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은 아내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68년이 되는 날이다.
예전 같았으면 달력에 큰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고, 별표와 하트도 그려 넣었을 테지만, 오늘 서재 왼쪽 벽에 걸린 달력에는 그런 표시 하나 없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 아내의 생일이 오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여 놓고 출근하곤 했다.
아내는 아침 잠이 많아 내가 출근한 뒤에야 일어나기 때문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 그래서 그날도 내가 끓여놓은 미역국을 아내가 혼자 늦게 일어나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집에서는 부인의 생일날 누가 미역국을 끓이는지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은 부인이 직접 끓인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하면, 친구들은 "그럼 내가 끓여야하니, 하면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떤 집은 장모님이 끓여 오시기도 하고, 또 어떤 집은 남편이 직접 끓인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아내의 생일에는 직접 미역국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끓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내가 깰까 봐 까치발로 부엌에 나가 미역을 불리고 조심스레 국을 끓였지만, 제대로 된 맛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유튜브 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요리책에 나온 레시피만을 따라 했기 때문에 기대한 맛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요리를 거의 해본 적이 없어 서툴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아내가 만든 맛을 닮고 싶었다.
어느 해에는, 아내의 생일날 아침에 자고 있던 아내에게 미역국 끓이는 것에 대하여 이것저것 묻다가 아침부터 귀찮게 한다며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끓여 먹을 테니 이제 끓이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미역국 끓이는 걸 그만두었다.
그 뒤로는 미역국 대신 저녁에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케이크를 사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촛불을 끄며 생일을 축하했다.
이 땅에 아내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배우자이자 아이들의 좋은 엄마로 자리를 지켜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선물로는 약간의 돈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
아내는 내가 선물을 사는 것보다 봉투에 돈을 담아서 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내가 여성들의 취향에 둔감해서 신혼 초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선물을 준비했지만 아내는 그런 물건보다 실용적인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봉투를 건네는 것으로 정했다.
우리가 서울 강동구 둔촌아파트에 살던 시절의 일이다.
어느 해 아내 생일날 아침에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고 싶어 베란다의 국기봉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출근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당황한 얼굴로 “오늘이 제헌절도 아닌데 무슨 태극기냐”며 나를 나무랐다.
아파트 주민들이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서 “제헌절이 아닌데 왜 국기를 달았느냐”며, 남편이 날짜를 착각한 것 같다고 말하더란다.
우리 아파트는 한 동에 100세대가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만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니 눈에 띄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이 당신 생일이고, 우리 가족에게는 국경일만큼 기쁜 날이니 국기를 달았다”고 설명했다.
아내는 “창피하다”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좋아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아파트에 사는 동안 아내 생일이면 나는 어김없이 국기를 달았다.
이듬해에도 주민들이 묻자 아내는 “남편의 이벤트”라고 답했고, 사람들은 “멋지다”, “우리 남편은 그런 용기 없다”고 하면서 부러워했단다.
“마누라 생일날 태극기를 게양하는 건 미친 짓이다.”라고 했지만, 나에게 우리 가족의 생일은 그만큼 특별했다.
오늘도 그때 일이 문득 떠올라 웃음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닭살 돋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겐 생일이 중요했다. 특히 아내의 생일은 더 특별했다.
반면에 내 생일은 늘 무덤덤했다.
식구들의 관심조차 부담스러워, 미역국이 준비돼 있어도 피하고 학교로 향했다.
그때는 사춘기였던 것 같다. 의미 없는 반항에 매력을 느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엄마와 동생들이 내 생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나는 혼자 멀어졌고 생일날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사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찾아온 것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그런 반항을 시작했었다.
그 시절엔 가족보다 나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가족들에게 미안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일까, 이후부터는 생일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어떤 이는 “자신이 태어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 땅에 태어난다.
설령 예상치 못한 탄생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는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생일’이라 부르며 소중히 여긴다.
생일은 누구에게나 귀하고 특별한 날이다.
지금 아내는 내 곁에 없지만, 이 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생일은 살아 있을 때만 기억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살아 있을 때나 하늘나라에 가서 지금 내 곁에 없을지라도 아내의 생일은 언제나 소중한 날이고 기억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의 생일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함께한 날들의 추억은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7월 13일이 되면 아내를 생각하고, 함께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감사한다.
비록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아쉽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그립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