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적 싸움을 하지 말고, 영적 싸움을 하라(에베소서 6:10~17)
(에베소서 6장)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묵상/ 엡 6:10-17)
◆ 영적 싸움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의 간계'는 치밀하고 광범위한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마귀는 세속적인 쾌락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고상한 학문으로 접근하기도 하고, 전통이나 관행이란 이름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여럿이다.
'통치자들과 권세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통치하는 자들에게 순복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범위 안에서다. 만일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우리의 믿음을 거스를 때, 더는 순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란이나 혁명을 꾀하지는 않는다. 반란이나 혁명은 영적 싸움이 아니라,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핍박하는 자들에게 칼과 몽둥이로 대항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기에 못 박히고, 사자의 밥으로 던져지고, 생매장 당하는 수모를 감내했다.
우리 눈에는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믿음을 포기하면 살 수 있음에도 거절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그것은 치열한 영적 싸움의 모습이다. 자존심 상하게 했다고 복수를 꾀하는 자는 혈과 육으로 싸우는 자이지만, 그것을 통해 내 교만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손을 깨닫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선언하는 자는 영적 싸움을 하는 자들이다.
마틴 루터 킹이 차별받는 흑인들을 데리고 평화 행진을 했을 때, 백인들은 계란과 토마토를 던지면서 조롱했다. 그때, 흑인들은 ‘당신들은 우리를 미워해도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국 흑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던 백인들은 자신들이 인간 이하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양심이 그들의 행동을 돌이키도록 했다. 그들은 영적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아주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과 그 양상을 달리함을 잊지 말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 마귀를 의미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들은 마귀의 종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점점 악하고 타락한 세상으로 이끄는 존재들이다. 왕일 수도 있고, 철학자일 수도 있고, 대단한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다. 이들이 세상의 권력으로 교묘하게 속이고, 힘으로 짓누르려고 해도 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영적 싸움의 모습이다.
이제 영적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어떤 것일까?
◆ 진리로 허리띠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했다. 당시에 전쟁하는 군인들은 허리띠를 묶지 않으면 옷이 거추장스럽게 되어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다. 성도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의 말씀은 ‘복음’과 ‘교회’다. 이 두 진리는 마차의 양 바퀴와 같다. 이것이 정립되지 않은 성도는 늘 세상 철학과 각종 이론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두 진리는 확고해야 할 것이다.
종종 성도 중에는 ‘우리 목사님은 틀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만일 그런 믿음이 목사의 가스라이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당장 그 교회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것처럼 위험한 믿음이 없다. 인간은 오류투성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조차 순간적으로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예수님께 꾸짖음을 받았었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신앙생활 하면서 그동안 유명한 목사, 신학박사, 선교사들의 글과 말 중에 후에 오류로 드러난 것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열거하자면 글이 길어질까 생략한다.
나는 함께 성경 공부를 하는 형제들에게 나는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후에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음을 인지시킨다. 어떤 교파든 자기 교회 지도자는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집단이다.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으며, 해석은 다양할 수 있기에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해석의 여지가 없는 성경 말씀도 수없이 많음을 잊지 말자.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용납할 수 없다.
◆ 의의 호심경
호심경이란 갑옷의 가슴 쪽에 붙이던 호신용 구리 조각이다. 화살이나 칼에 찔려서 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의의 호심경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엡 5:9)에 있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성도들의 심장은 의를 기뻐한다.
◆ 복음의 신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는 말씀은 성도의 의무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모든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에게 먹힐 것이다. 직접 전하기 어려우면 직접 전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우라. 오늘날 성도들은 지독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을까 두렵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사 56:10)
◆ 믿음의 방패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의 보이스피싱에 당한 교인들을 무수히 봤다. 멀쩡하게 신앙생활 잘하던 어떤 자매가 어느날 갑자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의심이 더럭 들어서 신앙이 냉각되는 것을 보았고, 충성 봉사하던 친구가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 단지 예수님을 안 믿었다고 천국에 못 가는가?’라는 의문이 걸림돌이 되어서 수년간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 하고 헤매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일리 있는 해석을 해주어도 마귀의 보이스 피싱에 당한 사람들은 편집증 증세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벗어나길 원하지만 쉽지 않다. 애초에 믿음의 방패로 막았어야 하는 마귀의 화살을 그대로 방치해서 몸에 맞았으니 쉽게 치료되기가 어렵다.
헛된 이론, 헛된 의심이 내 생각에 스며들어오면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방패를 사용하는 예다. 가령 당장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오면 단호히 자신을 꾸짖고 외쳐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구원의 투구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요 15:4)라고 명하셨다. 늘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계명 즉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기도하자.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셨을 때도 언제나 ‘기록되었으되’(마 4:4)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을진대, 하물며 우리들이랴! 적어도 말씀을 암송해야 ‘기록되었으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젊었을 때, 암송을 많이 해두는 것이 좋다. 늙은 후에는 암송 한 구절 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을 아는 것으로는 마귀와 싸우기에 충분하지 않다. 암송하라. 그래서 ‘기록되었으되’를 단호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마귀가 어림도 없는 말로 보이스 피싱할 때, ‘기록되었으되’를 외치고 단호히 물리치는 성도는 복이 있다!
주님,
제가 영적 싸움을 제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전신 갑주를 제대로 갖추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를 단호히 물리치고 말씀에 바로 서게 해주십시오.
[출처] 엡 6:10-17 / 육적 싸움을 하지 말고, 영적 싸움을 하라|작성자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