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답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어떠한 개별적 자리는 그 자리에 맞갖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자리에 맞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자리에 맞는 모습을 하지 않게 된다면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부모의 자리가 있고, 자녀는 자녀의 자리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교사의 자리가 있고, 학생은 학생의 자리가 있습니다.
공적인 곳에서는 각자마다의 자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리에 맞갖은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 우린 ‘~답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맞는 모습을 하지 않으면 ‘~답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다운’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리에 맞는 기준을 알고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답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자리의 기준을 잘 알고 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의 어떠한 평가는 결국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도적 기준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기준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 사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거센 돌풍’에 겁을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또 자신들은 누구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인지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겁을 먹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양한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리마다의 특성이 있고, 자리마다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보다 더 소중한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리입니다.
사회적 자리보다 더 소중하고 더 높은 자리인 이유는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이 적용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준 자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린 ‘하느님의 자녀다운’ 행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답네.’라는 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사랑’이기에 우리의 모습은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귀중한 자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글 : 최종욱 Damian 神父 – 대구 산자연중학교장
기도의 선물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신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라도 지키며 살아온 때보다 냉담했던 기간이 더 깁니다.
제 나름 여러 가지 핑계가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느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기도해 봤자 소용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마음이 얼어붙어 갔습니다. 미사도 한 번 두 번 핑계 대며 빠지기
시작하다 주일미사조차 지키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도 힘든 일이 생기면
다시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내가 믿음에서 멀어져서 벌을 주시는 걸까,
과연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할까 온갖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기도해야 한다, 하고 싶지 않다…’를 오가며 강박과 죄의식, 두려움 사이에서 제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했습니다. 기도는 점점 무거운 숙제, 불편한 의무가 되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중 미국의
마샤 리네한(Marsha M. Linehan, phd)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심리학자가 된 리네한은 수녀님을 꿈꿀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괴로운 마음으로 방황하던 시기에 신부님께 조언을
들었습니다.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고 침묵으로만 기도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따라 기도하며 경험한 것을 리네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경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기도할 때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그것은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누군가와 대화가 된다. 하지만 침묵하면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신과 하나로 존재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신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경험이라고.”
책을 읽으며 기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내 기도는 침묵도 대화도 아닌, 오직 요구 사항으로만 꽉 찬 독백이었구나.
철없는 아이처럼 조르고 투덜대는 일방적인 소리뿐이었구나.’
속사포처럼 떠드는 내 음성만 메아리칠 뿐 하느님 말씀이 들려올 틈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걱정스러운 일을 하느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의심과 불만만 가득한 투정은 아닙니다. 가끔 징징대고, 삐지고,
원망할 때가 있더라도 예전처럼 숨어버리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합니다.
‘제 수다가 좀 심해도 하느님, 이해해 주세요! 이제 좀 성장했으니
당신 말씀 들을 틈도 내어 보겠습니다. 여전히 드릴 말씀이 참 많긴 하지만요.’
참 길었던 제 믿음의 사춘기가 이제야 슬슬 끝나가나 봅니다.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조용한 아침, 초를 켜고 십자가 앞에 머뭅니다. 잠시 가만히
떠오르는 말을 기다립니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조급하게 보채지 않으려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편안합니다. 머릿속을 분주하게 오가는 생각,
걱정거리들이 등장하면 주님께 말씀드리고 맡깁니다.
이제 기도는 부담스러운 숙제가 아닙니다.
평화를 누릴 기회인 걸, 그 자체로 기쁨인 걸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요.
글 : 이경애 Angela – 상담심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