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2 도마복음 말씀 / 둘을 하나로 만드는 자(안과 밖, 위와 아래, 남자와 여자)
22.3 ⲡⲉϫⲁⲩ ⲛⲁϥ⳿ ϫⲉ ⲉⲉⲓⲉ ⟨ⲉ⟩ⲛⲟ ⲛ̄ⲕⲟⲩⲉⲓ ⲧⲛ̄ⲛⲁⲃⲱⲕ⳿ ⲉϩⲟⲩⲛ ⲉⲧⲙⲛ̄ⲧⲉⲣⲟ 22.4 ⲡⲉϫⲉ ⲓⲏ̅ⲥ̅ ⲛⲁⲩ ϫⲉ ϩⲟⲧⲁⲛ ⲉ-ⲧⲉⲧⲛ̄ϣⲁⲣ̄ ⲡⲥⲛⲁⲩ ⲟⲩⲁ ⲁⲩⲱ ⲉⲧⲉⲧⲛ̄ϣⲁⲣ̄ ⲡⲥⲁⲛϩⲟⲩⲛ ⲛ̄ⲑⲉ ⲙ̄ⲡⲥⲁⲛⲃⲟⲗ ⲁⲩⲱ ⲡⲥⲁⲛⲃⲟⲗ ⲛ̄ⲑⲉ ⲙ̄ⲡⲥⲁⲛϩⲟⲩⲛ ⲁⲩⲱ ⲡⲥⲁ(ⲛ)ⲧⲡⲉ ⲛ̄ⲑⲉ ⲙ̄ⲡⲥⲁⲙⲡⲓⲧⲛ̄ 22.5 ⲁⲩⲱ ϣⲓⲛⲁ ⲉⲧⲉⲧⲛⲁⲉⲓⲣⲉ ⲙ̄ⲫⲟ⳿ⲟⲩⲧ⳿ ⲙⲛ̄ ⲧⲥϩⲓⲙⲉ ⲙ̄ⲡⲓⲟⲩⲁ ⲟⲩⲱⲧ⳿ ϫⲉⲕⲁⲁⲥ ⲛⲉ ⲫⲟⲟⲩⲧ⳿ ⲣ̄ ϩⲟⲟⲩⲧ⳿ ⲛ̄ⲧⲉ ⲧⲥϩⲓⲙⲉⲣ̄ ⲥϩⲓⲙⲉ 22.6 ϩⲟⲧⲁⲛ ⲉⲧⲉⲧⲛ̄ϣⲁⲉⲓⲣⲉ ⲛ̄ϩⲛ̄ⲃⲁⲗ ⲉⲡⲙⲁ ⲛ̄ⲟⲩⲃⲁⲗ⳿ ⲁⲩⲱ ⲟⲩϭⲓϫ⳿ ⲉⲡⲙⲁ ⲛ̄ⲛⲟⲩϭⲓϫ⳿ ⲁⲩⲱ ⲟⲩⲉⲣⲏⲧⲉ ⲉⲡⲙⲁ ⲛ̄ⲟⲩⲉⲣⲏⲧⲉ ⲟⲩϩⲓⲕⲱⲛ⳿ ⲉⲡⲙⲁ ⲛ̄ⲟⲩϩⲓⲕⲱ(ⲛ) 22.7 ⲧⲟ ⲧⲉ ⲧⲉⲧⲛⲁⲃⲱⲕ⳿ ⲉϩⲟⲩⲛ [ⲉ]ⲧⲙ[ⲛ̄ⲧⲉⲣ]ⲟ⳿
22-2 그들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작은 자의 존재(being)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둘을 하나로 만들고 안이 바깥과 같고 밖이 안과 같으며 위가 아래와 같게 만들고 그리하여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홀로 하나(ⲙ̄ⲡⲓⲟⲩⲁ ⲟⲩⲱⲧ⳿ 엠피우아 우오티)로 만들 것이며, 남자 아닌 남자가 되고 여자 아닌 여자가 될 수 있도록, 네가 눈 대신에 눈을, 손 대신에 손을, 발 대신에 발을, 형상 대신에 형상을 만들면 그때 너희가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무슨 뜻일까.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작은 자(being)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까요?” 대답은 마치 동문서답이다. 작은 존재가 될 것인지,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를 묻는 물음에 예수는 둘을 하나로 만들고 안이 바깥과 같고 밖이 안과 같으며 위가 아래와 같게 만들고 등을 나열하고 있다. 작은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므로 그의 대답은 작은 자가 되면, 작은 자는 안이 바깥과 같고 밖이 안과 같으며 위와 아래를 같게 만드는 이라는 답변이 아니겠는가. 작은 자는 남자와 여자가 홀로 하나가 되게 한다는 답에 다름이 아니다. 이어서 열거되는 항목들 또한 작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작은 자에게 나타나게 될 모습으로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또 가능할까. 아니 가능한 일인가. 어느 때에 하나는 둘이 될까. 둘을 하나로 만들 때는 또 어느 때인가. 앞서 알곡의 비유로 설명한 바가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게 되면 하나는 둘로 나뉜다. 한 알은 씨눈과 배젖으로 분화되고 둘이 된다. 둘은 곧 배젖의 죽음과 씨눈의 발아로 둘이 하나 되는 생명 현상이 진행된다.
어느 때 둘이 하나가 될까. 동시에 둘일 때는 또 어느 때일까. 이는 생명 현상에서 읽어야 하고 또 살펴야 한다. 안과 밖, 밖과 안은 비로소 작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율법은 밖이고 외피이며 겉이요 배젖이다. 그 속은 씨 눈이며 생명이다. 생명을 둘러싼 생명 싸개가 율법이며, 그것은 겉옷이다. 생명이 꿈틀거리며 속과 겉이 분리되고 외피가 박리(剝離)되며 배젖이 와해 된다. 그리고 생명의 눈을 키우게 된다. 율법의 처음 것이 폐해지며 생명의 둘째 것이 도래한다. 그것은 폐해지며 동시에 생명의 씨눈의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폐해지면서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생명에게 흡수된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자이되 남자가 아니고 여자이되 여자가 아닌 때, 안과 밖이 하나가 되고 겉과 속이 하나가 되는 것, 다시 태어나 작은 자가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거기서 새로 태어나 홀로 하나인 모나코스(모노게네스)가 되며 위와 아래로 나누고, 큰 자와 작은 자를 나누고 안과 밖을 나누는 눈이 바뀐다. 작은 자(little ones)의 세계에는 큰 자와 작은 자를 나누는 나뉨이 없다. 남자로되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되 여자가 아니다.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은 '누가 크냐'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다. 큰 자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눈이 바뀔 때, 옳고 그름의 눈이 생명의 눈으로 바뀔 때, 선악의 오른 손을 잘라내고 생명의 손으로 바뀔 때, 선악에 발 빠른 것에서 생명의 발로 바뀔 때, 가이사의 형상, 곧 큰 자를 지향하는 마음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바뀔 때 비로소 '작은 자'가 된다. 어린아이가 된다. 아니 작은 자가 되었을 때 바로 그와 같이 된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시몬이 게바(베드로)가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다. 쌍둥이 형 에서와 대비되는 지렁이 같은 야곱에게서 큰 자 하나님과의 싸움, 그리고 그의 이김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본디 엘’(אֵל)이란 명사와 ‘겨루어 이기다’란 동사 ‘사라’(שָׂרָה)의 미완료 형태인 ‘이스라’(יִשְׂרָ)가 결합한 이름으로 ‘그가 하나님을 이기리라’는 의미다. 미완료는 ‘이겼다’가 아니다. ‘이기리라’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여 이스라엘(יִשְׂרָאֵל)의 명칭은 ‘그가(야곱 HE) 하나님을 이리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브니엘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고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 얻은 이름이다. 밤새 씨름하고 천사가 떠나면서 야곱에게 준 이름이라고 해서 그 밤에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것인가, 아니면 장차 이기게 될 것인가. 물론 그 밤에도 그는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하나님과 싸워 이기게 되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겼고, 이기게 되리라'는. 여기서 '이겼다'는 히브리어 야콜(יָכֹל)은 overcome, prevail을 의미한다. 강하여져(ἐνίσχυσας) 마침내 이기게 되었다. 하여 신약 성서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τῷ νικῶντι)를 방불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기게 될 때, 비로소 엘샤다이 하나님이 떠나가고 야웨 하나님이 계시가 된다. 야웨 하나님이란 여호수와, 호세아, 예수를 통해 계시가 된 ‘내가 나’인 하나님 곧 ‘나님’이다. 이스라엘은 그 명칭 자체가 예언이다. ‘하나님을 이기게 되리라’는 예언. 큰 자의 천국, 큰 자의 하나님을 이기는 것은 결국 작은 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큰 자는 이분법의 하나님이다. 안과 밖을 분리하고 위와 아래를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나누고 ‘누가 크냐’만을 향해 서 있게 한다.
인생은 신과의 한판 겨룸이다. 하여 저 하늘에 있는 엘샤다이 엘로힘을 마침내 땅으로 끌어 내려 패대기를 쳐야 비로소 네부카드네자르의 형상에서 야웨 엘로힘의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가이사의 형상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한다.
"나는 티끌과 먼지로소이다." 티끌과 먼지와 같은 작은 자의 고백을 통해, 짐승은 사람이 된다. 아파르이니 마침내 아파르가 되리라(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כִּֽי־עָפָ֣ר אַ֔תָּה וְאֶל־עָפָ֖ר תָּשֽׁוּב 키 아파르 아타 베엘 아파르 타슈브,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참조' 2021 刊)는 예언이 하나님과 겨뤄 이기는 곳에서 이뤄진다. 작은 자가 되는 곳에서 큰 자의 하나님을 이기게 된다. 큰 자의 신을 혁파 하는 데서 왕국이 시작된다. 작은 자의 복음이며,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 거기에 있다.
예수는 유대인의 신을 향해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미워하는 자며 마귀라고 유대인 엘로힘의 실체를 들통 내서 하늘로부터 끌어 내린다.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마침내 엘로힘과 겨뤄 이기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그가 참 이스라엘이 된다. 하나님과 싸워 참으로 이긴 자는 예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야웨 하나님을 맞이한다. 내가 나인 하나님을 온 이스라엘에 전한다. ‘내가 나인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라고. 신이 죽어야 그 죽은 자로부터 신이 살아난다. 예수는 형상 대신에 형상뿐만 아니라, 신 대신에 신을 우뚝 세운 분이다. 둘이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는 당위(當爲)로는 하나(Single One)가 되게 할 수 없다.
작은 자는 이분법을 극복하는 길이다. 남자와 여자를 보더라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남자로되 남자가 아니요, 여자로되 여자가 아니다. 그 모두가 각기 홀로 하나다. 남자도 홀로 하나의 눈으로 보고 여자도 홀로 하나의 눈으로 본다. 언제나 큰 자가 되려는 눈이 이것과 저것을 나눈다. 큰 자의 눈을 빼어버려야 한다. 눈 대신에 눈을 손 대신에 손을 발 대신에 발을 형상 대신에 형상을 만들 때, 비로소 작은 자가 되고 그가 왕국에 들어간다.
로기온 114에서 남자와 여자에 대해 다시 살피게 될 것이다. 여자가 남자가 된다는 것과 로기온 22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본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은 자칼과 네케바(남자와 여자)로 창조된다. 그 정신의 세계에 이 둘이 항상 함께 있다. 생물학적인 남성에게도 그 정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에게도 그 정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다. 칼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얘기하지 아니한다 해도 생명의 세계에는 늘 이 둘이 함께한다.
아담도 나요, 하와도 나다. 내 안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야기 속 설명 방식이다. 생명 나무도 마찬가지여서 생명 나무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다. 남자와 여자도 정신 현상을 설명하는 비유다. 비유는 실체가 드러나면 더는 비유 언어가 아니다.
작은 자의 복음 도마복음은 혁명의 복음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