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대한 생각(사순절 오류성)
‘고난주간’이다. 그리고 ‘부활주일’이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계는 여러 행사로 바쁘다. 여러 종류의 금식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 ‘한 끼 금식’, ‘미디어 금식’, ‘핸드폰 금식’ 등. 여러 종류의 고난 체험을 기획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분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슬퍼하며 우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아 관련된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보낼 것인가?
사육제(謝肉祭)란 무엇일까?
사육제는 ‘카니발’(Carnival)이라 불린다. ‘고기’(meat)를 뜻하는 라틴어 ‘카르너’(carne)에서 온 단어이다. 고기를 먹고 즐기는 축제라는 뜻이다. 로마 천주교회가 발전한 나라에서 사순절 전에 하는 광란의 축제이다. 우리나라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사순절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고기를 실컷 먹고 즐기는 축제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금욕기간으로 정해 고난에 동참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이다. 개신교회와 개신교회가 융성한 나라에는 이런 문화가 없다.
사순절(四旬節)이란 무엇일까요?
부활절 전 40일 동안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이다. ‘사순’은 ‘사(四) × 순(旬: 10) = 40’을 의미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대체로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기는 한다.
16세기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U. Zwingli) 목사는 교회개혁을 시도했다. 1521년에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요구로 프랑스 왕에게 군인을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고 1522년에는 교황에게도 군인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당시 스위스가 용병을 여러 나라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결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규칙, 그리고 관습을 서서히 폐지했다. 사순절에 금식하며 고기나 소시지를 먹지 않는 교회의 규칙을 폐지했다. 츠빙글리는 이런 규칙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복음을 흐릿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유일한 법이라고 설교했다. 교인은 그대로 순종하고 따랐다. 츠빙글리는 사람들이 생각해 낸 온갖 전통을 성경에 기초해 과감하게 폐지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먹을 자유가 있음을 강조했다. 물론 성도는 얼마든지 금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다.
고난주간(苦難週刊)이란 무엇인가?
사순절 기간 가운데 절정인 마지막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른다. 개신교회에서도 부활주일이 낀 이 한 주간을 기념하기도 한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주간에 관한 종교음악을 만들었다. 특히 바로크 시대(17-18세기)에 많은 수난곡(Passion Music)이 만들어졌다. 마태 수난곡, 누가 수난곡, 마가 수난곡, 요한 수난곡 등. 수난곡은 ‘패션’(Passion)이라고 한다. ‘열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난’이라는 말이다. 바흐(J. S. Bach)의 마태 수난곡 가운데 일부를 H. L. Hassler가 1601년에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의 가사를 붙여 만든 곳이 찬송가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익숙한 찬송이다. 고난주간이 만들어 준 좋은 기독교 문화인 셈이다.
부활절(復活節, Easter)이 무엇인가?
부활절을 ‘Easter’라 부른다. 영어 이름이 좀 생뚱맞다.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게르만족의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다. 독일 게르만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도 이방 관습을 버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봄에 돌아오는 부활절이 되면 그들이 섬기던 여신 ‘오스타라’(Ostara/Eostra)를 위한 축제도 함께 치렀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부활절을 ‘오쉬테른’(Ostern)이라 부른다. 게르만족은 부활절에 큰 불을 지피기도 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달집태우기’ 같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와 높이 올라가는 불꽃을 보고 즐겼다. 또 부활절에 빵을 고기와 계란을 곁들여 먹는 전통이 있었다. 부활절에 왜 계란을 먹는지 알 것 같다. 게르만족의 과거 종교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부활절에 행하는 여러 행사는 이방 종교와 기독교의 문화가 섞여 만들어 진 것이다. 그렇다고 부활절이 이교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복음은 언제나 어느 정도 문화의 옷을 입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활절이 왜 매년 다른가?
고대교회에 부활절 날짜를 정하기 위해 많은 토론을 했다. 본래 초대교회는 유대 월력의 유월절에 맞추어 부활절기 행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매년 춘분 후 첫 만월이 온 후 첫 번째 다가오는 주일(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정했다. 보통 3월 20(21)일이 춘분이고 그 후 첫 만월, 곧 2019년의 경우 4월 19일이 첫 만월(보름)! 첫 만월 후 다가오는 첫 주일, 4월 21일 주일이 부활절이다.
한편 동방 정교회는 1582년 바뀐 그레고리우스력을 따르지 않고 과거의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기에 10일 정도의 차이가 난다.
우리는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초대교회는 주일(‘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기뻐하는 잔치처럼 성찬을 행하고 예배했다. 주일 외에 특별한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2세기경부터 교회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일 년에 한 번씩하면서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중세 때에는 더 많은 축제일을 만들어 매년 시행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축제일을 폐지했다. 교회의 축제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믿음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절기들은 이미 사회에 관습화 되어 폐지는 쉽지 않았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하다가 쫓겨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기독교 축제일을 없앤 것이었다. 제네바 의회는 칼빈과 그의 동료들을 쫓아내고 교회절기를 다시 부활시켰다. 하지만, 칼빈이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복귀하면서 그 모든 절기를 폐지했다.
그 후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1574년 도르트레흐트 노회가 기독교 연례 절기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주일 하나면 충분하다고 결정했다. 단지 ‘성탄주일’과 ‘부활주일’, 그리고 ‘성령 강림주일’에 그 주제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지. 그렇지만 보통의 주일보다 더 나은 어떤 특별한 축제로 지키지는 않았다.
오늘 우리도 이런 종교 개혁가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육제를 하지는 않는다. 대신 사순절을 지키는 개신교회가 있다. 미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복음적으로 잘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고난주간에 특별히 절제하며 금식하며 고난을 체험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한다. 감동적인 체험의 기회일 수 있지만, 얼마나 복음적이며 성경적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물론 유익한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시기와 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교회가 특별한 여러 축제와 절기들을 만듦으로서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있음을 기억하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탄절이 세속화되어 복음이 희석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고난절기와 부활절도 마찬가지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용어보다 ‘부활주일’이라 부르면 좋겠다. 이 날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설교를 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매 일요일마다 예배하는 주일(主日)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최고의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매 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지켜가도록 더 애써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의 신앙생활이 부족할수록 어떤 특별한 한 날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울의 다음 고백(고전 15:31)을 기억하며 매일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자.
“나는 날마다 죽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