36명입니다.
삼척에서는 전방경( 채미헌파, 1573년 급제 용궁현감 정6품 역임)이 과거급제하였고, 가까운 지역인 강릉에서는 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으니, 정선전씨 석릉군파 정랑공문중에서는 전공간(1517년 급제, 선공감 부정 정3품, 평산부사 역임), 정선전씨 채미헌파에서는 전순인(1519년 급제, 정3품 군자감 정 역임)이었습니다.
5. 현조(顯祖) 소개
① 시조(始祖)는 「전섭(全聶)」이며 백제 개국공신이시다. 단소는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으며. 시향은 매년 양력 10월 3일임
② 중시조(中始祖)는 8세 「전선(全愃)」이며 신라 시대 전법판서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있으며 시제는 매년 음력 9월 15일임
6. 세계분파도(世系分派圖)
시조 섭(聶)
08세 중시조 선(愃)
16세 이갑(以甲)
◎ 전이갑(全以甲)
관직에 올라 기랑(騎郞)을 지내던 중 왕건(王建)을 만나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신숭겸(申崇謙)등과 함께 고려의 영토 개척에 큰 공을 세웠으며, 925년(태조 8) 태사(太師)에 추대되었다. 927년(태조 8) 견훤과 달성(達成) 팔공산에서 싸우던 중 태조(太祖)를 구한 후 신숭겸, 김락 장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17세 보인 [ 輔仁 ]
◎ 전보인(全輔仁)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명경과 출신으로 여러 차례 학관을 지내면서 성실히 후학을 가르쳐 칭송을 들었다.
989년 全氏 최초로 고려사 기록에 나옴. 나주향교 출신으로 경학박사이며, 우리나라에서 기록으로 최고 오래된 유학자중의 한 분임.
25세 원태(元台) 팔려전씨
25세 수송(守松) 정선전씨 판서공파 [1200년 무렵 ,全守龍 역사기록으로 추측]
26세 흥(興) 성산전씨[1230년 무렵, 全懿 역사기록으로 추측]
26세 익(翼) 황간전씨[1230년 무렵, 全懿 역사기록으로 추측]
27세 유(侑) 옥천전씨
◎ 송정 전팽령
청백리, 조선전기 상주목사, 부호군 등을 역임한 문신.
◎ 사서 전식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전극항 [ 全克恒 ]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병자호란 때 예조정랑으로 왕명을 받고 서울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부자(父子) 과거급제자이고 나라에서 정려각을 세워줌
27세 공식(公植) 계림전씨[1236년, 全公烈 역사기록으로 추측]
27세 영령(永齡) 옥산전씨
◎ 전백영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고려 우왕 때인 1375년 간관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인임을 탄핵하였다. 조선 때는 여러 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경상도도관찰출척사, 예조판서,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역임
◎ 전경창
조선전기 검열,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퇴계학파로 대구에 최초로 성리학 전파
28세 한(僩) 죽산전씨 [1231년]
◎ 전한(全僩)
지금의 신의주 부사로 몽고군의 침략을 막는데 공로를 세움
28세 순(順) 성산백공파 [1392년 ]
◎ 전순(全順)
우헌납 역임
28세 방숙(邦淑) 용궁전씨
◎ 전원발(全元發)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 중국에서 병부상서 역임, 명필로 법주사 자정국존보명탑비문을 씀
◎ 전이성 [ 全以性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1등공신)을 세웠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28세 길(佶) 정선전씨 복야공파
29세 살리(撒里) 함창전씨[1310년]
고려사 기록에 1310년 함창군에 봉해짐
29세 오륜(五倫) 정선전씨 채미헌공파[1391년]
◎ 전오륜(全五倫)
우상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불사이군으로 정선 본향에 안치의 벌을 받음
◎ 전보문 [ 全普門 ]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공민왕이 왕자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하고 있을 때 호종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다. 전리판서·동지밀직사사·판밀직사사·문하평장사·경상도도순문사·판삼사사 등을 역임하였다.
29세 빈(賓) 평강전씨[1390년]
◎ 전빈(全賓)
좌정언, 정언 등 역임
◎ 전유형 [ 全有亨 ]
조선 중기 문신. 명나라에서 쌀 10만 석을 요구하자 특차사로 명나라에 가서 감량시켰고, 광해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의술에도 능하여《오장도》를 그렸다.
30세 언(彦) 감천전씨[1324년]
◎ 전언(全彦)
행성설치를 저지한 공로와 왕의 중국 연경 체류 때 시종한 공로로 1등공신이 2번 되었으며 밀직부사, 찬성사 역임
30세 윤장(允臧)[정선전씨 석릉군파] 다른 명칭: 선석릉군 혹은 상석릉군, 고려시대,1342년]
◎ 전윤장(전윤장(全允臧)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2등공신, 서해평양도순위사, 교주도도순문사, 참의참리, 찬성사 역임
30세 경(卿) 나성전씨[1342년]
◎ 전경(全卿)
조적의 난 평정 공로로 2등공신, 성균좨주 역임
◎ 전병훈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철학을 소개한 분
30세 집(潗) 완산전씨
◎ 전하민(全夏民)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승문원 교리를 역임(歷任)했다.
◎ 탁계 전치원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병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대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학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 전두환
대한민국 11대, 12대 대통령 역임
30세 영부(英富) 정선전씨 상호군공파 [1397년 ]
◎ 전영부(全英富)
첨절제사로 왜구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움
30세 영(泳) 기장전씨
33세 권(綣) 부여전씨
42세 용(龍)[정선전씨 임하군파] 다른 명칭: 후석릉군파, 조선시대 [1604년]
◎ 전룡(全龍)
조선 선조 때 호성공신이며, 석릉군을 봉받으셨다.
7. 공신록(功臣錄)
고려시대1등공신
전보문, 전이도, 전보, 전언
고려시대2등공신
전이도, 전보, 전경
조선시대1등공신
전이성, 전식(정사원종공신)
조선시대3등공신
전룡(충근정량 호성공신)
8. 스토리텔링이 있는 선조
◎ 정선 성마령의 전설
하루는 장남 분의 처인 안동권씨가 남편과 시동생이 일하는 메밀밭에 점심을 가져다주고 빈 그릇을 챙기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노승이 쓰러져 있음을 목격하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님께 연유를 물어본즉 노승께서는 허기에 지쳐 기운을 차릴 수 없다고 하자, 안동권씨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을뿐더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빈 그릇뿐.
그렇다고 아사 직전에 있는 행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터라 생각 끝에 돌아앉아 혈기 왕성한 젊었을 때라 자신의 젖을 종지에 짜 담아 노승에게 먹였더니 잠시 후 정신을 차리므로 안동권씨는 노승을 요기라도 시키기 위해 자기 집으로 모시고 왔으나 그때 병석에 누웠던 아버님 전우화 공께서 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우화公의 아들 삼 형제는 장사를 치르기 위해 우화公의 시신을 모시고 문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노승께서는 목숨을 건져 준 보은의 대가로 소승이 묘지를 잡아주겠다고 간청하기에 아들 삼 형제는 노승과 함께 묘지를 잡으로 성마령 산하를 답사한바, 노승께서는 지금의 묘 터(전정승 구덩이)를 가리키며 이곳이 명당입니다. 이곳에 안장하면 후손이 높고 귀하게 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승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즉 이곳에 땅을 3자 정도 파면 암반이 나올 것이니 암반을 일구지 말고 암반 위에 그대로 하관하되 본 소승이 성마령(묘지에서 500m정상)을 넘어가거든 하관하십시오. 꼭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당부하고 노승은 성마령 쪽으로 사라졌다.
노승을 보낸 후 하관을 하기 위해 삼 형제는 광중을 파 내려가니 노승의 말대로 암반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맏상주 분(賁)은 노승이 시킨 대로 암반 위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려 하였으나, 순과 승 두 동생은 암반 위에 어떻게 모시느냐고 암반을 파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형제간 언쟁이 벌어지자 성미 급한 막냇동생 승이 암반을 일구어내자 난데없는 왕벌 3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한 마리는 왕대곡 쪽으로 한 마리는 변방산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성마령 쪽으로 날아가 성마령 고개를 막 넘으려 하던 노승을 쏘아 즉사시키고 말았으니 이는 노승이 천기를 누설한 보복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우화 공의 묘소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깊이 15m 묘소 언저리 40m가 사다리 원통형으로 내려앉고 묘소 언저리 옆에 거북 모양(높이 90cm, 폭 1.9m, 길이 2.7m)의 바위가 자리하니 후손들은 기이하게 여기며 이를 영구암(靈龜岩)이라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 묘소를 전정승구덩(全政承穴)이라 부르고 있다.
◎ 주모의 용꿈
사서 전식이 과거를 보러 가는데, 주막 아낙이 잠시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자기 집의 절구통에서 갑자기 용(龍) 한 마리가 황금빛을 내면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바로 주막으로 웬 선비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도 신기하여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절구통에 올라서 보기를 간청하였다. 사서가 주모의 요청에 못 이기어 실천하였더니 후일에 과거 급제하였다.
◎ 북방 호걸 전백록(全百祿)을 아십니까?
[서북인 출신으로 최초로 충청병사가 된 전백록(全百祿)]
여기에 지역 차별을 딛고 황해도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전백록의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태조가 서북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말라고 한 이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500년 동안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혹 과거에 급제해도 현령 정도였고, 무장 중에는 정봉수와 전백록 두 사람이 유일했다. 전백록은 북방 호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풍당당했고, 청렴결백하고 충직해서 지역적인 차별 속에서도 스스로 빛 난 사람이었다. 청렴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어머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한 여인이 시집 온 지 몇 해 되도록 임신을 못 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고 있는데 별안간 흰 사슴 한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와 쓰러졌다.
여인은 틀림없이 무엇엔가 쫓겨 온 것이라 짐작하고, 사슴을 뒤뜰 안에 데려가 물을 먹인 뒤 입고 있던 치마를 덮어 숨겨 두었다. 얼마 안 있어 포수 2명이 헐레벌떡 들어와 사슴을 보지 못 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베틀에 앉은 채로 태연하게 “사슴은 온 적도 없거니와 아낙네 홀로 속옷 차림으로 일하고 있는 집에 뛰어드는 무례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포수들은 황급히 사과하고 집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여인은 사슴을 몰래 놓아주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옥동자를 얻으리라”라고 전했다.
그 후 그토록 기다려 마지않던 아이가 생겼고, 낳고 보니 꿈대로 사내아이였다. 흰 사슴이 주고 간 선물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백록이라 지었다. 그 백록이 자라 현종 임금 시절에 경흥부사가 되었다.
어느 날 백록이 잠을 자는데, 어머니가 몹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너무 놀란 나머지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깨어났다. 날이 밝자마자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여러 하인들이 가마를 탄 그의 뒤를 따랐다.
온성 집에 도착한 그는 “어머니, 백록이 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어머니를 찾았다. 곧 열릴 줄 알았던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한 백록이 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으나, 어머니는 문을 열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 어미를 보겠다고 이렇게 바쁜 모내기 철에 숱한 하인들을 거느리고 올라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몹쓸 놈 같으니”라는 호통만 들었다. 백록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공직자로서 제 분수를 지키라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바로 백록의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우리 온성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훌륭한 분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 들으며 자라왔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백록처럼 되는 것이 꿈이었다.
◎ 조선이 개벽한 이후 4천여 년 동안 이처럼 중국인의 극단적인 찬양을 받은 이가 없었다.
전병훈
조선 시대 의금부도사, 균전사, 부평군수 역임. 성리학자임.
불우했던 구한말, 중화민국의 정부의 장상將相이 스승으로 섬겼던 유학자(儒學者) 출신의 위대한 도사이며 북경의 원세개정부의 장상(將相)들의 도교수련을 지도하면서 국사(國師)의 역할을 수행했고, 당시 북경에 체류중이던 유럽인들도 제자로 찾아와서 도를 배웠다고 하니, 중국과 유럽에까지 그만한 존경을 받은 세계적 인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당시 북경에 찾아가서 그에게 천부경을 전해준 윤효정(1858-1939)은 “조선인으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최치원 이래로 초유의 사건이며, 공자,맹자가 부활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한 존경은 받을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군산대 김성환 교수는 전병훈이 근대 이후를 전망하고 준비한 미래사상가였다며 원효·최치원과 나란히 위대한 한국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전병훈의 책은 구미 29개 나라의 150개 대학과 미국, 프랑스, 스위스의 세 총통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 제자들이 명⋅청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전병훈을 28성철(聖哲)의 한 사람으로 추존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혹자가 칭송하기를, “조선이 개벽한 이후 4천여 년 동안 이처럼 중국인의 극단적인 찬양을 받은 이가 없었다.”고 했다
‘정신철학통편’을 저술하여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철학을 소개하였으며, 그 책에서 천부경을 처음으로 인쇄물로 소개하였음
9. 항열도(行列圖)
10. 빛나는 여의주, 빛나는 등잔불 형국 정선 중시조 묘소
[괘등혈]
괘등혈(掛燈穴)이 아닌가.
본래 괘등혈은 등잔불이 환하게 앞으로 비치도록 형상화되어야 하므로, 안이 없어야 하며 득수 너머에 촛불처럼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놓여있어야 한다. 이미 해는 서산에 걸려 있으므로 나경(羅經)을 꺼내어 좌향을 볼 필요가 없었다. 뾰족한 봉우리로 줄을 탱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간좌(艮座原)였다. 간좌는 서남향이기 때문에 겨울의 살을 에는 북서풍을 등질 수 있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득수(得水)까지는 거리가 멀어 발복(發福)이 느리지만 안산이 겹겹이 싸여서 지기(地氣)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마련이다. 혈처(穴處)의 앞을 에워싸는 조산의 모양으로 보아 많은 인물이 배출되리라.』
[구룡쟁주(九龍爭珠)형]
『9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九龍爭珠)으로 첩첩산중이고, 위요(圍繞) 한 산줄기는 만첩(萬疊)을 이루어져 개면환공(開面環拱)하니, 수구(水口)는 중중관쇄(重重關鎖) 곡곡긴색(曲曲緊塞)하였으니 가히 “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 ”이다.
높이 솟은 봉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가혈대지(佳穴大地)이요, 어찌 예사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청룡(靑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등천할까!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당대에 크게 발복하여 9대에 걸쳐 장상(재상)이 연출하고, 부마도 당연히 나온다.』
[8청룡(靑龍) 9백호(白虎)의 명당 대지(大地)]
11. 최근 상황
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의 속성(俗姓)이 변화됨
김견명→전견명(全見明)
2017년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김견명(金見明)”이 아니라 “전견명(全見明)”임을 논문을 통해 발표하였다.
② 현재 국회의원
전해철, 전혜숙, 전주혜
③ 대통령실 정무1 비서관 전희경, 대한민국 제7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전현희, 서초구청장 전성수
④ 녹두장군 전봉준,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전형필(全鎣弼), 전씨종약원 초대 종약장 전면조, 사학자 전해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제4대 지상작전사령관 대장 전동진(全東鎭)장군, 대한민국 제22대 해병대사령관 전도봉, 대한민국 제34대 해병대사령관 전진구, 전인범 제25대 육군특수전사령관, 정치평론가 전원책, 전순표 세스코회장, 방송인 전현무, 아나운서 전인석, 배우 독고영재(전영재), 배우 전여빈, 배우 전계현, 가수 전영록, 가수 전유진, 배구선수 전광인, 배구선수 전새얀, 농구선수 전희철, 동명대학교 총장 전호환, 경동대학교 총장 전성용, 소설가 전상국
⑤ 학송집에 나오는 표현으로 의병장 조헌이 유생 전유형[형조참판을 역임]에게 전씨 가문을 삼한구족이라고 표현함
○ 삼한구족三韓舊族
옛적에 지체가 높았던 오래된 집안.
○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대대로 門閥(문벌)이 높은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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