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明代)의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의 형식
―사차무역(私茶貿易)을 중심으로―
글 : 촌안(村顔) 박영환(文學博士)
( 현,中國 四川大學 西藏硏究所 客座敎授 )
二. 사차무역(私茶貿易)
사차(私茶)는 명나라 정부의 주관 아래 시행되었던 다마무역(茶馬貿易:즉,官辦貿易) 《다담(茶談)》2004년 겨울호에 게재. 이외, 차상(茶商)이 중심이 되어 민간에서 행해졌던 사차무역(私茶貿易)이다. 사차무역은 명나라 멸망까지 계속되어졌으며, 특히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金牌制度)의 폐지 이후에는 더욱 창성(昌盛)하여, 마침내 관판무역(官辦貿易)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명대 중·후기(中·後期)에는 장족지구(藏族地區)와의 다마무역에 있어서 기본형식이 되었다. 명대 사차무역(私茶貿易)의 흥성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원인은 변진관리가 중앙정부 몰래 사사로이 장구의 번족과 무역왕래를 한 것이다. 명조(明朝) 서삼변(西三邊)은 주로 그 지역의 관할 다마사(茶馬司)에서 차관(茶館)을 직접 관리하였음으로 직권의 남용(濫用)이 용이했다.
예를 들어, 금패(金牌)를 주어 장구(藏區)로 차엽(茶葉)을 운반하거나 혹은 조정(朝廷)의 명의(名義)를 거짓으로 내세워 장구(藏區)에서 멋대로 공사(公事)를 집행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았고 다마사(茶馬司)의 차엽(관에서 공적으로 전매)과 함께 불법적인(私的販賣) 차엽 판매를 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준다거나, 혹은 형편없는 차엽을 다마사(茶馬司)에서 비축하고 있는 역마용(易馬用)의 우량(優良)한 차엽과 몰래 바꿔치기를 하기도 하였다.
또는 호시(互市) 중에 다마무역에 지불되어야 할 차엽을 가지고 열등한 말(劣等馬)로 교환해버리기도 하였고, 그리고 대량의 여분(餘分)의 차엽을 멋대로 유용(流用)하여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등,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웠다. 문헌에 의하면 당시 변진(邊鎭)의 관리(官吏)들이 장구(藏區)와 개인적으로 교역(交易)한 무역량을 보면 실로 대단히 가관이었다.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에는 세도가나 탐관오리 등이 불법적으로 자행한 사차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다. “부마도위(駙馬都尉) 구양윤(歐陽倫)은 사차(私茶)를 판매한 일이 발각되어 사사(賜死)를 받았다. …… 윤(倫)은 일찍이 가족을 파견하여 섬서(陝西)를 왕래하며 차(茶)를 판매하고, 물건을 국경 밖으로 밀반출하여 팔게 했으며, 세도(勢道)를 믿고 횡포를 일삼았다.……윤(倫)의 가족 중에 주보(周保)란 자는 횡포가 더욱 심 했는데,포정사사(布政使司)를 핍박하여 차(茶)를 실어 운반 할 수레 50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明太祖實錄》卷253,(洪武三十年 六月 己酉條)。
이 일은 후에 태조(太祖)에게 알려지고, 태조는 대노(大怒)하여 布政使司(布政使司)에게 그 일을 보고하지 않은 죄(罪)를 물어 부마도위(駙馬都尉) 구양륜(歐陽倫)과 함께 사사(賜死)하였으며, 구양윤의 가족인 주보(周保) 등도 모두 주살하고, 그들의 차화(茶貨)는 모두 관(官)에서 몰수하였다. 前揭書,卷253,(洪武三十年 六月 己酉條)。
선덕(宣德) 8년(1433년) 정월(正月)에는 또 섬서(陝西) 공창부통판(鞏昌府通判)이었던 적림(翟霖)이 변방 관리들의 사차(私茶)로 저지른 부정부패(不正腐敗)를 조정에 상세히 보고하였는데,《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공창위(鞏昌衛) 도치위첨사(都指揮僉事) 왕수(汪壽)는 거짓으로 점사(店社) 5백여 칸을 짓고, 거짓으로 사차(私茶)를 금지하였습니다.
동관(潼關) 등 처에 군민객상(軍民客商)들을 풀어 청홍의 비단과 베를 가지고 입관하여 판매토록 합니다. 또한 금패(金牌)를 주어 말을 사게 하고, 내관(內官) 등은 사화(私貨:밀수품)를 가지고 입번(入番:番地로 入境)하여 번인들이 팔려는 말의 가치를 감소시킴으로써 사마(私馬)로 바꾸었습니다.―즉 자신들이 소유한 사마(私馬)를 정부에 팔았다는 뜻― 또 한 번인(番人:서장인)들로 하여금 마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예물(禮物)을 가지고 방문하도록 강요하였다.
번관(番官)이 내놓은 말의 수(數)가 적을 때에 이르러, 사마(私馬)의 수는 오히려 많으며, 그 대금 또한 혼동하여 지급합니다. 속이는 폐단(弊端)이 많으니, 청컨대 모두 금지시키소서.” 《明宣宗實錄》卷98,(宣德八年 正月 庚午條)。
정통(正統) 10년(1445년) 9월에 이르러, 섬서(陝西) 우포정사(右布正使) 王暹(王暹)은 번지(番地:티벳땅)와의 다마무역(茶馬貿易)에서 역마수(易馬數:차와 교역한 말의 수)가 부족한 원인을 변방관리(邊防官吏)들의 사차(私茶) 행위에 있음을 지적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내용을 《명영종실록(明英宗實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섬서우포정사(陝西右布政使) 왕섬(王暹)이 또한 말하기를: 매년 차를 운반하여 번지(番地:藏區)로 들여갈 때, 조주(洮州) 등 삼위(三衛)의 군관들이 왕왕 사차(私茶)를 가지고 들어가, (조정의) 차가(茶價)에 손해를 끼치니, 마수(馬數:易馬數)가 부족합니다.” 《明英宗實錄》卷133,(正統十年 九月 壬申條)。
특히, 명조말(明朝末)에는 국력이 나날이 쇠약(衰弱)해지고, 다법(茶法)과 마정(馬政) 또한 느슨해지자, 각 변방의 관리들은 이를 틈 타, 사적인 교역으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일차적으로 상인(商人)들의 손을 거치게 한 후, 고가(高價)로써 국가에 판매하는 수법으로 중간폭리(中間暴利)를 취하였다. 명조관리의 이러한 부정부패(不正腐敗)는 명대의 차법(茶法)과 마정(馬政)을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사차무역(私茶貿易)이 흥성하게 된 두 번째 원인으로는 장구(藏區)와 인접한 지역의 군인·민간인들이 정부(政府)의 사차금지(私茶禁止)에도 불구하고 몰래 장구(藏區)를 드나들며 그들과 무역왕래를 한 데 있다. 이러한 무역활동은 상호간의 생활 수요(需要)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이러한 상호 간의 수요 충족(需要充足)은 바로 이들이 사차무역(私茶貿易)을 하게 된 그 기본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변경의 한족지구에 사는 군인과 민간인은 지역적인 이점(利點)을 최대한 이용해, 가까운 곳에서 바로 자신들의 편리함을 구하려 했고, 좋은 차엽(茶葉)을 비축해두었다가 장구(藏區)의 우량마(優良馬)를 정부의 복잡한 유통과정 및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교환하는 간편함과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두었던 장구(藏區)의 우량마는 내지(內地)에서 온 상인들에게 고가(高價)로 판매함으로써 다시 대량의 차엽(茶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확보한 차엽을 다시 장구(藏區)의 농(農)·유목민(遊牧民)들과의 교역을 통해 장구(藏區)의 각종 토·특산품(土·特産品)을 쉽게 구하여 생활에 보충하였으며, 동시에 장구(藏區)의 농·유목민(農·遊牧民)들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생활에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차엽을 부분적이나마 명나라 조정의 까다로운 절차 없이도 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차무역(私茶貿易)은 사천(四川)과 섬서(陝西)의 각 변경(邊境)에서 비교적 빈번히 이루어졌다.《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에 보면 사차(私茶)를 엄격히 금지시켰던 홍무 연간(洪武年間)에도 공공연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섬서(陝西) 각처의 군민(軍民)들이 이따금씩 하(河)를 건너와 마필(馬匹)을 팔았다.” 《明太朝實錄》卷230,(洪武二十六年十二月己亥)。
영종(英宗) 때에 이르러서는 그 사차(私茶)의 정도가 더욱 심각하였다.《명영종실록(明英宗實錄)》에 의하면 정통(正統) 13년(1448년), 섬서(陝西) 조주다마사(洮州茶馬司)에서 올린 사차(私茶)에 관한보고는 당시 사차(私茶)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섬서 조주다마사(洮州茶馬司)에서 보고하기를‥본 다마사(茶馬司)의 차엽의 정액(定額)은 3년에 한 번씩사천(四川)에서 수거하는 관차(官茶)인데, 번마(番馬) 3천 필을 살 수 있습니다만, 아직 완전히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근년(近年)에 인근(隣近) 府·衛(부·위)의 군민(軍民)들이 사차(私茶)를 판매 거래하는 자들이 많아졌음으로, 이로 인해 차산지(茶産地)에서 세차(細茶:좋은 차)는 다투어 (개인적으로)판매해 버리고, 조차(粗茶:거칠고 나쁜 차)는 官(관)에다 납품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明英宗實錄》卷163,(正統十三年 二月 辛酉條)。
이와 같이 사차(私茶)의 심각성이 날로 더해지자, 세종(世宗)의 가정(嘉靖) 12년(1533년),순안섬서감찰어사(巡按陝西監察御史) 곽기(郭圻)는 차법(茶法)에 관한 개혁안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상소를 올렸는데,《명세종실록(明世宗實錄)》에 상세히 전한다. 그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차(私茶)의 판매를 근절시켜야합니다. 차호(茶戶)는 매번 새 차(茶)를 따서 발로 밟아 방형(方形:사각형의 덩어리)으로 만들어 가지고 장구(藏區)로 몰래 잠입(潛入)하여 번족(番族:서장인)과 무역을 하여, 관시(官市)가 방해를 받게 되니, 마땅히 다스릴 방법을 모색해야합니다. 《明世宗實錄》卷147,(嘉靖十二年 二月 庚子條)。
이상의 문헌기록으로 보아, 사천(四川)·섬서(陝西) 각 변경(邊境)의 군민(軍民)들은 번마(番馬)를 몰래 바꾸어 상인들에게 파느라 해마다 헛되이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리라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明史》卷八一,〈食貨志〉,頁215。記載:“竊易番馬,以商販,歲無虛日” ,
세 번째 원인은 중국 내지(內地)의 상인들이 변경(邊境)의 장구(藏區)로 들어가 무역을 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의 장구에서의 무역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된 만큼, 대단히 번성하였다. 내지의 상인들이 장구에서 들어가 무역한 차엽(茶葉)의 대부분은 주로 납부하는 양초(糧草) 糧草(양초): 軍糧(군량)과 馬草(마초:말의 사료)。 중에 포함 된 차엽과 관부(官府)에 차엽을 운반해주고 그 보수로 받은 차엽이였다.
상인들은 대략 두 가지의 경로를 통해 장구(藏區)에서 무역을 하게 되는 데, 그 첫째 경로는 각 종의 수단을 이용하여 차엽을 대량으로 비축해 놓았다가, 私茶禁止制度(私茶禁止制度)가 약간 느슨해지면 곧 바로 장구로 몰래 들어가 장구(藏區)의 부족(部族)들과 직접무역(直接貿易)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경로는 장구(藏區)와 인접한 지역의 관리를 통해 간접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경로와 방법으로 상인들이 장구(藏區)에서 무역해서 얻은 마필(馬匹)은 그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보아도 대단히 우량마였다. 명나라 조정(朝廷)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비록 깊이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양마(良馬)를 얻기 위해 명초에는 섬서(陝西)·감숙(甘肅) 등지에 다마사(茶馬司)를 설치하고, 상인들을 모집하여 말을 상납하게 하여 변방으로 보내고, 그들에게는 茶(차)로써 보상해주기도 했었다. 그 후, 정통(正統) 7년(1442년)에 이르러 섬서(陝西)·감숙다마사(甘肅茶馬司)는 폐쇄하였다.《明英宗實錄》卷88,(正統七年正月庚午條)。記載:“革陝西·甘肅茶馬司。初,設茶馬司收茶,召商納馬 給邊,以茶償之。”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섬서·감숙다마사의 폐쇄 후에도 여전히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마필(馬匹)을 수집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경태(景泰) 6년(1455년)에 이르러 관군의 경비용(警備用) 말(馬)이 시급히 필요하자, 서둘러 납마자(納馬者)에 대한 규정을 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때는 납마(納馬)의 대가로 차엽(茶葉)이 아닌 중염(中鹽)의 인(引)을 주었다.
* 中鹽(중염):宋太宗 때에 商人들로 하여금 쌀을 京師(서울)로 옮기게 하고, 그 代價로 소금을 주 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中鹽(중염)’이라고 한다. 明代에도 이 制度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일 명, ‘開中’이라고도 한다.《中文大辭典》(臺北,中國文化大學出版,民國79年9月8版),卷1의 440 面,卷9의 950쪽。
* 引(인): 明淸 때, 食鹽(식염)의 계산 단위로써, 100근 짜리 50마대를 1引(인)이라 했음.
《명대종실록(明代宗實錄)》에 의하면, “상등마(上等馬) 1필에 35인(引), 중등마(中等馬)에 30인(引), 하등마(下等馬)에 25인(引)”을 주었다.
《明代宗實錄》卷252附73,(景泰六年 四月庚子條)。記載:“官軍提備用馬爲急。……開中鹽一十萬引, 仍定則例:納馬者,每匹上等馬三十五引,中等馬三十引,下等馬二十五引。”
이상에서 보듯이 명대의 상인 중심의 민간사차무역(民間私茶貿易)은 명대의 전체시기에 있어 관(官) 주도의 관판무역(官辦貿易)과 늘 병행하게 되었다. 당시의 명나라 조정은 비록 민간의 사차무역을 엄격히 금지하긴 했지만, 그러나 민심이 부합된 사차무역방식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민간사차무역의 생명력은 실로 대단히 강력했다. 더군다나 명나라 중기(中期)에 이르러 국력은 점차 쇠약해져, 기황(饑荒)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미(賑恤米)의 마련과 변진(邊鎭)의 군대(軍隊)에 군량미(軍糧米) 조달하기 위해서는 차(茶)의 운반을 상인들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었으며, 사차무역(私茶무역)도 적당히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명나라 조정은 사실 다른 것을 돌볼 틈조차 없었다. 따라서 상인 위주의 민간사차무역(民間私茶貿易)은 날로 흥성해지기 시작하였다.
불암산 자락에서 촌안(村顔) 합장
출처:<<다담>>2005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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