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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세 가지 관문
수행을 하려면 수행의 절차를 어느 정도는 숙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라 하여 여덟 단계를 말하고 있고, 요가에서는 여덟 단계의 팔 지칙이라 하여 수행의 과정을 여덟 단계를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이 길을 통하여야 정상에 간다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에 있는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 같은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볼 수 있고 결국엔 마지막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집중 명상 삼매라는 과정인데 이 세 문을 통과 할 수 있어야 해탈 열반이라는 마지막 정상에 이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밑에 있는 단계들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약간씩 다를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엔 끝에 이를수록 같은 방향으로 다가서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중에서 집중과 명상과 삼매는 마지막 관문이므로 이 세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이를 바르게 이해할 때 아래의 단계들도 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 길로 행하든 단계를 밟아가는 수행의 노선에서는 그 단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그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으나 이는 사실의 차이가 아니라 이해와 설명에서 차이가 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그 단계를 아래에서부터 상위차원의 단계로 이해를 하든, 하위 차원에서부터 상위차원으로 이해를 하든, 이해를 아여야 하는데 그리 하여야만 그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서 올라가든 아니면 한걸음에 정상으로 도약하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위한 목적과 그에 맞는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래 글에서는 제 1부와 제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요가의 개요를 설명하고 제 2부에서는 신지학의 멘탈체 명상을 통하여 어떻게 집중과 명상과 삼매를 성공시킬 것인가를 설명할 것이다.
제 1부 요가 사상
1. 요가의 기원과 발달
☞ 어원과 기원
요가라는 말은 [리그-베다]에서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요가라는 말은 아직 일정한 체계를 갖춘 수행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요가의 어원인 동사 yuj에는 ‘말(馬)에 멍에를 씌우다’ 또는 ‘말을 마차에 연결하다’의 뜻이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서 수행법으로서의 요가라는 명칭이 되었는가도 확실하지 않다. -중략-
따라서 요가란 ‘말을 통제한다.’는 의미로부터 ‘정신을 통제한다.’는 의미로 또 육체와 정신 또는 신과 인간이 합일한다는 의미로 전의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요가는 결합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응(相應)으로 번역되며, 일반적으로는 명상을 의미한다. - 중략-
☞ 상캬철학의 영향
요가의 사상과 발전은 상캬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둘은 상호 보완하면서 발전하였고, 그중에서 상캬의 형이상학은 요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상캬철학 이해가 없이는 요가사상을 이해하기 곤란하다.
상캬철학의 체계는 [우파니샤드] 철인인 웃달라카의 실재론을 비판적으로 개혁하여, 다수의 푸르샤와 프라그리티를 상징한 이원론이다.
푸루샤란 순수정신(또는 순수의식)으로서 그 본질은 지(知)와 사유이다. 이는 프라그리티를 관조하지만 자신은 활동하지 않고 초월적인 실제이다. 이에 반해 프라그리티는 근본원질로 활동성을 가지며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라는 삼속성을 내재인으로 한다.
세계의 전개는 푸루샤가 프라그리티를 관조할 때, 삼속성중 라자스가 활동을 일으켜 프라그리티의 균형이 깨지면서 시작된다. 이는 현상의 모든 결과가 프라그리티에 내재한다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취하는 상캬의 전개설이다.
프라그리티로부터 최초로 전개되는 것은 근원적 사유기능인 붓디이다. 이것으로부터 아함카라라는 자아의식을 특질로 하는 개체원리가 전개된다.
이때 사트바가 지배적이면 의(意)와 다섯 가지 지각기관인 눈. 귀. 코. 혀. 피부와 다섯 운동기관인 입. 손. 발. 배설기관. 생식기관이 전개되고, 타마스가 지배적이면 색. 소리. 향기. 맛. 감촉의 오유(五唯)와 이것의 배합에 의하여 흙. 물. 바람. 공기. 오대(五大)가 산출된다. 이와 같이 삼속성의 구성비율에 따라 인간과 세계의 다양성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적 원리와 우주의 창조원리가 융합된 상캬의 전개설이다. 또한 이러한 세계 속에서 윤회하는 고통의 원인은 푸루샤와 프라그리티 또는 푸루샤와 붓디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 때문이다. 붓디에서 이 둘을 구별하는 분별지(分別智)가 생기면 진아는 본래의 모습대로 순수 청정한 독존의 상태가 된다. 그런 까닭에 해탈의 직접적인 원인을 지혜로 본다. - 중략 -
2. 요가-수트라의 사상과 사상(고전요가)
☞ 심론
1) 마음
“요가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1-2>라고 정의하고 있듯이, 요가는 마음과 그 작용, 그리고 이것을 없애는 수행방법이 중요시되고 있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 Citta은 [요가-수트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요가사상과 관계가 깊은 [상캬-카리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그밖의 육파철학의 기본경전에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Citta는 [리그-베다]에서부터 나타나며, [마하바라타] 이후에는 흔하게 사용되었고, 불교경전에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음이 요가 특유의 술어이며, 요가사상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트라 자체어서나 주석서에서는 그 정의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수트라에서 사용된 예를 통하여 그 의미를 짐작해 보면, 마음은 인간존재의 근저에 있는 그 무엇이다. 상캬철학에서 푸루샤와 프라그리티 사이에서 전변한 붓디와 아함카라와 마나스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음은 심리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는 한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영구불변하는 실체는 아니다. 마음은 프라그리티가 어느 하나의 푸루샤와 관계를 가지는 것에 의하여 설립하는 것이며, 개인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지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해탈할 경우에는 마음이 프라그리티에 몰입하여 끝나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정신인 푸루샤 이외의 모든 존재는 프라크리티의 전개물이므로 삼속성을 내재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은 프라크리티의 전개에 의한 것이므로 삼속성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유지된다. 이 중에서 마음은 사트바 속성이 가장 우세하나, 정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은 아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유동하는 동적인 존재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한 개인이 존재하기 위한 실체라고 할 수 있으나, 영원한 것도,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생에 살아있는 인간은 이러한 마음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요가 특유의 술어이며, 요가는 이 마음을 조작하므로 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요가는 요가 특유의 심리학과 심리적인 훈련법이 발달했다.
2) 마음의 작용
마음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변화 즉 전개는 창조가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세계의 근원이 되는 프라크리티가 삼속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삼속성 상호의 다이나믹한 관계로 인하여 다양한 현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캬-요가가 인중유과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無에서 有가 생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개란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옮아가는 것이고, 잠재성이 현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실체인 마음으로부터 다양한 심리현상이 나타나는 전개의 이론도 이와 같다. 이처럼 마음에도 잠재적 원인이 있는데 이것이 잠재력이다. 마음은 이러한 무수한 잠재력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적인 의미만은 아니고, 마음의 전개에 있어서 내재인으로서도 활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은 마음의 전개에 주인이 아니고 조인이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이렇게 마음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 작용이다. 여기서 전개와 작용을 동일하게 보기도 하나, 작용은 마음에 잠재해 있던 것이 기회인을 얻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잠재력을 마음의 法으로 규정하고, 작용은 잠재력의 法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작용은 마음으로부터 보면 법의 법이다. 이와 같이 작용이란 마음이 잠재적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3) 인식 작용
마음작용에는 5종류의 인식활동이 있는데, 그것은 정지, 도착, 분별, 수면, 기억이다.
‘정지(正知)’는 밖으로부터 바른 믿음에 의거한 지식을 얻는 작용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지각, 추리 성현의 가르침으로 푸루샤를 해탈로 이끄는 비 번뇌적인 작용이다.
‘도착(倒錯)’은 대상의 참다운 모습이 아닌 그릇된 지식이다. 인도의 인식론은 진리의 표준을 대상과의 일치에 두고 있는데 도착은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마음작용이다.
‘분별(分別)’은 언어의 개념에 따라 이루어진 지식에 의한 것이므로, 객관적인 대상이 없는 것이다. 사고 작용에 가까운 단순한 관념적인 지식으로서 올바른 판단도, 옳지 않는 판단도 아니다.
‘수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식작용이다. 이것은 마음작용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대상만이 없는 상태로 무의식의 의식이다.
‘기억’은 과거에 경험하여 알고 있는 대상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경험한 힘이 마음에 잠재해 있다가, 특정한 장소나 자극에 의하여 의식의 표면에 재생되는 것이다.
이상의 5종류의 마음작용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성과 관계가 있다. 즉 지적작용의 명석도의 차이 또는 인식능력의 차이로 구분된다.
4) 번뇌
이러한 지적인 마음작용에 의하여 대상이 인식되면, 인간은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은 기쁨이 되기도 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정지는 기쁨이 되고 그 밖의 넷은 고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번뇌성과 비번뇌성으로 구분한다.
번뇌성이란 도착. 분별. 수면. 기억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 생긴 감정으로, 번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번뇌를 원인으로 하는 것, 번뇌의 원인이 되는 것, 번뇌에 포함되는 것, 번뇌에 묶여 있는 것, 번뇌에 물들어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즉 번뇌성의 마음작용은 인간을 윤회의 세계로 이끌며, 마음에 잠재력을 남긴다. 결국 번뇌성의 마음작용이란 번뇌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번뇌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무명. 아상. 탐욕. 증오. 생명애착이 그것이다.
‘무명(無明)’은 덧없고, 끼끗하지 않고, 괴롭고, 자기의 주체가 아닌 것을 항상 그것이 있고, 깨끗하고, 즐겁고,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무명은 다른 번뇌가 잠자고 있던지, 미약하게 되던지, 중단되던지 항상 다른 번뇌의 밭으로 존재한다. 밭이란 발생의 지반으로 번뇌를 일으키므로 윤회는 계속된다. 따라서 무명을 제거하면 다른 모든 번뇌도 제거되고 해탈하게 된다.
‘아상(我想)’이란 푸루샤의 보는 능력과 마음이 보는 능력을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는 무명에 기인한 것으로 마음의 작용과 푸루샤의 관조능력을 혼동하는 것이다.
‘탐욕’은 쾌락을 따라 일어나는 마음이다. 즉 쾌락을 경험한 사람이 그 경험을 기억하고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하여 애착하고 동경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증오’는 고(苦)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이다. 이는 탐욕의 반대 개념으로 과거에 경험했던 여러 종류의 불쾌 즉 고에 대하여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생명애착’은 그것 스스로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현명한 사람에게도 있다. 사람에게는 윤회전생을 통하여 되풀이되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한 잠재력이 있는데, 이 잠재력에 의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게 된다. 이것은 작은 벌레에서부터 현명한 사람까지도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집착이다.
이상 다섯 가지의 마음작용은 고통의 주요원인이 되는 것으로 주로 인간의 정의적인 심리현상이다.
5) 잠재력
이상과 같은 인식작용과 번뇌는 지정의(知情意)를 말하는 표층심리와도 같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인간내부에 잠재해 있는 잠재의식도 또한 중요시한다. 더구나 요가는 인간의 심리현상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다.
마음에는 그것이 작용으로 전개할 때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내적인 원인이 있고, 작용이 행해지고 난 후에 어떤 영향력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잠재력이다. 즉 잠재력이란 마음이라는 토양에 잠자고 있는 종자이다. 이 종자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때가 되면 마음의 힘을 빌려 숨어있던 상태에서 나타나는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종자 즉 잠재력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쌓여 왔고, 또한 그 수도 무수히 많다. 이것은 마음에 기억의 형태로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작용의 원인이 되고, 마음작용은 다시 마음에 잠재력을 남긴다. 이로 인하여 윤회는 무한히 계속된다. 이 중에서 고통과 관련이 있는 잠재력이 습기와 업이다.
‘습기(習氣)’란 과거에 경험한 인상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는 원인은 생에 대한 애착 때문이며, 이 애착의 원인은 무명이다. 그러나 윤회하면서 쌓여진 습기는 업보에 적합한 것만 나타난다. 또한 습기는 그것이 성립한 때와 장소 사이에 간격이 있으나 연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다시 나타난 기억과 잠재력 사이에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습기란 무명을 근본으로 하는 애착 등의 번뇌를 원인으로 하여 과거에 경험한 것이 마음에 머물러 있다가 기억으로 현실화한 것이다. 그래서 습기는 이러한 원인, 결과, 의지처, 대상이 없어지면 저절로 없어진다.
‘업(業)’은 정확히 말하면 업유존(業遺存)으로, 업의 결과로 생긴 잠재력이다. 즉 업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잠재력을 마음에 남기는 것이 업유존이다. 이 업유존은 번뇌를 근원으로 하여 현세 또는 내세에 나타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습기가 심리적 경험으로 나타나는 반면 업유존은 객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객관적으로 나타난 업유존이라는 잠재력이 바로 업보(業報)이다. 이 업보는 그 원인이 되는 업이 선인가 악인가에 따라서 기쁨을 가져오기도 하고 , 괴로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 업보는 지옥이나 천계에 태어나는 것, 수명의 길고 짧음, 행이나 불행을 경험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업유존은 바로 전생에서 형성된 것이고, 현생에 다 소멸해 버리는데 반해, 습기는 수많은 전생에 걸쳐 윤회하며 형성되고, 또 현생에 다 소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습기와 업은 모두 마음작용의 내재인으로 윤회하는 것이며, 고통의 세계로만 전개한다. 그러나 해탈의 가능성 역시 마음속에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푸루샤가 현실을 경험하여, 그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프라크리티로부터 전개된 마음이란 푸루샤가 이 세계를 경험하는 곳과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목적달성을 위한 마음은, 삼속성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활동상태와 지멸상태로 구분된다. 마음의 활동상태에서 푸루샤가 경험하는 것은 고통의 세계이고, 지멸상태에서는 해탈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마음의 활동상태에서는 작용을 일으키는 내재적 원인의 습기와 업이라는 잠재력이다. 반면에 지멸상태에서는 오히려 작용을 억제하는 잠재력이 있다. 이것이 ‘지멸잠재력’이다. 그래서 잠재력은 활동잠재력과 지멸잠재력으로 구분된다. 활동잠재력을 원인으로 하는 마음작용은 번뇌적인 작용으로, 윤회와 고통을 주고, 또한 그 결과를 습기와 업이란 형태로 마음에 남긴다. 이와 반대로 지멸잠재력을 원인으로 하는 마음작용은 비번뇌적인 작용으로, 푸루샤와 프라크리티가 다름을 아는 지혜가 생기고 삼속성의 활동을 억제한다. 이러한 지멸잠재력도 마음작용의 범주에 속하므로 당연히 잠재력을 마음에 남길 것이나. 이 지멸잠재력은 자기의 작용을 발현하여 다른 잠재력을 방해하는 작용만 한다. 이 잠재력은 요가에 의하여 발현되는데, 요가수행자의 업은 희지도 검지도 않기 때문에 잠재력을 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멸잠재력은 요가수행에 의하여 획득된다. 즉 수행에 의하여 도달된 삼매의 경지에서 지멸잠재력은 활동한다. 그래서 무사등지(無伺等至)에 의해 생긴 잠재력은 다른 잠재력을 억제하는 성질이 있다. 이때 지멸전개가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전개란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있지만, 삼매에서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없어지는 것도 전개를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의 고요함이 계속되는 것은 지멸잠재력에 의한 것으로, 고요하게 보일 뿐 찰라마다 마음에는 지멸전개가 계속되는 것이다.
6) 수행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음에 잠재해 있는 지멸잠재력을 발현하고 증진하는 것이 요가의 수행이다. 수행을 함으로서 마음작용을 억제하여 요가의 목적인 해탈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가의 실제적인 의미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은 요가학파뿐만 아니라 인도의 모든 종파나 학파가 거의 모두 수용하고 있다.
수행법은 주로 수트라 제 2장에 설해져 있으나 수트라 전장에서 나타나며 중복도 많다. 이것은 크게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과 그 밖의 많은 대상에 대하여 욕망을 억제하는 수행 즉, 실수(實修)와 이욕(離欲)으로 구분된다. 그밖에 자재신에 대한 기원, 그리야-요가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실수와 이욕이 수행의 방법을 대별한 것이라면 8지칙은 수행의 방법뿐만 아니라 수행의 단계까지도 구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가 8지칙은 금계. 권계. 좌법. 조식. 제감. 응념. 정려. 삼매로 이것을 수행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면,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분별하는 식별지에 이르는 바른지혜가 생긴다.
제1칙 ‘금계(禁戒)’는 살생하지 말 것, 정직할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금욕할 것, 탐내지 말 것 등이다.
제2칙 ‘권계(勸戒)’는 청정. 만족. 고행. 독송. 자재신에 대한 기원이다. 금계가 대인관계에 대한 규범이라면, 권계는 자기 자신이 지켜야할 규범이다.
제3칙 ‘좌법(坐法)’은 안정과 쾌적함을 위해서 한다. 이것은 전신의 긴장을 풀고 무한성과 합일을 함으로서 얻어진다.
제4칙 ‘조식(調息)’은 좌법이 이루어진 다음 호흡을 멈추는 것이다. 조식은 외부적인 것, 내부적인 것, 그리고 정지로 되어 있다. 이들은 장소와 시간과 수(數)에 의하여 조절되어서 길고 미세하다.
제5칙 ‘제감(制感)’은 여러 감각기관이 각자의 대상과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마음 본래의 상태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5단의 계를 외지칙이라 한다.
제6칙 ‘응념(凝念)’은 마음을 어느 한 장소에 집중하는 것이다. 응념은 마음작용을 배꼽. 심장. 미간. 혀끝. 코끝 그 외의 몸의 한 부분이나 외계의 사물에 집중하는 것이다.
제7칙 ‘정려(靜慮)’는 일정한 장소에 의식작용이 한결같이 집중된 상태이다. 즉 응념의 대상과 결합된 마음작용이 한점에 집중하여, 한결같은 의식의 흐름으로 다른 마음작용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제8칙 ‘삼매(三昧)’는 정려가 한결같은 상태에서 그 대상만이 빛나고, 자기 자신은 없어진 것같이 되었을 때이다. 즉 주관의 존재는 잊혀지고 오직 객관만이 의식을 차지한 상태이다.
응념과 정려와 삼매는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행해지므로 이 셋을 총제(總制)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에 의하여 참된 지혜가 나타나고, 그 실천은 단계를 따라서 행해진다. 이것들은 앞의 외지칙에 대하여 내지칙이라고 한다.
7) 삼매론
요가 8지칙에서 보았듯이 삼매는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삼매가 요가의 목적지는 아니다. 이것은 지멸잠재력이 다른 번뇌성의 잠재력이 활동하는 것을 억제한 결과로 나타난 편안한 심리상태일 뿐이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객관세계에 의하여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매전개는 마음의 산란상태에서 나타난 어떠한 객체에도 끌리지 않게 되고 마음의 전념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삼매의 전개는 마음작용이 멈춰져 가는 것으로, 이때의 마음상태는 수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가는 삼매를 통하여 요가의 목적인 해탈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의식구조를 가진 삼매에도 차별이 있다. 수트라에서는 크게는 두 그룹으로 나누고 적게는 여덟 가지로 나눈다.
1. 유종자 삼매-(1):유상삼매= ㄱ. 심삼매-유심등지
ㄴ. 사삼매-무심, 유사등지
ㄷ. 환희삼매- 무사등지
ㄹ. 아상삼매
(2): 무상삼매
2. 무종자 삼매- 법운삼매
이렇게 삼매의 경지에 차별이 있는 것은 마음작용의 대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투명한 보석이 그 곁에 있는 꽃의 빛깔에 의해 물들 듯이 인식의 주체, 인식의 기관, 인식의 대상 중 그 어느 것에 머물러 거기에 물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이 객관적인 사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은 자석과 같이 마음을 쇠 조각처럼 끌어당기고 영향을 준다. 따라서 마음은 그 대상이 적어질수록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때 마음의 대상과 마음작용의 상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삼매(尋三昧)’는 유심등지로 오대나 십근(十根)과 같이 거친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언어와 대상과 관념을 분별하여 혼동된 것이다. 이 분별지는 마음작용의 하나이므로 여기에는 사유작용이 남아 있다.
‘사삼매(伺三昧)’는 유사등지이고 무사등지의 오유(五唯)나 심리기관과 같은 미세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때는 기억이 정화되어 없어지고 자기 자신은 허공과 같고 대상만이 빛나는 상태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분별심도 사라져 오직 하나의 대상만이 존재한다.
‘환희삼매(歡熹三昧)’는 무사등지로 특수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마음이 평정하고 맑으며, 진리를 보유하는 지혜가 생긴다. 이것에 의해 생긴 잠재력은 다른 잠재력이 나타나는 것을 억제하는 성질이 있다.
‘아상삼매(我想三昧)’는 자아에 있는 순수한 존재개념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아상 역시 하나의 번뇌로 푸루샤의 관조능력과 마음작용을 혼동하는 착각이 있다.
이상의 네 가지가 유상삼매에 속한다.
‘무상삼매(無想三昧)’는 마음작용을 멈추게 하는 상념을 수행한 결과로 나타난다. 이때는 모든 마음작용이 멈추고 잠재력만이 마음에 남아 있다. 이것은 또한 최고의 이욕에 의하여 얻어진다. 왜냐하면 마음에 대상이 있을 때는 무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유상 삼매와 무상삼매는 ‘유종자 삼매’로서 이들은 마음작용은 멈추었으나 마음에 작용할 종자 즉 잠재력이 남아 있는 삼매이다.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는 일체가 지멸된 상태이다. 일체란 모든 마음작용은 물론이고, 다른 잠재력을 억제하는 지멸잠재력까지도 없어진 상태이다. 이때 마음은 전개가 끝이나서 자기의 근원인 프라그리티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 무종자 삼매가 해탈과 직결되는 것이다.
8) 초자연력
이와 같이 요가의 수행에 의하여 도달된 삼매는 마음작용이 멈춰져가는 단계였다. 이 과정 속에서 이와는 별도로 수행 중에 얻어지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자재(自在)’로 삼매 중에 나타나는 요가의 초 자연력이다.
모든 수행은 그 어떠한 결과를 갖는다. 이러한 결과가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요가의 초 자연력은 기적과는 다르다. 기적이 신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자재는 자신의 수행으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것을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잠재력이 숨어 있는 곳이 마음이므로 요가의 초 자연력은 마음의 작용이다.
초 자연력이 마음작용인데도 그 현상에는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현상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마음은 근본원질인 프라그리티로부터 전변한 것이므로, 마음에는 정신은 물론 물질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중략-
이러한 초 자연력은 30여종이 된다. 요가가 신비사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요가에서는 이것을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모든 초 자연력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자연력 중에는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상캬-요가의 입장으로 말하면, 해탈을 실현하는 근본조건은 푸루샤와 프라그리티의 절대적인 이원성을 체득하는 분별지이다. 즉 고(苦)는 푸루샤와 프라그리티의 결합이고, 그 원인은 무명이다. 여기서 무명을 제거하는 것은 푸루샤와 프라그리티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분별지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최고의 단계에 있는 분별지가 나타날 때까지 예비단계로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지혜가 나타난다. 이것은 진리만을 보유하는 지혜, 세계의 모든 사상을 아는 지혜,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모든 방법을 대상으로 하여 한꺼번에 하는 지혜, 모든 존재의 본질과 그 존재의 배열을 아는 지혜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분별지가 전개되어 법운삼매가 나타난다. 그러면 번뇌와 업은 사라지고, 지혜가 최고에 이르러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어지고, 전변이 끝이 나며, 해탈 즉 독존이 실현된다.
이와 같이 마음작용의 하나인 초자연력 중에는 요가의 목적인 해탈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는 반면, 요가의 목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 지혜 중에서 최고의 단계인 분별지는 초자연력 중에서도 최고의 초 자연력이며, 해탈과 직결되는 것이다.
9) 해탈
이상과 같이 마음작용을 멈추게 하고자 지멸잠재력을 발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또한 마음작용이 완전히 멈추게 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지멸잠재력을 발현하는 요가의 수행목적은 마음작용을 지멸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작용이 지멸될 때가 ‘해탈’이 된다. 요가도 타학파나 종교와 같이 이 현실세계를 고로 보고 있다. 또한 고통을 종식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가도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요가는 고의 근본원인을 프라그리티와 푸루샤의 결합 때문이고, 이 결합의 원인은 무명이라고 본다. 여기서부터 마음이 전개되고, 마음작용에 의해서 애착이 생기고, 애착에 의하여 업 등의 잠재력을 마음에 남긴다. 그 결과 윤회전생이 계속되는 고통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철한 사람은 현재의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안다. 왜냐하면 현상의 전변과 현실의 괴로움과 그의 잠재력 등이 모두 괴로움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 요가수행이다. 수행에 의하여 마음작용을 억제하므로 프라그르티가 더 이상 전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마음작용이 억제될 때 얻어지는 분별지로 푸루샤의 순수 청정함을 보는 것이다. 이때 푸루샤는 프라그리티와 결합하지 않은 독존의 상태가 된다. 독존은 요가의 완성이고 최고의 목표이다. 이것은 해탈과 같은 경지이나 푸루샤가 신과 합일한다든가, 자아의 완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푸루샤의 순수 청정한 정신성이 프라그리티의 물질성과 결합하지 않은 상태, 즉 푸루샤 홀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독존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작용을 멈추게 하는 요가의 수행에 의하여 도달되는 삼매에 의한 것이다. 즉 삼매의 최고 경지인 무종자 삼매에서 일체가 지멸될 때, 프라그리티의 전변은 끝이 난다. 이것은 프라그리티의 독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삼매의 세계에서 나타난 분별지로 푸루샤의 순수 청정함을 보고, 프라그리티와 다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푸루샤의 독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존은 푸루샤를 위한 목적이 없어진 삼속성이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또는 푸루샤가 자기 본래의 성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속성이 자기의 근원인 프라그리티로 돌아가는 것이 프라그리티의 독존이라면, 푸루샤가 그의 본성에 머무르는 것이 푸루샤의 독존이다.
이 두가지의 독존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즉 프라그리티가 독존하면 푸루샤도 독존하고, 이와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모든 고는 사라지고 윤회도 끝이 난다.
- 이하 중략 -
(이상의 요가에 대한 글은 이태령 저 민족사 간 요가의 이론과 실천에서 제 1부를 필요한 부분만 옮겨 적은 것임.)
제 2부 멘탈체 명상 ****************************************
멘탈체Mental Body 명상-
12장 (멘탈체의) 기능
…… (앞부분 생략)
멘탈체의 여러 기능들을 사용하기 위하여, 의식을 멘탈체에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은, 비록 자신이 막연하게 다른 체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차원과 공간과 대상을) 의식할 수도 있지만, 한번에 단지 하나의 체에만 집중될 수 있다. 이리하여, 만일 아스트럴 및 멘탈 시력을 소유한 사람이 그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에서 (외부 대상을) 집중하면, 그는 친구들의 신체들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동시에 그들의 아스트럴체 및 멘탈체도 희미하게나마 볼 것이다. 지극히 짧은 순간에, 그는 의식의 초점을 바꾸어, 아스트럴체를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는 멘탈체 및 아스트럴체를 계속 보겠지만, 아주 자세히는 보지 못한다. 똑 같은 사실이 멘탈 시력과 상위계들의 시력에도 적응된다.
멘탈계에서 본 것을 육체의 두뇌에 가져올 때, 상위계로부터 하위계로의 이중전이(double-transference)라는 어려운 작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멘탈계에서 본 것에 대한 기억은 중간의 아스트럴계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기능들이 육체에 각성되어 있어 사용할 수 있을 때조차도, 물질계의 언어로 자신이 (멘탈체로) 보는 것을 전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멘탈체의 의식을 육체의 두뇌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연결들이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져 있으며, 활발하게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사용함으로써 발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위 발육 부진의 신체 기관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한 연결 고리는 육체 및 에텔체를 아스트럴체와 연결하고, 아스트럴체를 멘탈체와 연결하고 멘탈체를 원인체와 연결한다. 의지의 작용이 그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들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의식을 한쪽 체로부터 다른 체로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한다. 의지의 사용은 연결 고리들을 활성화시키면서 쿤달리니, 즉 뱀의 형상을 한 불을 자유롭게 한다.
육체와 아스트럴체의 연결 고리는 뇌하수체이며, 육체와 멘탈체의 연결 고리는 송과선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뇌하수체를 먼저 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송과선을 먼저 개발하는데, 각자가 자신의 구루, 즉 영적인 스승이 지시하는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
사람이 자신의 여러 체들 사이의 연결부를 개발한 후에 각성된 의식상태로 육체를 떠나는 것을 배웠을 때, 그는 물론 지금까지는 그냥 살아 왔었던 육체적 삶과 수면중의 삶 사이의 (무의식이 차지하는) 공백을 메우게 된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은 멘탈체로부터 오는 진동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두뇌를 훈련함으로써 더욱 촉진된다. 그때에는 뇌가 더욱더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 도구가 되어, 의지로부터 오는 자극들을 받아 활동들을 수행하고 의지가 약간만 작용해도 반응하게 된다.
육체에서 상위 의식의 진동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주로 준비해야 할 준비 사항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정갈한 음식과 순수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위의 여러 체들을 정화시키고, 정과 욕심을 완전히 정복하고, 외부적인 삶의 소란과 우여곡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균형을 이룬 성격과 마음을 함양하고, 고상한 주제들에 관한 고요한 명상 습관을 기르고, 특히 뇌로 하여금 한 가지 일로부터 다른 것으로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게 하여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게 하는 쉽게 흥분하는 성급한 마음을 지양하고, 상위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처럼 그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만족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각성된 의식상태에서 멘탈체의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에, 그는 물론 멘탈계로부터 오는 모든 형태의 인상들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든 활동들은, 그가 바로 그들의 신체 움직임 들을 볼 때처럼, 그에 의해서 감지된다. 멘탈체의 능력들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사람은 하위의 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위 체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 사람은 또한 의식적으로 상념형태(thought form)를 창조하고 통제함으로써 그의 유용한 능력들을 매우 크게 증대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멘탈체로 여행하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는 장소들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상념형태를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념형태들이 작용할 때 그 상념들을 지켜보며 인도하고 그의 의지를 이행하는 대리인들로 되게 하면서, 멀리서부터 그 상념들을 그는 통제하게 된다.
사람이 신비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할 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전 멘탈체는 정화되어 완전히 조화롭게 작용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특히, 그는 강하고 명확한 상념형태들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가 상념 형태들을 생생하게 심상화 할 수 있다면 그에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된다.
그 두 가지 행위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상념의 형성은 멘탈체를 통하여 활동하는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다. 반면에, 심상화는 자신이 만든 상념형태를 투시적으로 보는 능력일 뿐이다. 만일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강하게 생각하면, 그가 그것을 심상화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대상의 영상은 생각하는 것 바로 그 만큼 그의 멘탈체 내에 있게 된다.
또한 신비학도는 고도의 도덕적 순수성과 멘탈적인 균형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없으면 투시는 투시자에게 저주가 되고 축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멘탈체의 의식을 개발하면, 매번 화신하여 사는 전 생애동안에 그의 삶과 기억은 연속적으로 유지된다.
이리하여 사람이 멘탈체의 능력들과 한계들을 경험하면서 멘탈체로 의식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 그는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체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또한 필연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그가 개성적인 "나" 즉 멘탈체의 "나"의 환영적인 성격을 지각하고, 자기 자신을 실제적인 사람 즉 원인체에 살고 있는 개체성individuality 혹은 자아ego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의식을 상위 멘탈계에 있는 자아ego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이 단계에서는, 그는 그의 모든 과거 생애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멘탈계와 아스트럴계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기억을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즐거움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의 멘탈체를 하나의 체로써 사용하는데 자신을 오랫동안 철저하게 훈련해야만 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육체적인 의식에 오기 오래 전에, 자아가 자신의 계에서 충분히 의식적이었으며 활발히 작용하였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보면 알게 된다.)
멘탈체 자체는 피로를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는 피로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피로하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는 수단인 육체의 두뇌가 느끼는 피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육체적인 피로는 멘탈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리하여 완전히 지친 사람은 (육체를 통일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 모든 육체의 세포가 불평을(부조화를 유발) 하고 있으며, 모든 체들-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에게 이러한 영향을 주어, 자그마한 별도의 소용돌이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어 각자가 자신의 진동율로 진동하여, 모든 체들이 가지고 있는 응집력과 제각기 체가 맡은 바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재의 지식수준에는, 일반적인 기억이 작용하는 정확한 방식은-그 주제가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멘탈체의 진동은 기억이 작용하는 방식의 일부이며, 원인체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수 천년 전에는 상위의 체들의 기능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의식의 집행자가 어두운 방에서 "옴Om"이라고 발성하여 자신과, 그의 마음에 가득한 감정들을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브우르Bhur"를 발성할 때, 어두운 방은 (불이 환하게 켜진 것처럼) 빛으로 가득차는 것을 그들은 느끼게 된다.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아스트럴 시력이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열리고, 또 다른 단어를 발성하면 그들의 멘탈 시력이 비슷하게 열렸다. 그러한 효과들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장래에는 똑 같은 결과를 얻는 것이 물론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더 쉽게 될 것이다.
신비학도가 충동impulse과 직관intuition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둘 다가 내부로부터 두뇌에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둘이 정확히 똑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건이 허락되면, 잠시 동안 기다리는 것이 지혜롭다. 왜냐하면 충동은 시간이 지나면 대개 점점 약해지지만 직관은 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충동은 대개 흥분이 따르고, 충동에는 개성적인 것이 있다: 반면에 참된 직관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지만, 조용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을 띠고 있다. 충동은 아스트럴체가 (고양되어 오는 것을) 육체가 느끼는 것이며, 직관은 자아로부터 개성에 새겨진 단편적인 지식이므로 상위 멘탈계나 심지어 때때로는 붓디계(buddhic plane or intuitional plane, 4번째 계)로부터 온다.
충동과 직관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본성이 충분히 균형을 이룰 때까지, 조용히 심사숙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다려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충동은 사라져버리는 반면에, 직관은 점차로 더 명확해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고요함과 차분함은 하위의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더 분명히 직관을 듣고 그 능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직관은 고요하게 기다리면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득을 얻게 된다.
더군다나, 직관은 이기심이 없는 것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만약 상위의 계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에 이기심이 약간이라도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아스트럴적인 충동이지 참된 붓디적인 직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면서 알게 되는) 물질계의 직접적인 시력과 약간 유사한 직관은, 결국에는 물질계의 촉감에 비유될 수 있는 이성을 대신할 것이다. 시력이 촉감의 상태에서 발달하는 것과 똑같이, 연속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관은 발달한다.
그러나 지성이 없는 사람들의 직관은 충동이며, 욕망에서 기인하며, 사유보다 더 못한 것이다.
제 15 장 : 집 중
우리가 상념의 메카니즘(작용)과 힘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음의 통제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사실상, 상념을 통제하는 것은 영혼의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다.
‘침묵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은 실재를 가리는 것이다.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하게 하라(The mind is the slayer of the real; let the disciple slay the slayer)" 물론 이것은 마음이 파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음이 지배되고 정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훈련하여 사용해야 할 것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비학도는 명백히 자기 자신이 품게 되는 상념들과 감정들에 관하여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다. 일반 사람은 아마도 감정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정을 좀처럼 점검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감정이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때 그 감정에 굴복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신비학도는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감정들이 그에게서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그는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멘탈체를 계발하고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 중 하나가 마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비학도는 감정들과 마음을 모두 정복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그리함으로써 잘 훈련된 무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 저리 칼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것처럼, 그는 자기의 마음을 활용하여 이리저리 생각하게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집중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멘탈적인 일에 대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갑자기 왔다갔다하도록 하지 않고, 또한 보잘 것 없는 상념들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면서, 꾸준하게 연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산란한 상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서도, 그들이 마음을 통제하는데 전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상념의 흐름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집중된 상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초기의 오컬트적인 발달 과정이 일반인들에게 아주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집중(력)이 완전히 부족한 것, 다시 말해 마음과 의지의 연약함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좋은 상념들 보다 악한 상념들이 더 많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마음과 의지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노력을 하면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온갖 종류의 유혹을 그는 쉽게 받게 되는 것이다.
형태적 측면에서 말하면 집중하는 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영상으로 멘탈체를 유지하는 것이고, 생명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내부에 그 영상을 재현할 수 있도록 이 형태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인상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하나의 영상에 의해서 형성된 단 하나의 이미지 속에 마음을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의지의 힘인 것이다.
더욱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마음을 하나의 생각에 맞추고 그 생각에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데 있다.
훨씬 더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주목하는(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 그때 그의 마음은 이미 집중 되어 있다.
목센터 혹은 목 챠크람은 고차원적인 청각과 관련 있지만, 또한 주목하는 능력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데, 모든 오컬트 체계에서 그것은 항상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제자들은 수년 동안 "아쿠스티코어Akoustikoi"라 불리는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확고한 철학 원리들로 철저하게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위험한 물위로 배를 띄우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쓰라Mithra신비의 최하위 계층이 "까마귀들Ravens"이라는 계층인데, 까마귀나 앵무새처럼 그들은 자신의 들은 것만을 반복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리메이슨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그 체제 내에 E.A 계층을 인정한다.
말하는 김에, E.A의 S…를 사용하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정묘한(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는 특별한 부류의 비인간적인 지적 존재들을 부르는 E.A의 s….는 정확하고도 적절한 곳에 만들어질 필요성이 있다. 만약 부주의하게 자신이 행하는 것에 신중히 생각도 하지 않고 만들게 되면, 자기가 만든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한 영향들에 자신을 노출시킬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든 형태들의 "마술magic"을 사용할 때, 그는 부주의하게 그의 곁을 지나가게 되는 불쾌한 세력들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비 학도는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당연히 생기는 결과로-예를 들면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처럼-신체의 근육이 긴장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긴장은 신체를 피곤하게 할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비 학도는 명상 중에 또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주기적으로 그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도적으로 긴장을 풀어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완전히 이완을 하면, 전신이 엄청난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입증될 것이다.
(집중력이) 강하고 기질이 강한 사람들은 특별히 이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이 목적과 관련된 수련들을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Annie Payson Call이 지은 '휴식을 통한 힘Power Through Repose'은 확실히 추천할 만한 최고의 책 중 하나이다.
집중은 신체적으로 노력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하나의 상념으로 빠져드는 순간 마음은 그 상념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집중이란 마음을 어떤 상념에 억지로 지속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완벽히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 상념에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신비 학도는, 상념의 자리는 육체의 두뇌에 있지 않고 멘탈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집중은 육체의 두뇌보다는 멘탈체에 관계가 있다.
이리하여 집중이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고, 반대로 활발하면서도 잘 통제된 능동적인 상태라는 것이 명백하다. 멘탈계에서의 집중은, 물질계에서 도약하기 위하여 근육을 움츠리는 것이나 근육을 계속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힘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로 상념을 집중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한번에 5분이나 10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뇌를 혹사시키기 쉽다. 매우 점진적으로 늘여 나가서 시간은 15분, 20분이나 30분으로 연장될 수 있다.
신비 학도는 뇌에서 멍하고 묵직한(괴로운) 느낌이 들 때까지 결코 집중이나 명상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멍함과 고통이란 여러 체들의 질료를 변화시키는 노력이 몸이 견디어내는 것보다 더 급속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위험 신호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보다 상념을 억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감정이 억제되지 않고 날뛰도록 허용하는 것은 꼴사납다고 가르침을 받아온 반면에, 대개 떠오르는 상념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멘탈체에 배인 과거의 습관들과 충돌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스트럴체를 구성하는 하위생명체들의 집단의식이 소위 욕망 엘리멘탈Desire-Elemental(아스트럴체 자체의 저급의식)을 형성하듯이, 그의 멘탈체에는 멘탈 엘리멘탈Mental Elemental이 있다. 이리하여 이 멘탈 엘리멘탈은 모든 것을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왔다갔다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멘탈 엘리멘탈과의 투쟁은 욕망 엘리멘탈과의 투쟁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진화상에 있어서 훨씬 이전에 해당하는 단계이므로 물질적으로 제한을 가하는 것에는 덜 익숙하다. 결과적으로 그-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더욱 활발하다. 다시 말해, 더욱 끊임없이 활동적이지만, 욕망 엘리멘탈보다 그 강도는 덜하고 그 결정적인 역할도 덜하다.
이러므로, 그 멘탈 엘리멘탈을 다루기는 더 쉽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루기에는 덜 익숙하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욕망보다 상념을 통제하는 데 힘이 실제로 훨씬 더 적게 들지만, 그것은 힘을 지속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멘탈계에서 마음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영역이 있어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마음이 멘탈 엘리멘탈을 완벽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단지 연습만 하면 되는 반면에, 우리가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하려고 노력할 때는 우리는 마음을 낯선 세계 속으로 끌고 내려와서 외부로부터 온 성격이 서로 상반하는 외부인alien인, 즉 마음(mind)이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에 말한 몇 가지 사실들은 너무나 중요하므로 요점만 간략히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지만, 우리는 감정 통제에 어느 정도의 연습을 해왔으나, 대개 마음의 통제는 거의 전혀 연습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신적(멘탈적) 수련[훈련]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감정 통제와 마음의 통제, 둘 다는 신체를 완전하게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성취도가 아직까지도 주목할 정도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수많은 생 동안에 어느 정도는 육체의 완전한 정복을 훈련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신비학도에게는 분명히 고무적일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침묵의 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에서 이 지구가 신비가에게 알려져 있는 진짜 유일한 지옥이라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는 당연히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말들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신비학도로 하여금 상념의 힘thought-power으로 가령 격심한 치통을 추방하는 일-이것조차도 어떠한 여건 하에서는 행해질 수 있다.-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라 상념의 힘에 의하여 우울함, 분노, 질투 또는 어떠한 다른 불쾌한 감정을 추방하는 것이 분명히 훨씬 쉽고, 불쾌하거나 이득이 없는 주제에서 유쾌하거나 유용한 다른 주제로 상념을 돌리거나, 심지어 마음으로 하여금 전혀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더욱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두개의 주요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 진다. 첫째는 카마Kama 즉 욕망과 관계가 있고, 둘째는 바로 멘탈 질료의 속성 자체와 관련이 있다.
마음을 통제하는데 있어 그 어려움은 5,000년 전에 아르주나Arujuna와 스리크리슈나Shri Krishna 사이의 불후의 대화에서 그-아르주나-에 의해 잘 표현 되었다.
"오! 마두Madhu를 제거해버리신 이여!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에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 이 요가에 대해서, 차분하지 못함 때문에 저는 그 요가의 기반이 확실히 잡힌 것을 보지 못하고 있나이다. 오! 크리슈나여!, 이는 나의 마음이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충동적이고 강하여 굴복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바람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도 올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성공으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 힘있게 무장한 자여,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abhyasa과 무심함vairagya으로 마음은 제어될 수 있도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장애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을 역순으로 고찰해보자.
무심indifference 이 말은 분명히 카마Kama 혹은 욕망이 마음을 끌어들여 좌우하고 지배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제 6장에서 우리는 카마와 마나스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으며, 욕망이 계속적으로 마음을 자극하여 항상 마음을 쾌락의 노예로서 봉사하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마음은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여금 그 맡은 바 직무로부터 벗어나서 노예 상태로 끌려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정들을 제어하고 정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신비 학도가 사소한 감정들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은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과, 신성의 번쩍이는 섬광인 인간이-아직 광물로도 진화하지 못한-욕망 엘리멘탈의 지배를 받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이 무심을 성취하여 하나의 집중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는 주된 방법이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이것들을 우리는 (a) 철학적 방법과 (b) 헌신적인 방법으로 부를 수 있다.
(a) 철학적인 방법The Philosophical Method
이것은 카마 즉 욕망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속박시켜 버리는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바꾸고 그 태도를 강화시키는데 있다. 이리하여 사람은 외부적으로 오는 것이든 내부로부터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든지 간에 모든 대상들에 무관심하게 된다. 본 저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방법은 서구적인 기질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 같으며, 그 방법이 해결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종종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양적인 기질을-특성을 대체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가진 사람들에게 그것은 별로 큰 어려움을 야기 시키지 않는 것 같다. 그 방법을 명확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것은 물론 이 책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방법적인 체계에 대한 철학적인 원리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rd Gita의 강연 5와 6에 설명되어 있는데, 각각 행위를 포기하는 요가와 자아를 정복하는 요가라 불린다.
이 체계 하에서는, 사람은 "미워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 그는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5감이 감각 대상들 사이에 움직이는 것을 지각 한다….. 그는 애착을 버리며 모든 행위의 근원을 영원 속에 둔다. 그는 마음으로 모든 행위들을 포기한다. …. 그는 학식과 겸손함을 겸비한 브라마나Brahmana, 암소, 코끼리와 심지어 한 마리 개와 들고양이까지도 동등하게 본다. … 그는 즐거운 것을 얻을 때 기뻐하지도 않고 불쾌한 것을 얻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 그는 욕망과 정욕의 힘을 견디어낼 수 있다. …..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즐거워하며… 모든 존재들의 행복welfare에 열중하고… 욕망과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있다."
"그는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신성이 부여하는) 의무적인 행위를 행한다. … (자신에 의해) 형성된 (에고의) 의지는 포기한 채로 명예와 불명예에서 뿐만 아니라 추위와 더위에서 즐거움과 고통 속에서도 한결같이 잘 통제되고 평화롭게 있다. …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 적들, 낯선 사람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외국인들과 친척들 또한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도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대한다. … 그는 희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모든 바람직한 것들을 갈망하는 그 갈망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바람 없이 고요한 곳에 있는 등불과 같다. … 그는 엄청난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다. … 그는 상상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욕망들을 단번에 내버린다. … 마음을 자아(the Self) 속에 거주하게 한 후에 … 조금씩 조금씩 그는 고요함tranquility을 얻는다. … 그는 자아가 모든 존재들 속에 있으며, 모든 존재들이 자아 속에 있는 것을 본다. … 그는 … 완벽하게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우리가 철학적 방법이라 불렀던 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루고 있다. 사실, 그 방법은 특별히 각 개인에 맞게 그리고 기질의 특수성들에 적합하도록 수정될 수 있고 또한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학적인 방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렵고 까다로운 길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다르마dharma는 (자신에게)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보다 덜 과격한 두 번째 방법을 따르게 하라.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하겠다.
(b) 헌신적인 방법The Devotional Method
이 방법에서는 카마Kama 즉, 욕망 또는 애착을 제거하기 보다는 신비학도는 바로 카마의 힘 자체를 사용해서 마음을 안정된 상태에 두게 한다. 이것은 헌신가가 사용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카마(욕망)을 최고의 상태로 순화시켜,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약한 모든 애착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고 그의 주의력이 산만하거나 다른 것들로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
성격상 헌신적인 사람은 마음을 사랑하는 대상이나 이미지에 고정시킴으로써 자기 목적을 성취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이미지를 관조contemplation함에 의해서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즐거움이, 마음을 그 이미지에 계속 고정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음은 계속해서 원래의 그 이미지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헌신적인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집중에 이른다.
헌신가는 자신에게 매력적인 (마음에 끌리는) 요소를 사용하는 반면에, 보다 철학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은 어떤 심오한 개념이나 심지어는 문제까지도 그에게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여긴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지적인 흥미, 즉 지식에 대한 깊은 욕구가 마음을 다른 것보다는 그것에 집중하게 하는 마력적인 힘을 제공하고 마음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고정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유익한 '집중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 집중을 연습하는 것은 마음을 의지의 영향 하에 두게 하거나, 특정한 때의 기분-감정인 무드로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고 작용은 특정한 목적에 극한(집중)될 것이다.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위의 방법은 상당히 수정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수정된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모든 방법 중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행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 방법에서는, 선정된 주제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여 모든 다른 상념들은 마음에서부터 사실상 배제된다. 마음은 다소 몰입된 집중상태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매우 열중해야만 한다.
신비학도는 자유자재로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배워야 하며, 외부 대상들을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과 습관을 배양하면 이것을 성공적으로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여, 다각도로 꼼꼼하고 세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자연계에 있는 어떠한 대상도 실제로는 결코 지루하거나 흥미롭지 않은 것은 없다 만일 어떠한 것이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자연계에 현현한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주의와 인식의 부족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연습을 어느 정도 마스터하는 것이 심상화-어떤 대상이 육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그 대상을 마음으로 재현시키는 능력-를 성공시키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정확한 심상화는 어떤 형태들의 오컬트적인 작업WORK, 예를 들면 의식儀式ritual과 같은 데에 필요한 능력이다.
만일, 어떤 구체적인 대상 대신에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 즉 미덕美德virtue이 선정되면, 그것은 신비학도의 열성과 헌신을 일깨우게 되고, 이 경우에 있어 집중이란, 주로 감정의 집중이며 마음의 집중은 현저히 줄어든다. 상념보다는 감정에서 우리가 한 점으로 집중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상념이 보다 미묘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행할 때뿐만 아니라 집중을 행함에 있어서도, 초심자는 채워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많은 욕망들과 생각지도 않은 문제들이, 항상 초심자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입을 쩍 벌리고서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것들을 공정하게 다루어, 그들에게 특정한 시간을 내주어서, 해결할 때까지 다각도로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계획이다. (마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극복할 수 없는 마음은, 명상은 고사하고 집중에 성공할 수가 없다.
신비학도는 자기의 문제들을 조정하기로 결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결정들을 준수하여, 그 다음에는 똑 같은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행하는 능력은 실천에 의해서 그리고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에 의해서 성장하게 된다.
(2) 끊임없는 연습
이 말은 멘탈 질료와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에 다소 내재하고 있는, '끊임없는 활동성'이라는 속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 그 엘리멘탈 에센스는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듯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상념들'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질료와 마찬가지로 멘탈 질료는 습관의 법칙들을 따르므로,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멘탈 질료를 훈련하여, 마침내 '끊임없는 활동성'을 제어하는 것이 몸에 배여, 참된 인간The real man, 즉 사고자The Thinker에 따르는 '자발적이고 말 잘 듣는' 종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겉도는 마음 -일관성 없는 마음 상태- 을 극복하는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은 물론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의지는 어느 정도 사용되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의지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리고 의지력이 발달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철학이나 헌신이나 그 밖에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한 다른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의지력을 보조하고 보완하기를 더 좋아한다.
물론 자신의 주위에 보호막을 만들어서 외부의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영속적으로 사용 가능한 안으로써 추천할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호막이란 결국에는 단지 (일시적인 용도에 불과한) 목발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보호막이 사용될지라도, 보호막은 '정처 없는' 상념들이 그의 내부로부터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여기저기에 남겨진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니는' 상념들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단지 하위 멘탈 질료만이 그러한 보호막을 만드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상념을 그의 스승에게 쏟아낼 때 이 보호막에 의해서 상념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이 '지부의 지붕을 이는 것Tyling the Lodge'인데, 물론 이것은 공부가 되는 단계에 적합한 계에서 행해진다.
집중력은 평범한 일상생황에서 얻어질 수가 있으며 당연히 일상생활 중에서 얻어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든 지간에,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을 그 자체에 완전히 집중하고, 전심전력으로 행하고 또 가능한 잘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 통의 편지도 잘 그리고 정확하게 써야만 하며, 세세한 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주의하여 편지를 연기시키거나 그 효과들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완전히 주의를 집중하고 저자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노력하면서 읽어야 한다. 어떻게든 마음을 명확하게 훈련하지 않고는 단 하루라도 보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집중력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연습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그 힘이 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엔 그 힘이 위축되어 버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근심이 작용하는 매카니즘과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학생들이 이해해야 한다. Work는 지나치지 않다면, 상념 도구를 해치지 않고 반대로 강화시킨다. 그러나 근심이 작용하는 멘탈적인 과정은 분명히 상념 도구를 해치고 잠시 후에는 극도의 신경 피로와 초조함을 야기 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지속적인 멘탈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근심이란 똑 같은 일련의 상념을 약간만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되풀이 하고, 어떠한 결과도 얻지 못하며, 심지어는 종종 어떤 결과를 목표로도 하지 않는 과정이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멘탈체와 두뇌에 의하여 시작되어 의식에 강요되는 상념 형태들이 계속해서 재현되는 것이다.
사고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불만의 상태에 있다 예상되는 골치 아픈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걱정하며 들뜬 상태에 있게 된다. 사고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이러한 충동impulse하에서는, 이미 형성되었고 또한 거절당했던 영상들을 멘탈체와 두뇌가 계속해서 위로 방출하게(던져 올리게) 된다. 염려하는 상태에서는, 사고자는 그의 여러 체들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다.
근심은 대개 자동현상에 기인하기 때문에, (멘탈) 질료의 바로 그 (자동현상의) 특성은 또한 근심을 극복하는데 활용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근심을 일으키는 채널"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반대되는 성격의 또 다른 채널을 형성하는 것이다. 명상 중에 "자아는 평화이다 그 자아는 나다. 자아는 힘이다 그 자아가 나다."와 같은 그러한 상념에 곰곰이 몰두함으로써, 이것을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곰곰이 명상할 때, 자신이 곰곰이 명상하고 있는 그 평화가 그를 감쌀 것이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상했던 그 힘이 그를 가득 채울 것이다. 명상을 위한 개념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형성하는 것이, 물론 특정 개인에게 적합할 수 있다.
신비학도는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그만두는 법도 배워야 한다. 사고 작용이 끝날 때는, 파도에 밀려 계속해서 바위에 부딪히는 보트와 같이, 상념이 '아무렇게나 계속해서 떠돌게 내버려두어' 마음과 부딪히지 않도록, (사고 작용의 결과 남은) 그 상념은 완전히 (마음에서, 혹은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고 있지 않을 때는 기계를 헛돌게 하여 불필요하게 기계를 마모시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마음이란 기계를 계속 헛돌게 하여 유용한 결과도 얻지 못하고 마멸시켜서는 안 된다. 피곤한 수족들이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 힘이 소생하듯이, 마음도 완전한 휴식 속에서 위안(힘)을 얻을 것이다.
신비학도는 그의 사고 작용을 끝마칠 때, 그 상념을 내버려야 하며, 그리고 내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상념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의 관심을 그것들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저자가 사용을 하여 성공한 한 방법이다.- 관심(주의)을 다른 데로 돌리기 보다는 일어나는 상념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오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무심해라. 어떤 새로운 생명이 그 상념들 속으로 부여되지 않게 되면, 잠시 후에 그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상념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 고요함은 아스트럴체와 멘탈체 둘 다에게 극히 편안함을 주게 된다.
(이 방법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 그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념의 흐름[사고 작용]을 중단시키는 것은 상위의 여러 계들에서 우리가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다. 두뇌가 고요해지는 것을 배울 때, 바로 그 때에서야 의식을 물질적인 옷으로부터 철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신비학도는,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행자가 "사고 원리가 (우리의 의식의 지배 하에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파탄 잘리Patanjali가 말한 금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멘탈체 또는 "사고 원리"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얻어서, 바로 인간의 본질인 사고자the Thinker가 신중히 동의함으로써만 그것이 변화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파탄잘리가 요가를 정의하는데 사용된 용어는 치타-브리타-니로다chitta-vritti-nirodha인데, 이것은 마음의 질료chitta의 소용돌이들vritti을 억제nirodha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도구를 자유자제로 다루듯이, 마음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 단계에 이를 때, 그가 완전히 멘탈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리하여 요가는 멘탈체의 모든 진동들과 변화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스터의 멘탈체에는,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제외하면, (멘탈체)의 색채 변화가 전혀 없다. 그의 멘탈체의 색채는 "잔잔한 호수 물결 위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 달빛이 비치는 흰 부분whiteness안에는, 모든 색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외부 세계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지속적으로 비치고 있는 그 광채 위에 색조의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나게 할 수가 없다. 그의 멘탈체는 자신이 하위 세계와 의사소통할 필요가 있을 대만 사용하는 외부의 껍질에 불과하다.
집중의 결과로, 아는 자the Knower가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영상을 꾸준히 숙고할 때,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말로 설명을 들을 때보다도 그 영상에 대해서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된다.
대상을 말로 설명함으로써 대략적으로 형성된 윤곽은, 그 윤곽 속의 전체적인 상황이 (집중된 마음의) 멘탈체에 의해서 형성됨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그림은 점점 더 세부적으로 충실해진다. 그리고 의식은, 설명된 그 내용들과 더욱더 밀접하게 접촉을 하게 된다.
제 16 장 :명 상 (Meditation)
집중은 물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집중은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하나의 도구로 만든다. (본질인 생명을 가리고 있는) 휘장-형상-을 뚫고 들어가 생명에 이르러 그 (상위의) 생명을 끌어당겨 마음이 속하는 (하위의) 생명과 연합시킬 목적으로, 집중된 마음이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향할 때-그때 명상meditation이 이루어진 상태다. 이리하여 집중은 기관器官을 형성하는 것이며 명상은 그 기관의 작용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집중이란 마음을 - 종잡을 수 없이, 외부의 대상들이나 감각작용이나, 또는 마음 자체의 작용에 의해 생긴 산만한 것들에 전혀 끌려가지 않고 - 단 하나의 점에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고정된 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지속성과 부동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서서히 외부세계와 신체로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어, 감각들이 매우 조용한 상태로 있지만 마음은 강하게 살아있고 마음의 모든 에너지들이 내부로 철수되어,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인 단 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생각에만 그 에너지가 집중되게 된다. 마음이 비교적 쉽게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갈 수가 있으며, 강한 가운데서 조용하게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물질 두뇌에서 작용하는 동안에 도달할 수 있는-최고의 사고 작용thought까지도 마음은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중에 보다 상위의 의식에 올라가 그 의식과 하나가 되어 -관조의 상태- ,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주의(관심)를 기울여서 잠시 동안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명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헌신의 대상이나, 이해를 위해 (지혜 혹은 지성의) 빛을 비출(illumination) 필요가 있는 문제나, 형상이기 보다는 사실상 (본질적인) 생명을 깨닫고 흡수할 수 있는 대상에다 집중된 마음을 주의 깊게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향과 관계 속에서 하나의 주제를 고찰하거나 숙고하는 기술이다.
명상에 대하여 정의를 다르게 내리면, 명상이란 각성된 의식, 즉 정상적인 상태로 작용하는 마음속으로 초의식super-consciousness에 대한 자각(깨달음)을 가져오고자 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신성한 본질 혹은 영적인 본질-참된 인간-의 영향력이 하위 인성에 미칠 수 있는 하나의 채널을 열망함으로써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이상으로 이르는 것이며, (암흑에) 속박된 하위 의식의 문을 열어 이상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명상이란 내적인 인간이 무한에 대해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이다."라고 말했다. 성聖Alphonus de'Liguori는 명상을 "영혼이 신의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축복된 용광로"라고 말했다.
(명상의 주제로) 선정된 이상ideal은 미덕과 같이 추상적일 수도 있고, 사람 속에 내재하는 신성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모습을 한 마스터나 신성한 스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영혼을 신성한 근원으로 고양하는 것 즉, 개개의 자아가 우주적인 자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음식이 물질적 생명에 대한 관계는, 명상이 영적인 생명에 대한 관계와 똑같다. 명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연코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 로즈베리Rosebery 경은 크롬웰Cromwell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실용주의적인 신비가(the practical mystic)"로 묘사하고, 실용주의적인 신비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 라고 선언했다. 집중된 지성, 즉 소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능력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에너지가 엄청나게 집중되는 것과, 보다 꾸준함과 자기 절제와 차분함을 의미한다. 명상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힘을 (분산하여) 허비하지 않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란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힘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불과한데, 사건의 근원인 힘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신성한 생명을 공유하므로, 따라서 신성한 힘도 행사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음이 하나의 이미지에 맞게 형성되어 있고 '아는 자(knower)'가 꾸준히 그것을 응시(관주)한다면, 이를 통하여 어떠한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대상에 대해 훨씬 더 완벽한 지식을 얻게 된다. 집중을 행할 때, 그림(영상)이 멘탈체 안에서 형성되는데, 가령 말로서 설명된 것으로부터 대략적으로 얻은 윤곽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되면 더욱 더 세부적으로 완벽하게 살을 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은 '말로써 설명된' 바로 그 대상들과 더욱 긴밀하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명상을 권장하고, 명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모든 철학의 학파들이 인정해왔다.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정해진 운동을 하는 것처럼, 신비학도는 자신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수련들을 행해야 한다.
물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이, 명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의 명상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좋은 결과들을 주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각 사람은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의 명상을 독자적으로 찾아야 한다.
명상은 많은 목적이 있는데, 주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여, 자기의 상념이 반복되는 보잘것없는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즉 시시한 일들과 골치 아픈 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도록 한다.
(2)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는데 익숙하게 하여, (잠시 후에는) 그것들이 일상생활의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당장 필요로 하는 일상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될 때 마음이 즐겁게 그 배경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3)일종의 아스트럴 및 멘탈적인 체조gymnastics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위의 체들을 건강하게 보전하고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그들을 통하여 계속 흐르도록 한다. 이를 위하여,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인격을 도야하여, 그 안에 다양한 특성들과 미덕들을 함양시키는데 사용 될 수 있다.
(5)보다 고상하고 보다 정묘한 것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의식을 상위계들로 고양 시킨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신의 면전에까지 오를 수 있다.
(6)자연의 신비를 풀고 또한 상위의 계들로부터 축복들을 불러 내린다.
(7)처음에는 비록 서툴지라도, 더욱 깊이 발전하여 더욱 폭넓은 지식을 얻어, 투시 능력을 달성하고 마침내 이 물질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보다 차원 높은 삶에 이르는 길이다.
명상은 상위의 의식을 계발하는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령 로고스나 마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시간이 경과하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의식)을 먼저 아스트럴계로, 그 다음에는 멘탈계로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물론,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전으로 학도가 살아온 과거(생)와 그가 현재 행하는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것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잠시 동안 자기 자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멘탈계에서 강력한 상념형태를 만든다. 이 상념 형태는 즉각적으로 바로 상위의 계에서 맴돌고 있는 힘에 의하여 하나의 채널로 사용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격의 상념 속에서 함께 합쳐질 때, 그들이 만드는 채널은 각 채널의 단순한 합보다 그 수용 능력이 엄청나게 더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면 그로 인해 형성되는 채널이 작용하는 공동체에는 더 없이 귀중한 축복의 근원이 된다.
그들이 지성적인 연구에 몰두할 때, 바로 그들이 정상적으로는 상위 멘탈계에 고유하게 머물고 있을 힘을 하위 멘탈계로 쏟아 붇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의 상념이 보다 고상한 측면에서 윤리와 영혼의 발달을 다룬다면, 그들은-부디계의 힘이 멘탈계로 하강하게 되는-보다 고매한 상념의 채널이 될 수가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위의 계의)힘이 고유한 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 힘의 작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많은 사람에게, 그 힘의 영향이 미치게 할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이, 예를 들면, 신지학회 지부의 실제적이고 가장 큰 기능, 즉 신성한 생명을 분배하기 위한 하나의 채널을 제공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신지학회의 모든 지부는 지혜의 마스터들과 그들의 제자들에게 관심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지학회의 회원들이 연구와 토의 등을 할 때, 그들의 상념들이 마스터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회원들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힘이 그때 (마스터에게서) 쏟아져 들어 올 수 있다.
신지학회의 회원들은, 어떤 사람이 신지학회에 가입할 때 그는 가느다란 '생명의 실'로 마스터들과 연결된다고 마스터가 말씀한 것을 애니 베산트 여사가 언급한 것이 기억날 것이다. 이 실은 마스터와 (진동적으로) 일치하는 자기선이며 신지학도는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과 사심 없는 봉사를 함으로써 그 실을 강화하고 확대시켜 살아있는 광선으로 만들 수도 있다.
훨씬 더 높은 근원으로부터 축복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신성한 생명과 빛은 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체계)에 충만해 있는데, 각 계에서의 힘은 정상적으로는 그 고유한 계에 엄격히 제한되어있다. 그러나 특별한 채널이 마련되면, 그 힘은 하위계에 하강하여 비춰지게 된다.
어떠한 상념이나 감정이라도, 이기적인 측면이 전혀 없을 때마다 그러한 채널은 항상 제공된다. 이기적인 감정은 폐쇄된 곡선으로 움직여서, 그 감정이 속하는 계에 그 반응이 (부메랑처럼 부정적으로) 되돌아온다. 전혀 사심이 없는 감정은 되돌아오지 않는 에너지의 분출이 되지만, 그 상승 운동 중에 바로 인접한 상위계로부터 신성한 능력이 하강하기 위한 통로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응답'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상인 것이다.
투시능력자에게 이 채널은 일종의 거대한 원통형이나 깔때기 모양의 소용돌이처럼 보인다. 이것은 물질계에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부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채널을 통하여 흘러 내려올 때, 그 힘은 어느 정도로 소용돌이와 하나가 되어, 그 소용돌이에 의해 영향을 받아 (그와 함께) 힘이 어떠한 통로를 통하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특징들을 띠면서, 그 소용돌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사람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는 점진적으로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정연한 상태로 되어, 서서히 팽창하여 더욱더 높은 진동들에 반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매번 노력할 때마다, 자신과 상위의 계와 직관적인 지식 사이를 분리시키는 베일의 막을 얇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상념 형태들은 날마다 더욱 명확하게 되어, 상위의 계로부터 그 속으로 쏟아 부어지는 생명은 더욱 더 충만하게 된다.
이리하여 명상은 보다 높은 유형의 질료들로 여러 체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것은 종종 고상한 감정들이 경험되도록 하는데 이 감정들은 부디계로부터 내려와서 아스트럴체에 반영된다. 게다가, '지속성'을 얻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멘탈체와 원인체의 발달이 또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주는 고상한 감정들은 조금씩 왜곡되기가 아주 쉬워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단지 감정만으로는 완벽한 균형이나 지속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동기를 유발하는 감정의 힘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통제력도 필요로 한다.
파탄잘리Patanjali가 상세히 설명한 '다섯 가지 마음의 상태'를 알면 명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신비학도는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단계)가 멘탈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각각의 계에도 그에 알맞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크쉬프타Kshipta: 나비와 같은 마음으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항상 쏜살같이 날아간다. 이것은 물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2) 무드하Mudha: 혼란스러운 상태로, 사람이 감정의 지배를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단계. 이것은 아스트럴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3) 비크쉬프타Vikshipta: 어떤 개념에 심취해있거나 몰두한 상태로, 어떤 개념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인식적인 측면과 관계 있는 비베카Viveka(분별)를 배워야 한다.
(4) 에카그라타Ekagrata: 한 점의 상태로 어떤 개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 멘탈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의식의 활동적인 측면과 관계있는 바이라기야Vairagya(평정)를 배워야 한다.
(5) 니루다Niruddha: 자기절제self-control의 단계로 모든 개념들을 초월하여 각성된 의지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선택한다. 이것은 부디계에서의 활동성에 상응한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의식의 의지적인 측면과 관계 있는 샤트삼파티Shatsampatti(6중의 정신적 자질)를 배워야만 한다.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마음의 모든 감정들을 억제할 수 있는 바로 그때, 그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더욱 충분히 다룰 관조에 상응하는 삼마디Samadhi에 들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마음의 단계에 대한 뼈대를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여기서 삼마디에 대하여 미리 약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어원적으로 삼마디는 "완전히 함께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어로는 "마음을 함께 두는 것" 즉 마음을 완전히 함께 모으고 모든 산만한 것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요가란 진정된 마음이다"라고 브야사Vyasa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삼마디의 원래 의미이다. 비록 마음이 완벽히 진정되어 고요한 상태composure에 이름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결과인 '무아경'을 나타내기 위하여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두 종류의 삼마디가 있다.
(1) 삼프라즈나타Samprajnata 삼마디: 의식이 있는 삼마디 즉 대상에 대하여 외부적으로 의식이 향한 삼마디.
(2) 아삼프라즈나타Asamprajnata 삼마디: 의식이 없는 삼마디 즉 의식이 내적으로 향하여 자신 속으로 철수하여 근접한 상위의 체 속으로 들어간 삼마디.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이 사실들은 아래의 표에 설명되어 있다. (표생략)
학도는 또한 요가에서 언급되는 4가지 마음 상태에 대하여 간략하게 열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자그라트Jagrat: 각성된 의식
(2)스바프나Svapna: 꿈의 의식- 아스트럴체에 작용하여 그 경험을 두뇌에 줄 수 있는 의식
(3)수슈프티Sushupti: 깊은 잠의 의식- 멘탈체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 경험을 육체의 두뇌에 인상을 줄 수 없는 의식
(4)투리야Turiya: 무아지경의 의식- 두뇌로부터 아주 많이 분리되어
있어서 외부 수단에 의하여 쉽사리 회상할 수 없는 의식
그러나 이들 네 가지 의식 상태가 각각 모든 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물질계 의식의 네 상태에 대한 예들을 보여주는데, 간결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표로서 정리되어 있다.
번호 | 이 름 | 물질계 있어서의 예 | ||
산스크리트어 | 우리말 | |||
1 | 자그라트 | 각성 | 책을 읽는 것 | 시계를 보는 것 |
2 | 스바프나 | 꿈 | 단어들의 의미를 인식함 | 시계를 상상함 |
3 | 수슈프티 | 깊은 수면 | 저자의 마음에 접촉함 | 이상적인 시계를 생각함 |
4 | 투리야 | 무아경 | 저자의 마음속에 들어감 | 추상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나아감 |
또한, 그 용어들은 상대적이다 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그라트, 즉 각성된 의식이란, 명백히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할 수 있는 뇌와 신경계에 작용하고 있으며 이 의식은 전체의식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의식을, 한쪽 끝만이 두뇌 속으로 삽입된 커다란 달걀 같은 빛(덩어리)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 끝이 각성된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이 아스트럴계에서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정도로 충분히 계발될 때, 아스트럴 의식은 각성된 의식의 일부분이 된다. 그때 멘탈 의식은 스바프나svapna, 즉 꿈의 의식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멘탈 자의식이 개발되고 (두뇌가) 그 (진동)에 반응할 때, 각성된 의식은 멘탈 의식을 포함한다. 그렇게 계속되다가, 마침내 다섯 개의 계에 있는 모든 의식이 각성된 의식 속에 포함된다.
이렇게 각성된 의식이 확장되는 것은 뇌 속에 있는 (어떤) 기관들과 세포들 사이의 연결들이 발달될 뿐만 아니라 뇌의 원자들도 발달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스트럴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뇌하수체가 계발되어야 하고, 원자 속에 있는 네번째 일단의 스파릴래Spirillae가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
멘탈 자의식을 포함하기 위하여, 송과선이 활성화되어야만 하고, 다섯 번째 일단의 스파릴래Spirillae가 완전히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신체적인 발달이 없으면, 그 때 아스트럴 의식과 멘탈 의식은 여전히 초의식 상태super-consciousness로 남아 있으며 뇌를 통하여 표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그의 자그라트jagrat 즉 각성 의식은 아스트럴 의식이다. 이리하여 자그라트에 대한 광의의 정의는 제일 바깥의 체를 통하여 작용하고 있는 '전체 의식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또한 위에서 분석한 것을 토대로 삼마디Samadhi를 다시 고찰할 수 있다. 삼마디란 육체는 느낄 수 없지만 마음은 충분히 의식할 수 있는 상태여서, 마음이 육체를 초월한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로 육체의 두뇌로 되돌아가는 의식 상태이다.
만일 사람이 무아경에 빠져들어 아스트럴계에서 활동적이게 될 때, 그 때 그의 삼마디는 아스트럴계에 있다. 만일 그가 멘탈계에서 작용한다면, 그때에 그의 삼마디는 멘탈계에 있다.
삼마디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마음이 (다른 차원-계에 대하여) 충분히 자의식적인 동안에 육체를 무감각한 상태로 놔두기 위하여 그 육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마디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리하여 마스터는 아트마계에서 삼마디를 시작하여 상위의 우주 계들로 올라간다.
또한 삼마디라는 말은 사람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계를 막 벗어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때때로 사용된다. 이리하여, 의식이 단지 물질계에서만 명확한 야만인들에게는, 아스트럴계가 삼마디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위 체들에 되돌아 올 때 어떠한 명확한 지식을 추가적으로 가지고 오지를 못하고 또한 어떤 유용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도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의 삼마디를 최고의 신비학파에서는 장려하지 않는다.
잠드는 것과 삼마디로 들어가는 것은 대개 똑같은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는 일상적인 상태에서 기인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훈련된 의지 작용에 기인하며 매우 귀중한 능력이다.
최면, 마약, 흰 바탕에 있는 까만 점을 보는 것이나, 코끝을 응시하는 것이나 다른 비슷한 수련들과 같은 무아경을 일으키기 위한 물리적인 수단들은 하타Hatha요가의 방법에 속하며 라자Raja요가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투시가에겐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와 '자의식으로 황홀경에 든 요기' 사이에 차이는 뚜렷하다. 최면에 걸린 피시술자에겐, 모든 "원리(본질)들"이 존재하는데 상위 마나스는 마비되어 있고 부디buddhi는 그 마비로 인하여 상위 마나스로부터 단절되고 아스트럴체는 전적으로 하위 마나스와 카마에 복종한다.
다른 한편, 요기에 있어서 하위의 4가지 "원리(본질)"는 거의 지각할 수 없는 '황금색을 띤 프라나'의 진동들과 머리로부터 위쪽으로 쭉 뻗쳐 한 점에서 절정을 이루는 '황금색 줄무늬가 있는' 보라색 불꽃 하나 외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그가 경험한 것들을 뇌 속에서 전혀 회상할 수 없으나 요기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아마도 명상 시에 사용되는 방법들 중 얼마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 학도는 습관이 될 때까지 육체가 영(혼)spirit의 도구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육체를 생각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생각해야만 하고, 생각으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서, 실제로 육체를 부인해-관련성을 끊어-야 한다.
다음에는, 자신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는 아스트럴체의 감정과 욕망들을 가지고 아스트럴체를 부인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멘탈체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이 상념(생각)들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을 부인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영원한 평화가 존재하는 자유로운 영(혼)spirit의 영역 속으로 치솟아 오르도록 해야만 한다. 거기서 잠시 동안 머물면서 자신으로 하여금 "저것이 바로 실제 자아이다"라는 것을 자각하기위해 아주 열심히 분투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의식(적)으로' 내려와서, 그는 영(혼)의 평화를 자기의 다양한 체들 속으로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수련은, 목적에 맞게 하나의 미덕을 선정함으로써 명상을 인격 형성을 도모하는 쪽으로 돌리는 것인데, 해를 끼치지 않음harmlessness를 예로 들어보자. 주의가 집중된 후에, 많은 측면에서 그 주제에 관하여 생각한다. 즉, 행위, 말, 사고와 욕망에서의 해를 끼치지 않음 해를 끼치지 않음이 이상적인 사람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어떻게 그것이 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만일 그가 그 미덕을 충분히 얻었다면, 자기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등등에 관하여 생각한다.
이렇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 관하여 명상을 한 후,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상념 속으로 저절로 표현될 마음 상태를 일상생활 안으로 가지고 올 것이다. 물론 다른 특성들도 유사하게 다룰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몇 개월 동안 진지하게 노력하면, 플로티누스Plotinus가 (우리가 꼭) 기억해 둬야 할 말로서 묘사한 것처럼, 그의 삶에 있어서의 놀라운 변화들을 일으킬 것이다. "너 자신의 내부로 물러나서 보라. 그리고 네가 너 자신이 아직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창조자(조각가)가 하는 것처럼 하라. 그는 여기를 잘라 내고 저기를 매끄럽게 하고 이 선은 더 우아하게 저쪽 선을 완전하게 하여, 마침내 그는 조각에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나게 한다. 너도 또한 그렇게 하라. 지나친 모든 것을 잘라 내고 구부러진 모든 것을 곧게 하고 그늘진 모든 곳에 빛을 가져오고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애쓰고, 신과 같은 미덕의 광채가 네 위에 빛날 때까지 네가 최종의 선함이 흠 없는 성소에 확실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을 볼 때까지 너의 조상을 끌로써 다듬는 것을 중단하지 마라"
이리하여 미덕에 관하여 명상을 하게 되면, 사람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그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힌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에 관하여 생각하라" 또다시 말한다. "인간은 상념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명상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탁월한 예가 40년 동안 매일 진리에 관하여 명상한 어떤 사람이다. 그 결과로 그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진동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진리 자체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만일 재판관이었다면, 그의 능력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일을 행할 때, 사람은 자기의 상상력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요가에서 사용하는 주된 수단이다. 사람이 상념으로 자신이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이미 그 특성을 절반은 소유하고 있다. 만일 그 자신이 어떤 실패에서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면, 그는 그 실패를 절반은 벗어나 있다. 훈련된 상상은 매우 강력한 무기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곤란한 일과 결점을 절반은 제거할 수도 있다.
결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차단하는 하나의 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병적임과 침울함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능한 한, 성격의 결점들을 무시하고 반대의 미덕들을 형성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영적인 삶에서의 성공은 하급 속성과의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고급 속성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분별을 모든 것에 적용하여 우리가 성장함으로써 얻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단 고차원적인 삶의 축복과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하게 되면, 이에 반비례하여 저차원적인 삶은 퇴색되어 그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데 대한 가장 좋은 참회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와 함께 희망에 찬 용기로써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위대한 스승이 말씀하셨다.
다음에는, 명상의 목적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적인 이해이고, 또한 그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라고 가정하자. 신비 학도는 '아는 자'의 첫 번째 일이 정확히- 관찰하는 것이다 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념은 관찰의 정확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관찰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 첫 잘못으로부터 수많은 잘못들이 뒤이어 발생하는데, 이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대상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관찰된 후에, 상념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초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든 측면에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에 작용한다. 그리고 여전히 모호한 의식의 수준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 행해진다.
예를 들어 주제를 조화로 정하자. 많은 감각들에 관련하여 조화를 고찰하자 음악, 색채와 많은 다른 종류의 현상들로 조화를 고찰하자. 조화의 주요한 특징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다른 유사한 개념들과 대조적인 개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일련의 사건에서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것의 유용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없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자. 이 모든 것들과 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답을 한 후에, 모든 구체적인 영상이나 상념들을 내버리고 조화의 추상적인 개념을 사고화하기 위한 노력을 행해야 한다.
학도는 멘탈계의 시력은 물질계의 시력만큼이나 아주 실제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리하여 사람이 물질계의 시력으로 나무나 탁자를 보는 것만큼 명확하고 분명하게, 조화라는 개념이나 2의 제곱근을 보기 위하여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세 번째 예로서 헌신적인 명상을 들자. 이상적인 사람인 마스터Master를 생각하자. 신성이나 아니면 신성의 어떠한 현현이라도 지정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감탄(찬미), 감사, 존경, 숭배가 항상 일어나도록 상념(생각)을 숙고하고, 모든 측면과 관계를 지어서 각 특성을 다루어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추상적인 이상理想ideal과 하나의 인성personality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명상 목적에 적합하다. 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대개 추상적인 이상이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감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상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추상적인 이상이 가지는 불리한 점은 그것이 열망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며, 구체화하는 것이 불리한 점은 그것이 이상 이하로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스터에 관하여 명상함으로써 얻는 결과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스터와 명확히 연결되는데, 그것은 투시가의 시야에는 일종의 광선으로서 나타난다. 마스터는 항상 잠재의식적으로 그러한 광선이 (자신에게) 연결되면서 부딪히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명상이 끝난 후 오랫동안 계속해서 작용하는 자기磁氣의 지속적인 흐름을 그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 광선을 따라 우리에게 내보낸다.
그림이 명상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면, 그림의 표현이 변화하는 것을 종종 관찰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의지가 직접적으로 물질 질료physical matter에 작용하게끔 훈련되어, 그 결과로 실제적인 물질 입자들physical particles이 강하게 지속되는 상념의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명상의 다른 한 형태, 즉 만트라적인 명상이 주어질 수 있다.
만트람이란 어떤 명확한 결과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신비가에 의하여 배열된 명확하게 연속되는 소리들이다. 그러한 소리들은 운율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때, 여러 체들의 진동들을 일치시켜 그 (소리)들과 조화(일치)시킨다. 만트람은 이리하여 특정 진동들을 억제하거나 바라는 진동들을 일으키는 기계적인 방법이다. 그것의 효력은 이른바 동조 진동 sympathetic vibration에 달려 있다.
만트람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결과는 그 만큼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식서 Church formulae의 반복과 묵주 기도 rosary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의 가치는 계속하여 셈을 함으로써 의식으로 하여금 정신이 산만하지 않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데 있다.
주로 인도에서 실행되어지는 이러한 명상법에서, 헌신자는 그의 마음을 말하자면 쉬리 크리쉬나 Shiri Krishna, 즉 화신한 신, 세상에서 사랑과 지식의 신Spirit에게 향하게 한다. 하나의 문장이 만트람으로 채택되어 계속 반복해서 읊는 동안, 그것의 깊고 다양한 의미에 주의를 집중하여 숙고한다. 이렇게 해서 헌신자는 바로 위대한 주님The Great Lord과 (직접) 접촉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매일 명상하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일에 그들의 마음을 집중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것은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서 뿐만 아니라 물질계의 에테르에서도 (힘의) 긴장을 일으키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예기치 않은 발전을 가져온다. 이리하여-흔히 있는 경우이지만-우리의 환경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대신에, 물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명상 집단에서 방황하는 마음은 그 흐름이 깨어져 버려서, 노도같이 움직이는 거대한 상념의 덩어리로서 존재하는 대신 그 명상 집단 안에-강에서 물을 비껴가게 하는 바위들처럼-소용돌이들을 형성할 것이다.
집단적인 감정과 상념이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단적인 예는 빅토리아 여왕의 60년 기념제이다. 주교 리드비터Leadbeater는 그 행사를 그가 지금까지 본 오컬트적인 힘 중에서 가장 놀랍게 현현한 것 중 하나로 묘사했다. 군중은 아주 의기양양하여 그들의 감정에 의하여 그들 자신들로부터 들어 올려져서(lifted) 영혼이 엄청나게 고양되는 것을 경험했다. 비슷한 효과가 비록 소규모이지만 집단(그룹) 명상group meditation에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명상을 하는데 물리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수 사항들을 고찰할 것이다. 명상시에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몸은 편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몸에 대해서는 잊어야한다. 만약에 몸이 불편하다면, 몸은 잊혀 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몸은 편안해지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떤 상념들과 감정들이 몸의 특징적인 움직임과 몸짓을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그 과정을 역으로 돌림으로써 몸의 자세는 여러 가지 (초월적인) 마음과 감정의 상태들을 초래하여, 그 원리들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학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대다수의 서구 사람들은 등이 심하게 경사지지 않은 안락의자에 앉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양손은 마주잡고서 다리 위에 놓거나, 양쪽 무릎에 가볍게 놓을 수도 있다. 발은 함께 편하게 놓거나 오른쪽 발을 왼쪽 발 위에 놓고 꼬을 수 있다. 몸의 사지를 이렇게 고정시키는 것은 손가락 끝이나 발 (그리고 그 외의 신체 부위) 등으로부터 나가는 자기磁氣의 유출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세는 쉬워야 하며 긴장을 풀어야 한다. 머리는 가슴으로 내려가서는 안 되고 가볍게 균형을 이루여야 한다. 양 눈과 입은 닫고 (자기 흐름이 많이 흐르는) 척추는 똑바로 세워야 한다.
동양 사람은 대개 바닥이나 낮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이 자세는 방출된 자기가 보호막 안에서 신체를 빙빙 돌아 상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약간 더 효율적이다 라고 말해진다.
명상 자세를 결정하는데 고려되어야 할 다른 요소는 육체 의식physical consciousness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인도인은 (의식을 잃는 경우) 몸에 상처를 입지 않고 단순히 뒤로 넘어진다. 의자에 앉아서 명상하는 사람들은, 육체가 의식을 잃는 경우에 의자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안락의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주 드믄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럽게 잠으로 떨어지는 경향 때문에 눕는 자세를 채택해서는 안 된다.
미리 냉욕이나 활발한 산책을 하는 것은, 두뇌의 활동에 분명히 해가 되는 혈액이 완만하게 순환하는 경향을 극복하는데 유용하다.
깊은 명상과 호흡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 시에 몸이 조화를 이루게 됨에 따라 호흡은 점점 깊어지고 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게 되어 마침내 점차로 아주 느려지고 조용해져서 거의 지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하타요가는 그 과정을 반대로 하는데 호흡을 아주 섬세하고 또한 정교하게 통제함으로써 신체의 여러 기능들을 조화시키고 마침내 마음의 여러 작용들을 조화시킨다.
그러나 학도는 호흡 수련을 무분별하게 실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명상 중에 자신이 행하는 노력들에 의해서 호흡의 자연스러운 효과가 신체에 일어나게 하면서, 하타요가의 방침(가르침)을 따라 상념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도록 충고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얼마의 호흡 수련은 매우 위험하지만, 심장과 폐에 부당하게 긴장을 유발하지 않고 상념을 몸의 다양한 센터들 즉 차크람Chakram들에 집중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간단하면서도 다소 깊은 호흡을 행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좋은 향은, 오컬트적인 견지에서 보면 "기운atmosphere"를 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또한 도움이 된다. 신비 학도는 또한 자기 주위에 있는 아름다운 색채들, 꽃들과 그림들 그리고 마음과 감정들을 고양시키는 다른 수단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식사를 금하는 것을 준수하고 건강에 해가 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다면 육식과 술을 삼가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알코올이 섭취되면 명상은, 특별히 뇌하수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뇌 속에 염증(의 증상)들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잠을 잔 후와, (깬 후에) 부대끼는 세상살이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욕망들과 감정들이 대개 더욱 고요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 명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다. 그러나 어떤 시간을 선택되더라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명상을 해야 한다. 더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명상하는 시간대는 항상 같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규칙성이 명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헌신적인 명상가들에 의해 선택된 시간은, 해뜰 때, 한낮과 해질녘이었는데, 이것들은 자기적으로 보아 가장 적합한 때이다. 하루 중 매시간 종이 울릴 때마다 잠시 동안, 마음을 자기 자신이 영적인 사람Spiritual Man이다 는 것을 자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이것을 실행하면, 소위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부르는 "자아 회상self-recalledness"으로 발전하게 되어 학도가 마음을 자동적으로 영적인 상념들로 되돌아가도록 훈련하는데 도움을 준다.
식사를 한 직후에 명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유는 명백한데, 명상이 소화기관에서 피를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또한 한 밤중에 좋지 않는데, 여러 체들이 피곤하고 에텔체가 쉽게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는 달의 부정적인 영향이 작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이 발생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주: 보름날의 명상이 좋은 이유는 달이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게 되어 태양의 기운을 가장 적게 방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명상은 아스트럴적이거나 멘탈적인 나쁜 영향들 때문에 보통 때보다 성공하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시기에 미치는 혹성의 영향이 다른 때보다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한 점성가는 목성이 달과 어떠한 관계를 가질 때 에텔 대기를 팽창시키고 그래서 명상을 더욱더 성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토성과의 어떤 위치는 에텔 대기를 수축시켜서 명상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위에 간략히 개요만 설명한 명상체계는 영적이고 멘탈적이며 윤리적인 발달과, 마음 및 감정의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심령 능력들psychic faculties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명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충분히 민감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직관적인 심령능력psychism의 한 형태로 계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직관적인 심령 능력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점차로 민감하게, 또 잠을 자는 동안 아스트럴계에서 경험한 것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자아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지도에 대한 더 민감한 감수성에서, 또한 마스터들과 영적으로 발달된 사람들의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도 특출한 방식으로 특출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명상은 결국에는 각성[깨달음]Illumination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은 다음 세 가지 전혀 다른 것들 중에 속한다.
(1) 어떤 주제에 대하여 강하고 조심스럽게 깊게 숙고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이 직접 그 주제에 대한 어떤 결론에 이룰 수 있다 (2) 그는 자기의 상위의 자아higher self로부터 각성Illumination을 얻어서, 그의 상위 자아가 그 고유계에서 그 문제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3) 상당히 발달되면, 그는 마스터들이나 데바들devas과도 접촉할 수도 있다. 그가 내린 결론들이 자신의 상념 형태들에 의하여 더렵혀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첫 번째에 한해서 이다. 왜냐하면 상위의 자아는 이것들을 초월하여 있으며, 또한 마스터나 데바devas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상할 때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루 종일 행하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명상 시에 그것들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물리적인 명상은 자아ego가 아니라 하위의 여러 체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에 에고는 인성personality을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즉 에고는 대개 약간 경멸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약 어떻게든 자아가 발달이 되면, 자아는 자신의 계level에서 명상하겠지만, 물론 그 명상은 인성의 명상과 동시에 일어날 필요는 없다.
명상은 완전한 의식(상태)에서 신체를 떠나는 기술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다. 의식이 흔들림 없는 지속성과 확고부동함에 이르게 될 때, 관심은 외부세계와 몸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철수되고, 감각들이 고요한 상태로 있는 반면에, 마음은 아주 활발하게 작용하지만 내적으로 모든 힘들은 철수되어져서-상념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인-상념이 단 한 점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표출될 준비가 되어진다.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조용하고도 의지적인 노력으로 비교적 쉽게 이렇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때, 육체의 두뇌physical brain속에서 (의식이) 작용하는 동안 자신이 도달 가능한 최고의 상념을 넘어 자신을 투사할 수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할 때보다 상위의 의식higher consciousness으로 상승하여, 그 의식과 연합하여, 자신이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행해질 때 잠을 잤거나 꿈을 꿨다는 듯한 느낌이 전혀 없으며, 또한 결코 의식을 잃지도 않는다. 자기가 자신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치 묵직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빗은 것처럼, 그 사람은 자신이 몸밖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무아경에 이를 정도로 헌신을 강도 있게 하든지, 아니면 위대한 스승에 의하여 제자에게 전해지는 특별한 방법들로도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가, 자유로이 다시 그 육체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가 겪는 경험들에 대한 기억을 두뇌에 각인시키고, 육체에 있을 동안에 그 기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진정한 명상은 반수면 상태와 육체적인 쾌락상태에서 일어나는 행복감이 아니라 불굴의[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강령술에서 일어나는 수동적인 영매상태mediumship와 관계가 없고, 사실상 그와 전혀 다르다.
학도는 자기가 영적인 영향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동시에 적극적positive이어야 한다는 지시에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적극적인 노력은 하나의 예비단계로 필요하다. 이것은 상위계의 영향이 아래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의식을 상위계들에 이르도록 고양시킨다. 그때, 바로 그때라야만, 이렇게 얻어진 평화를 인식하게 되고, 상향적인 분투적인 노력을 완화시키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영적인 영향력에 개방하는 것"이라는 어구는 높은 영계에서 강하면서도 고요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수동적이고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가 날개와 날개 끝부분으로 엄청난 노력을 계속하여 유지함으로써 불어오는 강풍에 (균형을 유지하여) 공중에서 떠 있는 것과 똑같다.
제 17 장 : 관 조
관조Contemplation는-우리가 이미 두 개를 다룬-세 단계 중 세 번째이다.
세 단계란:
(1) 집중Concentration - 주의를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는 것.
(2) 명상Meditation - 단지 그 대상에만 관련해서 의식을 활동하게 하는 것: 즉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그 대상을 보고, 그 의미를 통찰하고 새롭게 깊은 상념에 도달하거나 그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영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3) 관조Contemplation - 의식의 저차원적인 활동들이 성공적으로 억제되는 동안, 의식을 그 대상에 활발하게 집중하는 것: 받아들인 영감light에 한 동안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 그것이 사고思考나 명상의 (계통의) 절정에서 집중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힌두 용어에서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이 더 자세히 설명되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1) 프라티야하라Pratyahara: 감각들의 완전한 통제를 포함하는 예비적인 단계.
(2) 드하라나Dharana: 집중(Concentration)
(3) 드햐나Dhyana: 명상(Meditation)
(4) 사마디Samadhi: 관조(Contemplation)
드하라나, 드햐나와 사마디는 묶어서 산나마Sannyama로 알려져 있다.
명상할 때, 우리는 대상과 함께 여러 가지를 관련지어 보거나 또는 비교해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우리는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추리하고 논할 수 없을 때까지 이 추리 및 논의 과정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는 주의를 그 대상에 활발하게 기울인 채로, 모든 비교하는 것과 논하는 것을 중지하고 우리에게는 그 대상을 둘러싸는 것 같은 무한indefiniteness을 통찰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 과정을 억제한다. 이것이 관조觀照이다.
초학도는 명상이 일생을 요하는 하나의 학문(기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그러므로 그는 초기의 노력에서 순수한 관조의 단계에 도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관조란 사고자와 대상이 하나가 되도록, 의식을 한 대상에 유지하여 그것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또한 묘사될 수도 있다.
잘 훈련된 마음이 잠시 동안 한 점의 상태one-pointedness나 집중을 유지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주의를 어떤 것에도 기울이지 않고서 고정된 주의를 유지하면서 그 대상을 버릴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 관조의 단계에 이른다.
이 상태에서, 멘탈체는 어떠한 영상image도 보여주지 않는다. 멘탈체 자신의 구성 물질materials은 어떠한 인상도 받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며 고요한 물같이 완벽하게 조용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 상태는, 화학자가 말하는 "임계臨界" 상태 즉 물질의 두 상태 사이의 (변형)점과 같이 아주 짧은 기간 이상은 지속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 멘탈체가 고요하게 될 때, 의식은 멘탈체로부터 벗어나 "라야 센터laya centre"즉 멘탈체와 원인체 사이에 있는 중간 접촉점들에 들어가고 나온다.
이러한 의식의 이전은 일시적인 기절 혹은 의식 상실을 수반한다. 이는 의식의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그 뒤에 의식이 상위의 체에서 작용하게 된다. 하위 계들에 속하는 의식의 대상들을 내어 버리게 되면, 이렇게 상위 계에서 의식의 대상이 뒤이어 나타나게 된다.
그 때 자아는 자기 자신의 고상한 상념들에 따라서 멘탈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진동들로 멘탈체를 충만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계보다 훨씬 더 높은계들에 대해서 얻은 광경들visions을 모방해서 멘탈체를 만들 수 있고, 이리하여 하위의 의식에다가, 모방하지 않았다면 멘탈체가 반응할 수 없었을 개념(관념)idea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들이, 현란한 빛으로 마음속에서 번쩍거리며 들어와서 하나의 세계를 비추는 천재의 영감靈感들이다. 세계에 영감들을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 자신도 일반적인 멘탈 상태로는 어떻게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했는지를 거의 알 수 없지만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
"...내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능력이
나의 입술에 살아 있고 나의 손으로 손짓한다."
모든 교리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성인들의 절정(황홀경)과 환상들도 또한 이러한 성질의 것이다 이들 경우에서는 오랫동안 몰입하는 기도나 관조가 (이러한 현상들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두뇌의 상태를 낳았다. 감각들이 전달되는 길들은 강한 내적인 집중에 의해 폐쇄되었고 라자 요가 수행자가 심혈을 기울여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은 상태에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의 이전은 "씨앗을 가진"명상(meditation with seed)으로부터 "씨앗을 가지지 않은"명상(meditation without seed)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그것은 사슬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논쟁에서 마지막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추론의 최고지점이나 전(추론) 과정의 중심 상념이나 형상figure위에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씨앗을 가진 명상이다.
그 다음에 학도는 여전히 마음을 얻어진 위치(상태), 즉 도달한 최고의 지점에서 활기차고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모든 것들로 하여금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그것이 씨앗이 없는 명상이다. 침묵과 텅 빔 속에서 기다리며 평형의 상태로 계속 있을 때, 그 사람은 "구름(cloud)"속에 있다. 그때, 갑자기 하나의 변화가, 분명하고 불가사의하며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illumination로 이끄는 관조이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한 마스터의 영상을 형성한 후, 이상적인 사람인 그 마스터에 관한 관조를 실행할 때, 자신을 그 영상과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채우면서 학도는 황홀하게 그 영상을 응시한다. 그러고 나서 마스터를 향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애를 쓰면서 그는 자기의 의식을 이상적인 사람에게 고양시키고 그 속에서 흡수되어 그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다.
위에서 언급된 일시적인 기절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마-메가Dharma-Megha, 즉 의義의 구름이라 불린다. 서구의 신비주의자들은 그것을 "산 위의 구름Cloud on the Mount", "성소의 구름Cloud on the Sanctuary", "자비의 보좌의 구름Cloud on the Mercy-Seat)"라 부른다. 그 사람은 홀로 있지는 않지만 (무엇인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낀다. 곧 구름은 엷어지고 그 다음에 상위 계의 의식이 점점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사람에게는 바로 자신의 생명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고, 그가 큰 어둠으로 가득한 텅 빈 곳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고요히 하고 내가 하나님을 알라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라는 자아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고, 자아의 영광이 보일 것이다. 구름은 사라지고 자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전에,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적어도 수련기간 동안에는 전적으로 포기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카마Kama(욕망)는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원하는 것들이 마음을 차지하는 동안에, 마음은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다 모든 바람은 분노, 불성실, 불순함, 분개함, 탐욕, 부주의함, 불만, 나태, 무지 등등이 생기는 씨앗(근원)이다. 하나의 바람이나 희망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 (진리의) 법칙을 이렇게 위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
바라는 것들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들은 사람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것이다; 상념의 흐름(물결)은 언제나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우유부단한 사고에 의하여 열려 있는 조그만 협곡들과 수로들 속으로 이탈해서 흐르기를 원하고 있다. 모든 충족되지 않은 욕망,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굶주린 입이 음식을 찾듯이 주의를 끌려고 한다. 일련의 상념이 어려움을 만날 때, 이들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한쪽으로 방향을 튼다. 방해를 받은(중단된) 상념의 사슬들을 찾아내면,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의식적인 활발함이, 어떤 것의 본질nature과 계plane에 속하는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활발함에 대해서, 직각들을 이루며 나아가기 시작할 때 관조 과정은 시작된다.(The process of contemplation commences when the conscious activity begins to run, as it were, atright angles to the usual activity, which endeavours to understand a thing in reference to other things of its own nature and plane) 그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존재하는 계들을 (칼로 자르듯이) 가로지르며 보다 정묘한 내부의 속성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비교하는 활동들에 의하여 주의가 부분 부분들로 더 이상 나누어져서 분산되지 않을 때, 회전하는 팽이가 매우 급속하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정지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처럼, 마음은 전체적으로 움직이고 아주 고요한 것 같을 것이다.
관조할 때 사람은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와 대상을 서로 관련된 두 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관념(생각)을 감정으로 물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초연의 지점에 도달하여 관조는 바로 대상의 내부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동시에 멘탈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모든 상념의 노선을 따라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행해야 한다. 의식은, 하늘에 날개를 펴고 있는 새처럼, 앞을 내다보고 결코 뒤돌아 설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관조할 때 상념은 내부로 들어가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된다. 비록 무엇인지는 명확히 포착할 수 없지만 뭔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뒤돌아가거나 한쪽으로 돌이키지 않고, 상념은 그 위치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있다. 이 관조에서는, 물론, 잠이나 멘탈적인 무無활동의 성질을 띠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 강한 탐구열, 즉 시력이 정상적으로 뚜렷하고 정확하게 유지되는 의식적인 활동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하위 영역들에 내려가지 않고, (무한한 속성의) 명확하지 않은 것indefiniteness속에서 명확한 어떤 것을 보기 위한 지속된 노력이 있다.
헌신가는 유사한 방식으로 관조를 실행할 수 있지만, 그의 경우에 활발한 것은 상념(사고)이라기보다는 감정이다.
자기 자신의 내부 속성(본질)nature에 관하여 관조할 때, 학도는 외부의 여러 체들 및 마음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성을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속성들을 제거하지 않고 한계들limitations을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벗겨 낸다. 마음은 몸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자유롭다. 그리고 영soul은 마음을 능가하는데, 그것은 훨씬 더 자유롭고 더 신속하다. 사랑은 어떠한 외부적인 표현에서 보다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더욱 가능하지만, 마음을 능가하는 영에서는 사랑은 신성하면서 확실하다. 이성과 판단은 감각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비뚤어진) 증거를 언제까지나 바로 잡는다: 영의 시야는 감각 기관들이나 마음 없이 진리를 식별한다.
이러한 수련들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충만한 의식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 저차원의 활동들을 차단하라. 첫째로, 하위의 마음은 활기를 띠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 그 마음의 활동은 (그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얻어진 힘(충동)impetus이 내부에서 고차원의 기능들을 단련시키고 계발하는데 사용되는 동안에는 차단되어야 한다.
고대의 요가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사고하는 마음의 과정들이 적극적인 의지에 의하여 억압될 때, 상념의 욕망들을 초월하여 그들 가운데서 선정하고, 욕망들이 특별한 행위들과 노력들을 자극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일반적인 사고 작용thinking을 초월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새로운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탁월한 의식 상태는 하위의 마음lower mind으로서는 묘사될 수 없지만, 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신체가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들이 신체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과 똑같이, 멘탈 활동이 진행 중 일지라도 사람은 자기가 마음과 상념을 넘어선 어떤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대상들은 식별하고 비교하며 원인(결과)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심혈을 기울이는 과정들을 가진, 마음을 벗어난 또 하나의 존재 상태, 아니 이보다는 오히려 생명에 대한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개념이 존재한다. 그 높은 상태는 의식의 활동들이 모든 세속적인 열정과 활기 속에서 그들이 정상적으로 거주하는 더듬는 동굴 생활groping cave life을 벗어나게 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그 높은 의식은 조만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오게 될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게 될 때 모든 삶(생명)이 갑작스럽게 변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학도가 영적인 경험을 풍성하게 함에 따라, 그는 의식의 새로운 국면들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그의 내부에서 열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불타는 열망으로 그의 이상에 집중할fixed때, 그는 곧 자신에게 빛을 비추는 이상의 영향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그가 헌신의 대상에 도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할 때, 잠시 동안 하늘 자체의 문들floodgates이 열리고 자신이 그 이상과 하나가 되고 그것을 실현(체득)함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보다 (유한 계의 틀에 맞추어진) 정형적인 마음의 형태(형체)들을 초월한 후에, 높이 도달하려는 강한 노력이 행해진다. 그 다음에 인성personality의 제한들이 떨어져 나가고 분리의 모든 그림자가 대상과 추구하는 자의 완벽한 연합 속에 사라질 때, 바로 그러한 영의 황홀경 상태(ecstacy of spirit)에 도달하게 된다.
침묵의 목소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너는 네 자신이 길 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 위를 여행할 수 없다...보라! 너는 빛이 되었고 너는 소리가 되었고 너는 너 자신의 스승과 신이 되었다. 바로 너 자신이 네가 탐구하는 대상 이니라 끊임이 없는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변화 없고 죄가 없어 일곱 목소리가 하나로 된 채로영원들을 통하여 다시 울린다."
그러한 경험들을 더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지루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유한계의 틀로) 정형화된 말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말이란, 순례자가 그의 발걸음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도록,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길잡이로서만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 신지학 멘탈체 명상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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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리 사랑 그리고 수행
옮긴이 :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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