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옥윤의 이별 콘서트
길옥윤은 1927년 평북 영변 태생으로 경성치과전문(현 서울대 치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음악을 자신의 길로 선택한 그는 해방 직후 박춘석 등과 함께 그룹 ‘핫팝’을 결성해 연주 활동을 했다.
뛰어난 작곡가 겸 작사가이면서 재즈 색소폰 연주자로,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음악으로 풀어낸
서정가요의 대표적 창작자였다.
길옥윤 吉屋潤 (1927 ~ 1995)吉屋潤 吉屋潤
본명 : 최치정(崔致禎)
평안북도에서 출생(부친 : 의사)
서울대학교 졸업(치의학과)
일본으로 건너가서 색소폰과 재즈음악 활동 시작
한국에 와서 패티김, 현미, 혜은이 등과 수많은 명곡 작곡
1966년 패티김과 길옥윤은 당시 민주 공화당 김종필 의장 주례로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사람은 사랑했던 결혼이지만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두사람 사이엔 딸이 태어났으나 서로의 관계는 원만치 못하여 약1년반 정도 떨어져 살기로 했다.
당시 뉴욕에서 지내던 길옥윤이 패티김을 생각하며 썼다는 곡이 '이별'이다.
1973 결국 두사람은 이혼을 하였다.
길옥윤과 헤어진 패티김은 이탈리아의 사업가와 재혼하여 딸까지 낳았다.
길옥윤은 이혼과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던 중
골수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투병을 이어가던 길옥윤이 대중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4년 6월 SBS의 '길옥윤의 이별 콘서트'에서 였다.
병마와 싸우는 길옥윤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후배 음악인들이 마련한 헌정 콘서트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길옥윤은 49년의 음악인생을 이 무대에서 정리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사랑한 대중의 박수와 눈물로 위로받았다.
콘서트에는 현미, 최희준, 정훈희, 이선희 등이 무대를 함께 했다.
그러나 길옥윤은 무엇보다도 패티김이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싶어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혼한 뒤 관계가 불편한 패티김이 방송에 출연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티김은 죽음을 눈앞에둔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수천마일을 날아와
그 어느때 보다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두사람이 결별한지 21년 만의 재회의 콘서트...
감동적인 콘서트이었다.
특히 한때 행복한 삶을 약속했지만 그 20여년 전 결별한 전 부인이자
음악적 동반자인 패티 김의 열창은 시청자의 뜨거운 눈물을 자아냈다.
길옥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다.
헤어진 건 몸이었지 마음이 아니었다”면서 ‘사랑은 영원히’를 청했다.
패티 김은 이를 열창한 뒤 20여년의 세월 무대 위에서 결코 부르지 않았다는
‘이별’을 마지막 곡으로 삼았다.
그리고 애써 눈물을 감췄다.
길옥윤은 “역시 옛 친구가 최고다”고 화답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패티 김은 분장실에서 소리 내 울었다.
길옥윤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콘서트가 끝난 후 얼마되지 않은
1995년 3월 세상과 영원히'이별'을 하게된다.
숨을 거둔 닷새 뒤 영결식에서 패티 김은 차마 끝까지 부를 수 없을 것 같다며
‘이별’ 대신 ‘서울의 찬가’를 울먹이며 불렀다
아래 동영상은 당시 '길옥윤의 이별 콘서트'의 하이라이트....
💗이별의 가사💗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잊을 수는 없을거야
잊을 수는 없을거야
(친구가 보내온 글 약간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