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한다(自言)7-거짓말, 거짓된 삶
내 평생에 거짓말을 한 회수가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너무 많아서 기억도 할 수 없고 추산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수없이 많이 거짓말을 했을까?
<거짓말하지 말라>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명령이다. 이것은 명령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동시에 조건 문장으로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언명령>이다. 1797년에 쓴 논문 「인간애에서 거짓말할 가정된 권리에 관하여」에서 그는 강력한 어조로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거짓말할 권리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가피한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들이 있다고들 한다. 예를 들어, 말기 암 환자를 대하는 의사가 그 환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함으로써 환자의 심리를 좀 더 안정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진실성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엄청난 비극적 결과가 온다고 해도, 거짓말하지 않아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 불가피한 거짓말조차 진실성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칸트와 동시대인인 콘스탕의 기본적인 견해는 우리의 상식과 많은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콘스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의무이다”라고 하는 도덕적 원칙이, 만일 유일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취해진다면 모든 사회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거짓말을 아주 많이 해왔고 지금도 그러하지 싶다.
거창하게 칸트나 콘스탕을 거론하기 전에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엄밀하게 몇 가지 동기에 비롯한다.
첫째, 그리고 가장 많이 나의 이해利害즉 나의 이익을 위하든지 아니면 손해를 모면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것에 속하는 거짓말은 많이는 하지 않는 편이다.
둘째, 선의의 거짓말이다. 친구든 누구든 타인을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다.
셋째,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 즉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일 것이다.
넷째, 자기의 속내와 달리 표현하는 거짓말,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고 엉뚱하게 다른 방식으로 말해버리는 것. 일설에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본심(ほんね)을 밖으로 말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다섯째,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타인의 기분에 어긋나지 않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다. 상대방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70세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거짓은 어떤 것일까?
나는 내 스스로 자존自尊하지 못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를 꾸미거나,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남에게 과시하거나, 나를 자랑하려는 의도를 갖고 말하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타인의 눈에 맞게 나를 재단하려고 애써 온 경우는 수없이 많다.
나는 나에 대한 나 자신의 평가보다 늘 남의 시선을 더 중요시하고 의식해 왔다.
스티브 잡스는 ‘타인의 목소리가 본인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지 많도록 할 것‘을 주문했다.
남에게 보이는 생활이 나를 채우는 삶보다 소중할 순 없음에도 나는 왜 그랬을까?
제임스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유일한 가치를 찾아 삶을 빛나게 하도록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공자께서 가르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나는 늘 자신감이 부족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나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 내가 옳다고 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다.
남의 지식과 남의 주장에 눈치 보며 나의 생각과 주장을 거두었다. 어쩌면 타인이 나를 멸시하고 싫어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이든 내 생각과 주장이 있음에도 타인의 그것에 동조하여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언제나 변명을 동반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몸이 아파서 자주 결석을 했다. 선생님께서 학생이 아프니까 방과 후에 가끔 내 하숙집으로 찾아오셨다. 하루 종일 아프다가 저녁때만 되면 아프지 않았다. 참 난처하고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결석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변명했다. 그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다.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과목과 공부 내용이었다.
지금도 몇 번인가 꿈에서 나는 어릴 적 거짓말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위눌린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것이다. 큰 형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빵을 사 먹고 그날 저녁 부엌일을 돕는 먼 친척 누이가 큰 형에게 의심을 받아 추궁을 당하는 동안 나는 기어코 자백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자신에게 매우 편리하고 적절하게 이용된다. 자기 충족적인 근거(?)를 만들어낸다.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으로 이끄는 동인이기도 하다.
허구로서의 언어, 거짓말도 정확히 언어이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구성하고 지배하는 핵심 요소이다.
‘ 수리 수리 마하수리’라는 주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본래의 뜻이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지극한 길상존이시여’이지만 의미와 무관하게 기복의 언어로 쓰인다.
아폴로 신전은 파르나소스 산기슭에 자리한 도시 델포이에 있다. 제우스가 동쪽과 서쪽에서 두 마리의 독수리를 풀어주었더니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와서 다시 만난 장소이다. 제우스가 그곳을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옴팔로스omphalos;배꼽’라 부르며 돌을 놓아 표시하고 아들인 아포로가 머물 곳으로 정했다.
아폴로의 여사제들인 피티아pythia는 ‘아폴로의 호흡’이라고 솔직히 대마초처럼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를 태운 연기를 들어마시고 독백을 토해놓으면 조수가 그것을 해석하여 아포리즘 형식의 짤막한 시詩로 전해주었다. 델포이 신전의 예언들은 항상 모호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기대나 희망에 맞춰 해석했다. 바꿔 말해 사람들이 델포이의 신탁에서 얻은 것은 예언이라기보다 ‘자기 충족적인’ 피그말리온 효과를 겨냥한 일종의 주문인 것이다.
정신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정신을 만든다.
엄밀히 말하면 델포이 신전의 예언들은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허구의 언어이다. 신전을 찾은 이들이 스스로 원하고 소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을 구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엄밀한 정의를 하자면 허구와 거짓은 동의어가 아니다.)
자신의 바램이 감정을 따라가게 하고 감정은 거짓을 지어내고 거짓말이 거짓된 정신을 만든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 Sence and Sensibility」은 차분하고 분별 있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엘리너와 감정에만 치우쳐 주변을 배려할 줄 몰랐던 메리앤 두 자매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성과 감성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면서 인간 삶의 소중한 양면적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역작이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법구경 비구품 20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我自爲我 計無有我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한다. 나밖에 따로 주인이 없다).
성 베르나르도 말하기를 ”나 자신 외에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했다. 나의 언어가 아닌 거짓으로 점철된 나의 생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거짓에 대응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ti estin aletheia?’
진리를 두 가지 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삶에 관한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요,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라 말하는 것은 거짓이요, ∽라 말하는 것은 참이다“라고 사실과 언어를 구분하고, 참이나 거짓이 될 수 있는 대상은 사실 자체가 아니고 언어라고 밝힌 것은 위대한 판단이다. 요컨대 세계 자체에는 진리도 거짓도 없다. 진리와 거짓이란 우리의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다.
그러나 예수가 이야기한 진리, 곧 그가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라고 한 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길(道)에 대한 진술‘이다. 이 진리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나 사실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이고, 인간은 이 진리가 실현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
거짓말 대장인 나지만 평생 사실에 부합하는 정직한 말을 하려고 애썼으며, 예수가 말한 진리, 즉 삶의 길과 공자가 말한 도道를 따르려고 노력해왔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과 행동이 내 바램과 일치하지 못했음이 솔직한 고백이다. 이것이 내가 거짓말쟁이인 진정한 증명이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밝혔듯이, 아폴로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 이성적인 것, 즉 균형·조화·절제·지식을 추구하고 다스리는 신이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 감성적인 것, 즉 도취·무질서·본능·광란·열정을 다스리는 신이다. 요컨대 아폴로는 로고스logos를, 디오니소스는 파토스pathos를 본성으로 한다.
그런데 당시 초기 그리스 사람들은 로고스를 합리적 '이성' 또는 '참된 언어'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짓말'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진리를 대변하는 신의 언어로 인정했다. 그때가 신화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초한 행동에 반해서 의무에 의해 결정되는 행위는 이성적이다. 사람에게는 자율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하는 이성적인 능력이 있어 그것에 의해 도덕적 행위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인 이론이성과 구별되는 실천이성이다. 다시 말해 실천 이성은 본능·충동·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그것에 따르도록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동물적 감정을 발견해 이후 감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기쁨·슬픔·분노·욕망·불안 등의 정념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내부에서 폭발한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나는 생각과 행동이 무질서하며,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아마도 나는 아폴로보다 디오니소스파에 속하지 싶다.
감정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곧 사람의 여러 가지 느낌을 이르는 말이다. 칠정七情은 《예기》, <예운>편에서 말하는 사람이 갖는 여러 감정들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싫어함惡. 바람欲의 감정들이다.
밝은 빛인 이성에 견주어보면 감성적 욕망이나 정념은 어둡고 맹목적인 힘이다.
나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또 이성을 불신하며 감정에 치우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나의 비이성적인 삶의 행적을 변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삶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누군들 거짓말하고 살겠는가. 아! 또 변명!
첫댓글 사람은 누구나 할것없이
대동소이할거로 생각하네만
모두들 어떻게 생각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