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2 도마복음 말씀 21-2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
21.2 이를 좇아서 내가 말하노니 집주인이 도적이 올 줄 알면 그가 올 때까지 지키고, 그의 물건을 빼앗아가도록 자기 왕국의 집이 뚫리지 않게 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ⲕⲟⲥⲙⲟⲥ 코스모스)의 시작(ⲉϩⲏ 에히)에서부터 깨어있어라. 도적들이 다가올 길을 찾지 못하도록 강한 힘으로 허리를 동여매라. 왜냐하면, 너희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 돕게 되면(ⲧⲉⲭⲣⲉⲓⲁ ⲉⲧⲉⲧⲛ̄ϭⲱϣⲧ⳿ ⲉⲃⲟⲗ ϩⲏⲧⲥ̄ 테크리아 에테티엔조오쉐티 에볼 히테스) 그들은 그녀에게 빠지게 될 것이기(ⲥⲉⲛⲁϩⲉ⳿ ⲉⲣⲟⲥ 세나헤에로스 They will fall upon her) 때문이다. 총명한 그가(ⲟⲩⲣⲱⲙⲉ ⲛ̄ⲉⲡⲓⲥⲧⲏⲙⲱⲛ 우로메 엔에피스티몬 a human of understanding) 네 중심에(ϩⲛ̄ ⲧⲉⲧⲛ̄ⲙⲏⲧⲉ 헨 테텐미테, in your midst) 오게 하라. 열매가 익었을 때, 그는 손에 낫을 들고 속히 나가서 그것을 수확할 것이다. 그에게서 들을 귀 있는 자는 그에게서 들어라!
21.1 ⲡⲉϫⲉ ⲙⲁⲣⲓϩⲁⲙ ⲛ̄ⲓ̅ⲥ̅ ϫⲉ ⲉⲛⲉⲕⲙⲁⲑⲏⲧⲏⲥ ⲉⲓⲛⲉ ⲛ̄ⲛⲓⲙ⳿ 21.2 ⲡⲉϫⲁϥ⳿ ϫⲉ ⲉⲩⲉⲓⲛⲉ ⲛ̄ϩⲛ̄ϣⲏⲣⲉ ϣⲏⲙ⳿ ⲉⲩ[ϭ]ⲉⲗⲓⲧ⳿ ⲁⲩⲥⲱϣⲉ ⲉⲧⲱⲟⲩ ⲁⲛ ⲧⲉ 21.3 ϩⲟⲧⲁⲛ ⲉⲩϣⲁⲉⲓ ⲛ̄ϭⲓ ⲛ̄ϫⲟⲉⲓⲥ ⲛ̄ⲧⲥⲱϣⲉ ⲥⲉⲛⲁϫⲟⲟⲥ ϫⲉ ⲕⲉ ⲧⲛ̄ⲥⲱϣⲉ ⲉⲃⲟⲗ ⲛⲁⲛ 21.4 ⲛ̄ⲧⲟⲟⲩ ⲥⲉⲕⲁⲕ ⲁϩⲏⲩ ⲙ̄ⲡⲟⲩⲙ̄ⲧⲟ ⲉⲃⲟⲗ ⲉⲧⲣⲟⲩⲕⲁⲁⲥ ⲉⲃⲟⲗ ⲛⲁⲩ ⲛ̄ⲥⲉϯ ⲧⲟⲩⲥⲱϣⲉ ⲛⲁⲩ 21.5 ⲇⲓⲁ ⲧⲟⲩⲧⲟ ϯϫⲱ ⲙ̄ⲙⲟⲥ ϫⲉ ⲉϥ⳿ϣⲁⲉⲓⲙⲉ ⲛ̄ϭⲓ ⲡϫⲉⲥϩⲛ̄ⲏⲉⲓ ϫⲉ ϥⲛⲏⲩ ⲛ̄ϭⲓ ⲡⲣⲉϥϫⲓⲟⲩⲉ ϥⲛⲁⲣⲟⲉⲓⲥ ⲉⲙⲡⲁⲧⲉϥ⳿ⲉⲓ ⲛ̄ϥⲧⲙ̄ⲕⲁⲁϥ⳿ ⲉϣⲟϫⲧ⳿ ⲉϩⲟⲩⲛ ⲉⲡⲉϥⲏⲉⲓ ⲛ̄ⲧⲉ ⲧⲉϥ⳿ⲙⲛ̄ⲧⲉⲣⲟ ⲉⲧⲣⲉϥϥⲓ ⲛ̄ⲛⲉϥ⳿ⲥⲕⲉⲩⲟⲥ 21.6 ⲛ̄ⲧⲱⲧⲛ̄ ⲇⲉ ⲣⲟⲉⲓⲥ ϩⲁ ⲧⲉϩⲏ ⲙ̄ⲡⲕⲟⲥⲙⲟⲥ 21.7 ⲙⲟⲩⲣ⳿ ⲙ̄ⲙⲱⲧⲛ̄ ⲉϫⲛ̄ ⲛⲉⲧⲛ̄ϯⲡⲉ ϩⲛ̄ⲛⲟⲩⲛⲟϭ ⲛ̄ⲇⲩⲛⲁⲙⲓⲥ ϣⲓⲛⲁ ϫⲉ ⲛⲉ ⲛⲗⲏⲥⲧⲏⲥ ϩⲉ ⲉϩⲓⲏ ⲉⲉⲓ ϣⲁⲣⲱⲧⲛ̄ 21.8 ⲉⲡⲉⲓ ⲧⲉⲭⲣⲉⲓⲁ ⲉⲧⲉⲧⲛ̄ϭⲱϣⲧ⳿ ⲉⲃⲟⲗ ϩⲏⲧⲥ̄ ⲥⲉⲛⲁϩⲉ⳿ ⲉⲣⲟⲥ 21.9 ⲙⲁⲣⲉϥϣⲱⲡⲉ ϩⲛ̄ ⲧⲉⲧⲛ̄ⲙⲏⲧⲉ ⲛ̄ϭⲓ ⲟⲩⲣⲱⲙⲉ ⲛ̄ⲉⲡⲓⲥⲧⲏⲙⲱⲛ 21.10 ⲛ̄ⲧⲁⲣⲉ ⲡⲕⲁⲣⲡⲟⲥ ⲡⲱϩ ⲁϥⲉⲓ ϩⲛ̄ⲛⲟⲩϭⲉⲡⲏ ⲉⲡⲉϥⲁⲥϩ ϩⲛ̄ ⲧⲉϥϭⲓϫ ⲁϥϩⲁⲥϥ 21.11 ⲡⲉⲧⲉ ⲟⲩⲛ̄ ⲙⲁⲁϫⲉ ⲙ̄ⲙⲟϥ⳿ ⲉⲥⲱⲧⲙ̄ ⲙⲁⲣⲉϥⲥⲱⲧⲙ̄
21.1 마리아가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것이 아닌 밭에 떠돌고 있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밭 주인들이 와서 “우리 밭을 차지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들의 밭을 그들에게 주려고 그들 앞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로기온 21을 10 혹은 11절로 나누기도 하나, 나는 편의상 두 개의 단락, 두 개의 절로 나눠 해석하려 한다. 로기온 21-1에서 예수는 마리아에게 제자들의 정체성을 남의 땅을 여행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다. 땅 주인이 왔을 때 옷을 벗고 땅을 돌려주는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주인이 있는 밭을 버리고, 혹은 땅을 돌려주고 비로소 자기 세계를 얻는다. 더는 노예로, 노예 도덕으로 살지 않는다. 타자가 주인인 세계를 버렸다. 자신이 주인이 되는 세계를 얻는다. 그러므로 21-2는 주인이 달라졌다. 내가 나의 세계의 주인이다. 내 집의 주인은 나다. 하여 이제 그 집의 주권(ⲛ̄ⲧⲉ ⲧⲉϥ⳿ⲙⲛ̄ⲧⲉⲣⲟ 엔테 테프멘테로 of his kingdom, reign of king)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1절 밭의 주인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slave owner(주인)요, 여기 집의 주인은 비로소 자기 세계를 획득한 어린아이가, 자기 집을 온전히 주권을 갖고 다스리는 왕국의 집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온전히 애굽의 옷을 벗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기 땅을 분배받으니 비로소 내 땅이고 내 밭이요 내 집이다. 그곳의 주권은 내게 있다. 존재하기 전 존재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존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낙타의 옷을 벗고, 사자의 옷을 벗고, 사람의 옷을 입었다. 비로소 신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의 집을 자신이 다스린다.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왕권을 회복한 것이다.
자신의 밭에 대추 야자수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와 무화과 열매가 맺힌다. 포도나무에서 풍성한 열매를 얻고 각종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추수하게 되니 바구니가 넘친다. 부러울 게 없고, 여기가 천국이라고 흥얼거린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러 부르는 노래를 부른다. 혼자 먹을 수 없다. 이웃과 나누게 된다. 나누어도 남는다. 포도주를 담고 무화과 술을 담는다. 벗을 부르고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
여기가 또다시 경계지점이다. 나누다 보면 반드시 찾아오는 게 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 널브러져 있었던 것처럼 나도 어느 한순간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축복의 포도주가 진노의 포도주, 저주의 잔으로 바뀐다.
한순간 도적이 그 의식의 담을 뚫고 들어와 진노의 포도주에 취해 왕국을 순식간 빼앗아간다. 메데와 바사 왕국에 점령당하게 되고 네부카드네자르의 식민 백성이 되고 만다. 영지주의에 빠져 영적 지식의 유혹에 점령당한다. 도적이 찾아온 것이다. 남방 민족에게서 해방되어 해방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잠시, 다시 북방 민족에게 잡혀간다. 남방민족, 애굽의 노예 생활은 내가 타자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면, 북방 민족에게 잡혀간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속성에 빠지는 정신 현상이다.
영지주의를 앞세워 영적 지식이 구원인양 사람을 유혹하게 되고 자신의 지식으로 타인을 현혹하여 지배하려는 속성이 발동하는 것은 정신이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도적에게 탈취당하는 일이다. 진정한 생명 현상이 아니다. 생명을 다시 탈취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영적 지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한 번 비췸을 맛보고 잠시 존재의 세계에 참여했다가 다시 타락하는 현상이다(히 6장 참조). 우후죽순 솟아나는 신흥종교는 이와 같은 현상의 표출이다. 남방에서는 타인의 지배 아래 노예 도덕 속에 살아왔다. 율법과 도덕의 기준이 타인이었다.
북방에서는 뭇별 위에서 비길 자가 없다고 빛 중의 빛임을 내세우며, 두로 왕의 의식에 빠져 있는 영적 지식의 소유자가 기준이다. 늘 새로운 법과 기준을 생산하며 타자에게 강요한다. 타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인다. 남방에서는 타자에게 죽임을 당하며 죽음을 맛보는 삶을 살았다면 여기서는 자신이 타자에게 영적 지식을 명분으로, 참된 생명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지만 실은 죽음의 법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당근과 채찍을 갖고 타인을 정신의 노예로 삼으려 한다. 자신이 세상 임금이 되려는 것이다. 하늘 궁을 세우고, 증거장막성전을 세워 왕의 지위에 있으려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이같이 되어버린다. 사람의 형상을 잃고 짐승의 형상이 되어 사자가 되고 곰이 되고 표범이 되고 무섭고 두려운 짐승의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오해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순간 그리로 잡혀간다.
강한 힘으로 허리를 동여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되려 하고 그녀의 외모(숫자와 세력의 신의 미혹)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들은 겉 사람에게 빠지게 되고 포도주에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총명한 그가 마음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 와중에도 다니엘과 세 친구로 상징되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은 총명한 사람이 등장한다. 북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도 굴복하지 않는 총명의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한 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이들이 생명을 살리는 삶에 무력해지게 되고 존재의 삶, 생명 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영지주의자는 갈수록 강퍅해진다. 각각 존재의 나무로 살 수 있게 하는 데는 무기력해진다(ἀδύνατος). 히브리서 6장은 이렇게 무력한(ἀδύνατος) 자를 돌이키게 하기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번역 성서들은 한결같이 이를 반대로 번역한다.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번역하여 독자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4절 첫번째 나오는 단어, 아두나토스 (ἀδύνατος) 를 엉뚱하게도 6절 중간에 나오는 단어 회개(εἰς μετάνοιαν)하고 연결시켜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거의 모든 번역 성서들이 이점에서는 한결같다는 점에서 놀랍다.
사자의 머리를 가진 뱀 두 마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위 데미우르고스의 괴물이 된다. 영적 지식과 구원을 무기로 물질을 갈취하고 영혼을 저당 잡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의 지독한 특성이다. 북방 민족의 지혜와 지식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게 몰아닥쳐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숨죽이며 있던, 죽은 듯이 있던 총명의 사람이 깨어나야 출바빌론이 가능하다.
북방의 바빌론에 잡혀가도 비록 그 형편이 처음 애굽에서 보다 일곱 배나 더한 일곱 귀신이 그 집에 들끓고 있어도 마침내 그발 강가에서 고토를 향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은 그 중심에 아직은 맥이 끊기지 않은 지혜와 총명의 사람이 남아 있을 때 출바빌론, 귀가나안이 가능하다.
도마복음 로기온 21-1과 2. 단순히 몇 마디의 어록 자체만을 보게 되면 해석하기 쉽지 않다. 어록은 어록이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대서사를 읽어내야 비로소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로기온 21의 대서사는 출애굽, 광야, 가나안, 바벨론, 출 바빌론의 대서사 속에서 읽어야 비로소 읽힌다. 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서 들어라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콥트어 본문은 “그에게서 들을 귀 있는 자는 그에게서 들어라!”라고 한다. 그는 누구일까. 그대의 중심에 있는 총명한 그요, 자기 자신의 지성소 안에 있는 HE(him)에게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이는 곧 그에게서 들으라는 것을 강조한다.
깨달은 영성가에게서 들으려는 미혹을 물리치고, 그대 안에 머무는 그에게서 들어라. 혹여 누군가 깨달은 영성가가 있다고 하면, 그저 힌트를 얻을 수는 있되 더는 미혹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에게서 들으라는 것, 말씀 21이 전해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ⲡⲉⲧⲉ ⲟⲩⲛ̄ ⲙⲁⲁϫⲉ ⲙ̄ⲙⲟϥ⳿ ⲉⲥⲱⲧⲙ̄ ⲙⲁⲣⲉϥⲥⲱⲧⲙ̄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는 그에게서 듣게 하라(ⲙⲁⲣⲉϥⲥⲱⲧⲙ̄ 마레프소티엠, let him listen)”
그에게서 귀 기울여 듣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베드로를 떠나는 까닭이다. 그에게서 듣는 것을 도외시하고 세상 임금 예수에게서 듣고자 하는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는 베드로를 떠나 십자가를 진다. 베드로가 베드로 안에 있는 총명한 자의 소리를 듣도록 베드로를 떠났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