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衆欺瞞의 문화산업
/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중심으로
’대중문화‘라는 우리말은 영어의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라는 두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먼저 mass culture는 대중문화의 본질을 대량 생산 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파악하는데, 이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문화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량 생산 돠는 상품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현대의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popular culture란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대중문화가 대중의 진정한 관심과 이해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며 대중문화를 찬양하는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보는 아도르노의 관점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오늘날 독점 자본주의하에서 문화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사업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산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얼마나 인기를 끌었고 수익을 올렸느냐에 좌우된다.
그 작품에 대한 미학적 가치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시장성이 그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예술이 자신만의 특수한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제 예술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 상황에서 그것의 사용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신에 교환가치 자체가 향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제 소비자는 값비싼 음악회의 표를 구매하면서 실제로 그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음악 그 자체를 좋아하고 숭배하기보다는 연주회 입장권을 사기 위해 지출했던 돈을 숭배한다. 대중이 느끼는 쾌감은 그 입장료가 비쌀수록 더욱 증가한다.
이처럼 문화의 상품화는 상품 물신성物神性이라는 구도 속애서 경재적인 생산 논리가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중의 거대한 수요 때문에 독점적이고 획일적인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문화산업의 조종에 의한 일종의 부메랑 효과로 문화의 수요가 이루어진다.
최근 우리나라의 영화시장은 거대한 투자배급사들이 독점적으로 잠식한 영화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때문에 관객은 한정되어 있는 영화 편 수의 현실 조건에서 그들의 상영작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수요는 단순히 대중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만드는 거대한 독점기업의 손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이렇나 문화산업의 산물이 나타내는 특징을 ‘표준화’와 ‘사이비 개성화’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한다.
표준화는 대량 생산 체제의 산물로서 대중문화가 겪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측징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 유형의 인기 가요나 인기 배우, 멜로물이 돌고 돌지만 실제로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오락물도 겉보기에는 내용이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변화 없는 반복일 뿐이며 세부 사항들만이 대체 가능하다.
실제로 우리는 생전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어디선가 자주 들어본 듯한 친숙함에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방에서 단지 몇 소절만 듣고서도 그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를 수도 있다.
이는 문화산업의 산물들이 사실상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다른 상품들처럼 표준적인 도식에 따라 끊임없이 재생산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모든 산믈에 있어서 표준화는 지속되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드라마의 소재들, 출생의 비밀, 불륜, 불치병, 기업 상속 등은 오늘날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그때마다 약간의 변주와 결합이 있긴 하지만 한마디로 도긴개긴이다.
표준화가 항상 성공을 보장해주는 요인은 아니다.
자칫하면 표준화는 대중으로 하여금 구태의연한 반복이라는 인상을 주어 지루함과 싫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똑 같은 것에 더 이상 돈을 쓰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표준화와 더불어 늘 함께 추구되는 것이 바로 ‘사이비 개성화’이다.
문화산업은 예전의 것과는 다른 뭔가 개성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참신하고,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개성적이고 특수한 것은 아니며 단지 개성적인 것을 가장하고 선전하는 가짜, ‘사이비 개성’에 불과하다.
결국 표준화와 사이비 개성화에 의해 사람들의 여가 시간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인 생산물, ‘항상 동일한’ 문화산업의 산물들로 채워진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에서의 차이란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소비자들을 분류하고 조직하고 장악하기 위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본과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 계획한 의도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생산자들은 다양한상품들을 제공하여 다양한 질을 원하는 대중을 만족시키려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배하기 위하여 대중을 분류하고 조직하고 통제하기 위한 총체적인 관리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탐색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미리 우리 수준에 맞게 관객의 유형을 겨냥해 제조된 대량 생산물에 편안하게 안착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산업의 산물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산업의 산물은 항시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에 대해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함으로써 수용자의 적극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위축시킨다.
이렇듯 문화산업을 통해 대중의 사유 능력은 점차 불구화되는 것이다. 자동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대중은 문화산업의 산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어떠한 정신적 노력이나 긴장도 회피하려 들게 한다. 틀에 박힌 대중문화의 산물들은 상상력이나 사고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익숙해진 대중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반성이 마비되고 마침내는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산업의 효과와 기능은 무엇인가?
아도르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문화산업이 유흥산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흥산업이란 즐김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인데, 이때 즐김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 향유가 아니라 일종의 오락이자 한갓된 유흥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문화산업은 위로부터 조정되고 인스턴트 식품처럼 전부 조리되어 언제 어디선건 곧바로 제공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문화는 허위적이고 조작된 욕구와 이데올로기를 유포한다. 소비자를 위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문화산업이 하는 일은 사실상 고객의 반응을 날조하며 이렇게 날조된 반응을 훈련시키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산업은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허위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자배의 도구가 되었다.
대중문화가 주는 즐거움이란 결국은 도피에 불과하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드는 ‘고통의 완화제’일 따름이다.
따라서 줄김이 주는 도피는 사실상 현실의 억압과 모순에 대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실천적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음악의 중요한 기능은 ‘사회적 시멘트’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시멘트가 어떤 대상을 바닥에 견고하게 고정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대중음악의 사회심리학적 기능은 대중이 기존의 생활방식에 충실하도록 심리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만드는 시멘트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대중음악을 통한 이러한 적응방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리드미컬하게 복종’하는 유형과 ‘정서적으로 복종’하는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리드미컬하게 복종한다’는 의미는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의 리듬에 자신을 내맡기며 아무 생각없이 온 몸을 흔들어대는 유형이다.
두 번째로 ‘정서적으로 복종하는’ 유형은 대중음악이 주는 정서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서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흐느적거리는 유형이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음악은 “얘야, 이리 와서 실컷 울려무나”라고 말하는 엄마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컷 울게 함으로써 고통을 달래고 마취시킬 수 있을 뿐이지,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사유와 실천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이제 예술작품은 도시의 공원처럼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전에는 소수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작품이 문화산업에 의해 헐값으로 대량 판매되며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마치 소수에게 한정되어 있던 교양이라는 특권이 폐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예전에는 대중의 접근이 거부되었던 영역이 모두에게 개방된다고 해서 이를 문화의의 민주화이자 발전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이 효과는 ‘교양의 상실과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삶은 이전의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넓게 확산된 쾌락과 일반화된 전문 지식들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충분히 고통스럽고 거짓되며 무가치하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관능과 쾌락, 소유와 소비 그리고 얄팍한 상대주의와 저속한 대중문화를 새로운 아편으로 삼아 하루하루 스스로를 위로하고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다가오기 마련인 각성의 시간이면, 또한 부족함 없이 비참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