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부(江陵府)의 운금루(雲錦樓)에 대한 기문
강릉부는 본래 예국(濊國)의 옛터로서 한나라 때 군(郡)을 두어 임둔(臨屯)이라 했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 일컬었고 신라 때에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 고려 초에 동경(東京)을 두었다. 뒤에 하서(河西)라 일컫기도 하고 경흥(慶興)이라 일컫기도 하다가 충렬왕 때에 오늘날의 명칭으로 고쳤다. 강원도의 고을 중에서 큰 고을이다.
바다를 낀 지역이라 기이한 명승이 많으며 더러 신선이 남긴 자취가 있으므로 임영(臨瀛)이라고 부르니, 대개 봉래(蓬萊)와 영주(瀛州)에 견준 것이다. 그 풍속이 청백하고 간이하며 인심이 순박하고 고풍스럽다.
성화 정유년(1477, 성종8)에 부상(府相) 이공(李公)이 이곳에 부임하여 몇 달이 안 되어 정치가 훌륭하게 이루어졌다. 객관 동쪽에 예로부터 ‘운금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버려진 채 보수하지 않은 지 십오륙 년이 되었다. 공이 개연히 중수할 생각을 하여 동북쪽으로 조금 옮겨서 새로 지으니, 다른 건물들보다 우뚝 빼어났다. 누각 남쪽에 못이 있는데 그곳에 연꽃을 심었고 못 안에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 훌륭한 경관이 참으로 기이하고 특출하다 할 만하였다.
하루는 이후(李侯)의 아들인 부정(副正) 이덕숭(李德崇)이 이후의 명을 전하며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 동한(東韓)에서 산수의 빼어남은 관동(關東)이 으뜸이고 관동에서는 강릉이 제일이다. 일찍이 가정(稼亭) 이 선생(李先生)의 〈동유기(東遊記)〉와 근재(謹齋) 안 상국(安相國)의 《와주(瓦注)》를 읽어 보고 강릉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 경포대(鏡浦臺), 사선봉(四仙峯), 한송정(寒松亭), 석조(石竈), 석지(石池), 문수대(文殊臺) 등인 것을 알았고, 선배들의 풍류도 이로 말미암아 살필 수 있었다.
〈한송금곡(寒松琴曲)〉은 중국에까지 전해졌고, 박혜숙(朴惠肅)과 조석간(趙石磵)이 경포대에서 놀았던 일은 오늘날까지도 멋있는 이야기로 남아 있으며, 호종단(胡宗旦)이 비석을 물속에 넣은 일 또한 특별히 기이한 일이다.
거정이 직무에 얽매여 한번 가 볼 겨를이 없었다. 동쪽으로 임영을 바라보며 부질없이 누워서 즐기곤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부탁을 받고 즐거이 이렇게 말한다.
“내 들으니, 누각의 높이는 티끌 속세를 벗어나 풍우(風雨)를 능멸하고, 누각의 크기는 수백 명이 앉을 만하며, 올라가서 보면 부상(扶桑)과 양곡(暘谷)이 한눈에 들어오며, 풍악산이 뒤쪽에 있고 오대산이 곁에 있으며, 바닷가에 짙푸른 봉우리들이 안개와 노을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 마치 터럭이나 실오라기 같으며, 아침 햇살과 저녁 안개, 네 계절의 바뀜, 만물의 변화 같은 것은 그 천태만상을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운금(雲錦)’으로 편액을 건 것은 어째서인가? 일찍이 소자첨(蘇子瞻)의 하화시(荷花詩)를 보았더니 ‘천기운금(天機雲錦)’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취한 것이리라.
내가 상상해 보건대, 그곳 못물이 불어 푸르름을 더하고 연꽃이 활짝 피어 꽃향기와 잎 그림자 어리어 띠처럼 두르게 되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달이 환하거나 이슬이 내릴 때에, 깨끗하게 서 있는 것과 맑은 향이 멀리 퍼지는 것이, 기이한 자태가 기상이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덕을 논하자면, 속은 비어 있고 겉은 곧아서 군자의 기상일 것인데, 주자(周子)의 〈애련설(愛蓮說)〉에 모두 다 말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노닐고 여기에서 쉬고 여기를 오르내리는 이들은 단지 술이나 마시고 노는 것이 아니라, 곧은 연꽃에서 또한 사물을 관찰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만물의 이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사물을 관찰하여 자신에게서 만물의 이치를 취하는 것이라면, 어찌 그러한 것이 연꽃뿐이겠는가.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 앞에 이른바 경포대, 한송정, 사선봉, 풍악산, 오대산 등 무릇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닿는 것들이 모두 어짊과 지혜의 쓰임이 되어 내가 본성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후가 어찌 별 생각 없이 이 누각을 세웠겠는가.
그러나 거정이 눈으로 보지도 않고서 강변을 늘어놓는다면, 또한 헛소리에 가깝지 않겠는가. 뒷날 혹 몸이 한가하여, 동쪽을 유람하고 싶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응당 황학(黃鶴)을 불러 백운(白雲)을 헤치고 이 누각에 올라 부(賦)를 지어 내 말을 마무리하리라.”
이후의 이름은 신효(愼孝)이고 자는 자경(自敬)이니, 전성(全城)의 명망 높은 집안 사람이다. 여러 차례 지방관을 맡았는데 국법을 잘 지키고 민심을 잘 다스려 이름이 드러났다.
무술년(1478, 성종9).
[주-D001] 봉래(蓬萊)와 영주(瀛州) :
신선이 산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주-D002] 부상(府相) 이공(李公) :
이신효(李愼孝)를 말한다. 생몰년 미상이다. 여주 목사를 거쳐 1475년(성종6)에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며, 1480년에 형조 참의가 되었다. 이후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주-D003] 이덕숭(李德崇) :
1462년(세조8)에 임오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집의, 동부승지, 전주 부윤,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주-D004] 가정(稼亭) 이 선생(李先生)의 동유기(東遊記) :
가정은 이곡(李穀, 1298~1351)의 호이다. 이곡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中父)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동유기〉는 《동문선》 권71과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권5 등에 실려 있다.
[주-D005] 근재(謹齋) 안 상국(安相國)의 와주(瓦注) :
근재는 안축(安軸, 1282~1348)의 호이다. 안축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와주》는 안축이 강원도 안렴사로 있을 때에 지은 시문을 모은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말한다. 나중에 《근재집(謹齋集)》의 근간이 되었다.
[주-D006] 한송금곡(寒松琴曲)은 중국에까지 전해졌고 :
〈한송금곡〉은 〈한송정곡(寒松亭曲)〉을 말한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한송정곡〉을 설명하기를, “고려 장연우(張延祐)라는 사람이 현종(顯宗) 때 벼슬길에 나아가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 장연우의 다른 이름은 장진산(張晉山)이다. 당시에 〈한송정곡〉이라는 악부(樂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곡조를 비파의 밑바닥에 적었는데, 그 비파가 바다로 떠내려가서 중국 강남에 이르렀다. 강남 사람들이 그 가사(歌詞)를 해석하지 못하였다. 광종(光宗) 때 장진산이 강남에 사신으로 가자, 강남 사람들이 그 곡조의 뜻을 물었다. 장진산이 시를 지어 해석하기를, ‘달빛 하얀 한송정의 밤, 파도 잔잔한 경포대의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것은 신의 있는 갈매기 한 마리.[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라고 하였다.” 하였다. 청나라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거이록(居易錄)》에도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7] 박혜숙(朴惠肅)과 …… 일 :
박혜숙은 박신(朴信, 1362~1444)으로, 본관은 운봉(雲峯), 자는 경부(敬夫), 호는 설봉(雪峯)이다. 혜숙은 그의 시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태조 때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고, 대사성, 대사헌,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공조 판서, 이조 판서, 찬성사 등을 거쳤다. 둘째 아들 박종우(朴從愚)는 태종의 사위이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12일 기사에 졸기가 실려 있다. 조석간(趙石磵)은 조운흘(趙云仡, 1332~1404)로,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은거하면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자호하였다. 그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계림 부윤(鷄林府尹)을 거쳐 1392년(태조1) 강릉 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호탕하고 속세에 구애되지 않았고 은거생활을 할 때에는 소를 타고 다녔으며 죽을 때에는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태연히 앉아서 죽었다고 한다. 《태종실록》 4년 12월 5일 기사에 졸기와 묘지가 실려 있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박신이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한 이야기와 강릉 부사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鏡浦)에서 잔치를 베풀고 짐짓 홍장이 죽었다고 장난을 치며 즐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D008] 호종단(胡宗旦)이 …… 일 :
호종단은 중국 사람으로서 고려 때에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비석을 보면 글자를 뭉개거나 부수고 비석을 물속에 넣었다고 한다. 《동문선》에 실려 있는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와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 등에 호종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D009] 누워서 …… 지가 :
《송서(宋書)》 권93 〈은일열전(隱逸列傳) 종병(宗炳)〉에 의하면, 송나라 때의 종병이 노병이 들어 유람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두고 누워서 그림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주-D010] 부상(扶桑) :
동해의 해가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이다. 높이가 2천 길이고 둘레가 2천 아름이나 되며, 같은 뿌리에서 두 줄기가 짝으로 자라나서 서로 의지하므로 ‘부상’이라 한다고 한다. 동해, 해 뜨는 곳, 태양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주-D011] 양곡(暘谷) :
동해에 있다는 전설상의 장소로서, 해가 맨 처음 돋는 곳이라 한다.
[주-D012] 소자첨(蘇子瞻)의 …… 있었다 :
소자첨은 송나라 문장가인 소식(蘇軾)이다. 자첨은 그의 자이다. 소식의 〈화문여가양천원지(和文與可洋川園池)〉라는 시가 30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두 번째 시가 〈횡호(橫湖)〉이다. 그 시에, “푸른 연잎이 붉은 연꽃을 가려 주는 것을 유심히 보느라 하룻밤 사이에 호숫가에 서리 내린 것도 몰랐네. 천기의 운금단을 말아 와서 그 하얀 비단 위에 가을빛을 쏟아부었구나.[貪看翠蓋擁紅粧 不覺湖邊一夜霜 卷却天機雲錦段 從敎匹練寫秋光]”라고 하였다. 하화시(荷花詩)라고 한 것은 시 내용에 연꽃을 거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듯하다.
[주-D013] 속은 …… 말하였다 :
송(宋)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겼으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고 겉은 곧으며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를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음을 사랑한다.” 하였다.
[주-D014] 어진 …… 좋아한다 :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