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의 소창지, 관악산 망해암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총부 건설 당시부터 서울(경성)을 지속적으로 내왕하셨다. 이는 익산총부와 더불어 수도 서울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다. 서울에 깃들어 있는 소태산의 행적을 찾아 그 메시지를 해석해 내는 일은 미래교화의 지침이 될 것이다. /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의 창립회원 중 최초 열반자인 김낙원의 초상에 새로 정한 신정(新定) 예법에 따른 치상 절차를 지도하기 위해 원기15년(1930) 8월 14일(陰 6월 20일) 상경한다.
당시 여자들만 거주하는 창신동회관은 울타리가 허술하여 동네 아이들이 무단출입하는 등 도난 위험이 있는 상태였다.
이에 원기15년(1930) 8월 27일(陰 7월 4일)부터 소태산은 노진허와 김영신을 데리고 목재와 철주 등을 구입하고 낙산 채석장의 중국인 석공(淸人石工)과 목수를 들여 바위에 구멍을 뚫고 기둥을 세워 판자로 담을 두르는 공사를 한다.
5일 동안 울타리 공사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당시 40세)는 9월 1일(陰 7월 9일)에 소창(蘇暢·消暢)차 열차로 안양역까지 가서 관악산 망해암(望海庵)을 둘러보고 다음날 창신동회관으로 돌아온다. 소창은 막혀있고 답답한 마음을 해소시키어 정신을 소생시키고 기분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월말통신> 30호 - 경성근황
4. 본래부터 허술하여 걱정하던 창신동지부 집 동산(東山)으로는 동내아이(洞內兒孩)들이 무상출입(無常出入)을 하여 도난의 염려가 없지 아니하므로 판장(板墻)을 하기로 결의하고 본월(음7월) 초4일 종사주께서는 친히 노진허와 김영신 양인(兩人)을 데리고 재목과 철주 등 소용물품을 매입하시다.
그 익일(其翌日)은 청인석공(淸人石工, 중국인 석공)을 들여 암상(岩上)에 구무(구멍)를 파는 등의 준비를 끝내신 후 동(同) 8일은 오전부터 대목(大木) 2인과 조수(助手) 1인을 들여 판장(板墻)을 세운바 종사주께서도 많은 조력(助力)을 하시어 재방인(在傍人,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송(惶悚)치 아니하지 못하였다.
비용은 41원 70전이든 바 상조부 경성유지비(京城維持費) 당좌예금 내에서 인출하였더라.
6. 종사주께서는 정신을 소창하실 차 본월(陰 7월) 9일 오전 9시발 열차로 (망해庵) 안양역(安養驛)까지 행가(行駕)하셨다가 어떠한 사정으로 그 익일(翌日) 오전 차(車)에 창신동으로 환가(還駕)하셨더라.
7. 본월 11일 야(夜) 10시 30분 열차로 종사주께서는 향본관(向本館) 출발하시다.
소태산 대종사는 김낙원의 치상과 창신동회관의 울타리 공사를 마친 다음 날인 9월 1일(음 7월 9일) 안양의 관악산 망해암에 소창하기 위하여 경성역에서 9시 열차로 출발한다.
망해암 동행자 유무는 알 수 없으나 만일 동행했다면 원기15년(1930) 당시 창신동회관 임원인 재가교무 이공주, 서기 김영신 또는 울타리 공사를 함께 한 공양원 조전권, 회원 노진허 중 누군가 함께 했을 것이다.
관악산 자락인 망해산(해발 290m) 8부 능선에 위치한 망해암(1927년 주소: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좌) 안양역에서 망해암(노랑원)으로 가는 수암천변 철길 건널목 일대(최병렬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원 대표의 안내) (우) 수암천변 철로 너머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망해암
〈조선일보〉 1935년 4월 20일자 ‘춘교명산, 삼박자(三拍子) 행각 관악산’ 편에 “… 9시 27분에 안양역에서 … 내렸다. … 모두 다 초행이라 마을 사람에게 관악산을 물었더니 그는 안양역의 동쪽에 이어 있는 그리 높지 못한 산을 턱으로 가리켰다. … 산길에 익지 못한 다리가 조약돌 박힌 벼랑길을 약 30분이나 더듬어서 겨우 그 산 이마에 의지해 붙은 작은 암자에 당도했다. 처마에 걸린 현판에서 망해암의 세 글자를 읽고 …”라는 기행문이 등장한다.
이 기사의 노정(路程)은 8시 20분에 탐방자 3명(三拍子)이 경성역에서 만나 8시 45분발 수원행 열차(1935년 8월 10일 동아일보 기사)를 타고 노량진(노들강변)-영등포역-시흥역(始興驛)를 거쳐 9시 27분 안양역에 도착한다.
소태산도 이 경부선을 45분가량 타고가신 것이다. 그리고 안양역에서 내리어 광장 옆 수암천변길 따라 철로를 건너 지금의 안일초를 지나 양명교 옆에 있었던 가교(假橋, 나무다리 또는 징검다리)를 통해 안양천을 건너 양명여고와 대우아파트 사이로 나아가서 경사 심한 벼랑길을 30여 분 올라 망해암에 이르는 산길(총40~50여분 소요)을 밟은 것이다. 이 중 막판 오르는 길은 현재 없어진 상태이다.
안양역~망해암 노정 (추정길-빨간선, 현행길-노란선) 출처 : 한울안신문(http://www.hanulan.or.kr)
망해암(望海庵)은 안양 일대 및 저 멀리 서해 바다와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기에 망해암이라 이름 지어진 듯하다.
망해암은 1922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6년에 박호남(湖南) 주지가 법당과 요사채를, 1939년에 유청봉 주지가 용화전을 중건하였으나 6·25한국전쟁 때 다시 전소된다(출처: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3).
소태산 대종사가 방문했던 1930년의 망해암은 산허리 바위 사이에 두어 채 있는 절간으로 외부인이 머물기 용이한 여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소태산은 하룻밤을 망해암(또는 안양 시내)에서 묵고 다음날 창신동회관에 돌아온 듯하다.
그 당시의 망해암은 고려 전기 석가여래입상과 그 아래의 노거수 및 바위절벽 그리고 석가여래입상 옆의 안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전망대만이 옛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소태산은 용화전 중건 이전 야외에 모셔진 불상과 주변 등을 친견했던 것이다.
안양역(1905년 1월 1일 개통)은 소태산 대종사가 경성(서울)을 내왕할 때 정차하던 철도역이다. 소태산은 안양역을 경유할 때 산 정상 즈음의 망해암을 바라보셨으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과 낙조가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시간을 내어 탐방하신 듯하다.
소태산은 큰일을 마치거나 어떠한 일을 매듭짓고 난 후에는 피로 회복을 위해 크게 쉬는 시간을 가졌다.
김낙원 치상과 울타리 공사의 동(動)한 일을 마친 후 정신을 소창하는 정(靜)한 시간을 가져 동과 정을 골라 맞춘 것이다(『대종경』 서품 8장 “동과 정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대종경』 교의품 33장 “피로의 회복을 위하여 때로는 소창도 하라”).
이처럼 망해암 소창(蘇暢·消暢)은 활동과 휴식, 삶과 여가를 조화시키는 일환인 것이다.
(좌) 2013년도 망해암 산상기도 때 조서천 / (우)소태산이 대면한 바위절벽 및 석간수
참고로 안양역 인근의 안양유원지는 경성과 주변 지역 사람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고, 피서철에는 그 입구(안양풀장역)에 임시열차가 정차하곤 했다(인천과 안양에 일요 임시열차, 동아일보 1935.8.10.).
출처 : 한울안신문(http://www.hanulan.or.kr)
원불교 인천교당 | 대종사와 안양 망해암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