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슬픈 추수의 밤이 놓여 있었다 ●지은이_박금리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1. 6. 30 ●전체페이지_128쪽 ●ISBN 979-11-86111-96-3 03810/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희망으로 찾아가는 고향 같은 시편
박금리 시인의 신작시집 『슬픈 추수의 밤이 놓여 있었다』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농부가 농사의 부푼 꿈을 키우듯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 행위와 농사거리, 삶의 추수로서의 시가 가득하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조롱박과 청양고추와 무와 들깨처럼 옹차고 골차게 세계의 중심으로 모이는 생생한 힘이 느껴진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폭포를 받아내는 소(沼)처럼, 시인은 자연과 우주와 노동과 한 몸이 되어 시를 살아낸다. 그의 추수는 수많은 농부와 함께하면서 뜨거운 연대를 통해 우주의 추수로 이어진다.
묵은장과 어울리는
구수한 봄내가
밥상 위에 피어오르면
메주를 띄워 장을 담던
이전의 노고스런 기억이
봄기운으로 환생한다
겨울 찬바람도 물러가고
이 향긋한 냉이가 실어주는
기시감의 추억과 따스한 날들을
만끽하기 위해
들과 산언저리에 모여
냉이를 캐어보는 거다
우리가 윤회의 자락들을
기억할 리 만무하지만
냉이 나물이 빚어내는
봄날 싱그러움 속에 번지는
간절한 추억들이야말로
불현듯 인연의 조각들을 엮어내며
나물 캐기로 윤회하는 것이다
―「냉이」 전문
「냉이」에서 보듯이 시인은 농사와 시 쓰는 일을 윤회와 같은 선상에서 봄이 되면 습관적으로 행하는 나물캐기의 반복으로 표현해낸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일상생활의 연속성에서 윤회를 보는 세계관을 표출한다. 한편, 시인에게 시를 쓰는 과정은 반성의 과정이다. 시를 언어적 유희의 수단으로 혹은 타인과의 차별성을 위해 시를 끼고 살지는 않았는지, 시에 대해 순수했는지. 시인은 시 「양치」에서 이에 대해 스스로를 문제제기한다.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한다
내 안면 위로 선인장처럼 솟은
머리칼을 바라보다
문득 입안을 넘나드는 칫솔을 보니
거기에도 머리칼이 있다
창문 너머 공중은 부우옇고
머리숱에 미세먼지가 끼듯
칫솔모에는 플라크가 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바닥이 각질을 떨구며
늙은 새처럼 푸덕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세먼지를 만드는 공장이라니
이처럼 더럽혀진 인간이
사랑이란 어거지 놀음으로
내 아내의 혓바닥을 휘감으며
그녀의 몸통 안에 온갖 때를
밀어 넣는 건 아닌지
공해 물질 주범은 아마도 나인가 싶어
미세먼지를 만들어내는
가해자가 되어 상상의 법정에 서면
칫솔질은 잇몸이 상하도록
거칠게 빨라지고
한평생 나불대던 공해 공장 주둥이가
양치 거품을 물며
묵은 방사능을 토하고 있다
―「양치」 전문
농자에게 가장 기쁜 일이 추수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시인에게 추수란 혹독한 것이다. 깨달음의 추수는 또 다른 농사 거리를 남겨 놓으니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 행위의 연속인 셈이다. 이런 세계관을 깨달으면서도 시인은 외롭고 무언가 모자라고 허망하기까지 한 습성을 헤어나지 못한다. 이는 자신이 속한 환경이 점점 작아지고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박금리 시인은 이에 대해 시를 통해 호소해본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새로
무술년 이른 봄에 지관질을 했던
저 어디 시골 농협의 점장이라던
버들 류씨네 사돈의 봉분이 보인다
그니네 누이가 여기 시집와 류 씨네
작은 며느리가 되었다드만
몸이 불편한 그녀도 작년 서방을 따라
한 주일 만에 세상을 등졌다
부쳐 먹던 농사뜰 팔아
등지는 사람만큼
남은 이도 무덤 속으로 떠나간다
젊은 애는 저잣거리 후미진 곳에
늙다리 학생 부군은 제 땅 파던
고을 한 터럭에 고된 몸을 누인다
이대로 다들 가면 농사는 누가 짓누
눈에 익던 나무도 알고 지낸 사람도
점차 세월 속에 바래져 가고
생뚱맞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사람들의 마지막 누운 자리를
덩치 큰 모습으로 가리고 섰다
―「메테세쿼이아 무상」 전문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가수 한상진이 불렀지마는
여기 산골에 온 지 이십 년이 되어도
고향 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천구백년대와 이천년대 초반의
시대적 차이 탓이다
보리쌀을 꾸어 먹고 살아도
소 눈알같이 순박했던 그때와
산업화 덕분에 뭉개진
그래서 눈치로만 버텨온 이천년대 산골이
아직도 공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이 산골에 남아 있거나
다시 찾아드는 이들이 남아 있음에
무슨 이유를 찾아야 할까
최근 들어 누가 귀농을 하나
귀촌이란 이름이 적당할 따름인데
여기서 밥 먹고 살 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식견을 배운 사람들이
농사만 짓던 사람들과
생각이 맞는 것도 아니고
상투적인 말처럼 공기가 좋아서인가
설마 그 이유 하나로 귀촌을 하나
지난 이십 년 허드렛일을 겪어가며
귀촌 이십 년 차에 곰곰이 생각하니
여기서 살고 있는 까닭은
단조롭게도 유독 공기가 좋아서였다
―「귀촌 이십 년」 전문
시인이 바라보는 농사는 무엇이 남는다거나 추수의 끝이 없다. 추수가 지나 봄이 오면 농부가 새로 곡식을 심듯 시인은 하루하루 시를 통해 삶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따뜻함에 대한 실천으로서 시의 추수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박금리 시인의 시는 일상의 노동으로 빛나며, 땀 흘린 뒤의 막걸리처럼 흥건하고, 일 년 내내 농부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조선낫처럼 단호하다. 순결한 농부와 순한 아버지와 따순 오빠의 숨결이 흐른다. 세상에 지친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고 싶은 고향 같은 시가 있다면, 바로 박금리 시인의 시이다.
---------------------------------------------------------------------------------
■ 차례
차례—
시인의 말·05
제1부
추수·13
냉이·14
양치·16
해장·18
농사 계획·20
마흔 여자·23
메타세쿼이아 무상·24
다방 애·26
불놀이·27
늙음에 대해·28
배미길·30
회갑·32
낙엽·33
사랑의 종착역·34
길동무·36
제2부
낫날·39
나락·40
가지치기·41
철부지·42
쟁기질·44
욕지거리·46
시인예찬·48
작은 별·50
여름 후(後)·51
산보·52
수리부엉이·54
바람과 숲·55
천렵·56
회귀·58
가난한 자의 무디 블루스·60
제3부
향연·65
진화·66
길·67
옛날 문예지 『유심』을 읽으며·68
시어(詩語)·72
담배·73
면도·74
주연(酒宴)·76
박철 형(兄)·77
지구 여행·78
카바레·79
탓·80
종이·82
이 거리·83
바람·84
제4부
기생충·87
신경통·88
해후·89
고무래·90
탈곡·92
귀촌 이십 년·94
깎기집·96
변방·99
뫼비우스의 띠·100
고추 농사·102
버들강아지·105
용돈·106
제비·108
백숙 유감·110
비 온 끝 아침·113
시인의 산문·115
■ 시집 속의 시 한 편
해장
외로움의 끝에 서면
만사가 그립고 사랑스런 게다
사람으로 쳐보면
주사가 넘쳐 꺼려왔던
안마느실 김 서방이 그립고
거름 냄새 역겨워 반기지 않던
샛골 송 서방도 간절히 보고픈 게다
그도 저도 없으면 사람뿐이랴
킹킹 거리는 마당 개도 오랜 벗처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만 같고
거기 어디 외로움뿐인가
지닌 거조차 없어 보아라
별 같지 않던 동전 몇 닢
장롱 바닥에 자빠져 있어
춘향전 이 도령 걸식 환향에
이게 웬 횡재냐 싶고
허기짐의 끝에 있어 보면
군동내 찌르는 묵은김치도
비곗살 두어 점에 마냥 설렐 일이다
무어든 막판에 있어 보면
줄줄이 그리움이며
마냥 사랑이 넘쳐나는 것이니
절망과 허망의 끝에 서 있다 함은
절대 무섭지 않은
출발의 사이렌이며
저릿한 술 속에 퍼부어대는
솔깃한 새벽 해장술이다
―「해장」 전문
■ 시인의 말
달포 만에 시집 한 권을 보태었다
밤잠을 설치던 시간들을 잠시 놓아주련다
얇은 시집에 엮여
어느 구석진 자리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 만나거든
부디 서러움 달래주고
그들의 잠자리도 설쳐 보아라
나는 잠시 탈고주나 마시며
생의 한 자락을 취해 보련다
2021년 여름
박금리
■ 표4(약평)
박금리 시인은 옹골지다. 그의 시에서는 옹차고 골차게 세계의 중심으로 모이는 쫀득한 힘이 느껴진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폭포를 받아내는 소(沼)처럼, 그는 자연과 우주와 노동과 사람을 쥐고, 뭉치고, 눌러, 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쑥개떡처럼 찰지고 흙벽처럼 단단하다. 그는 버릴 것과 움켜쥘 것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는 허사(虛士)의 거드름을 단칼에 베고, 정인(情人)의 허물을 따지지 않는다. 박금리 시인은 몸의 시인이다. 그는 몸으로 만나고, 몸으로 밀며, 몸으로 교차한다. 그의 시들은 그의 몸이 지나간 흔적이다. 그의 시에는 거품이 없고, 몸과 노동과 시간이 만든 주름들로 가득하다. 시인의 땀과 풀잎의 이슬, 시인의 입김과 숲의 바람은 얽히고설켜 분리 불가능한 가계(家系)를 이룬다. 그는 헛것에 분노하며, 인정(人情)에 몸을 던진다. 그의 시는 노동으로 빛나며, 막걸리처럼 흥건하고, 조선낫처럼 단호하다. 그의 시에는 순결한 농부와 순한 아버지와 따순 오빠의 숨결이 흐른다. 세상에 지친 것들이 마지막으로 찾고 싶은 고향 같은 시가 있다면, 그게 바로 박금리의 시이다.
_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비와 바람, 햇살이 머무는 곳에 땀과 눈물이 보태어지면 추수로써 마무리되는 풍곡의 계절이 다가온다. 거둠의 주체인 사람 역시 저물다 보면 추수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낟알이 맺힌 이삭을 헤아리며 삶을 갈무리하는 박금리 시인은 어두운 뜨락에 던져진 부고장을 마주하며 슬픈 추수에 몸부림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와 노동은 따뜻하고 굳세어 보인다. 그는 농부의 탄생과 그들 손에 길러지는 낟알들을 우주와 별의 생성과 영속성에 비유한다. 박금리 시인은 점이며 주변과 더불어 점조직이다. 그의 추수는 수많은 농부들과 연계되며 대연하면 우주의 추수로 이어진다. 그에게 슬픈 추수는 새로운 탄생과 영속을 알리는 팡파르 같은 서곡이다._여태천(시인ㆍ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박금리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 부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술꾼』이 있다.
첫댓글 박금리 시인의 신작시집 『슬픈 추수의 밤이 놓여 있었다』가 출간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과 사랑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