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가 춤춘다 / 문윤정
커다란 티베트 명상 주발(Tibetan Singing Bowl)이 탁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좌종이라고도 하는데 저음의 장중한 소리가 특징인 소리 도구이다. 막대기로 가볍게 명상 주발을 치자 장중한 소리가 공기 속으로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명상 주발이 공명하여 내는 소리는 완만하지만 공기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어떤 에너지가 느껴진다. 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여음餘音의 꼬리는 길게 이어지다가 멈추지 않는 듯이 멈춘다. 명상 주발의 공명과 파동은 내 마음속에도 그렇게 파동치다가 점점 잦아든다. 여음은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서 가늘게 떨린다.
명상 주발을 이용하여 소리 명상에 들어갔다. 스님이 주발을 치면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내쉬면서 한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옴~~~' 소리를 낸다. 이는 명상의 한 가지로 '옴명상' 이라 한다. '옴(AUM)'은 우주 태초의 소리이며,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이라 하여 신성한 언어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런 신성한 소리를 단전을 통하여 토하듯이 공기 중으로 내쏟는 ‘옴명상’ 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옴’이라는 음에는 소리를 의식으로 바꾸어 주고 의식은 소리로 바꾸어주는 우주의 근원적인 소리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스님은 가슴까지만 숨을 들이쉬고서 '옴' 소리를 내뱉으라고 했지만, 나는 길게 소리를 내고 싶어 단전 호흡을 했다. 우주를 들이마시듯 숨을 들이쉰 다음 내 안의 모든 찌꺼기를 쏟아낼 듯이 그리고 짜내듯이 ‘옴’을 길게 내뱉었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발산하듯 ‘옴’ 소리를 내면 낼수록 내 의식의 심연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느낌이다. 점차 머리가 맑아지고 잡념이 사라졌다.
붓다는 “우리의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고 했다. 명상 주발의 울림에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옴' 소리를 내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호흡과 호흡 사이의 시간이 그다지 짧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흡과 호흡 그 사이에 과거와 미래를 몇 번이나 오고 갈지 모르는 일이며, 선사들의 말에 의하면 깨달음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도 가능한 것이다. 주발이 내는 소리를 끝까지 주시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한 호흡 사이를 들여다보는 반복된 행위는 마치 주문과도 같았다. 어떤 명상보다도 집중하기가 쉬웠다. 스님은 '파동이 신체 내부에 전달되어 잠재된 긍정적인 에너지를 각성시켜준다'고 했다.
주발의 진동음을 끝까지 주시하다 보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잡다한 생각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무념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를 일러 우주의 진동파와 합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쇠소리는 자연계의 많은 소리 가운데 가장 빛에 가깝다고 한다. 쇠소리에는 각성의 기운이 있어 초보자라도 쉽게 집중할 수 있단다.
스님은 이전과는 다르게 좀 더 강하게 연달아 주발을 쳤다. 넓고 깊은 주발의 공명은 공기 속에서 파도타기 하듯 넘실넘실 대더니 급기야는 내 온몸을 감싸고 큰 파동을 일으켰다. 파동은 곧장 내 가슴을 열고 붉은 심장 속에서 요동쳤다.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던 심장은 그런 리듬을 잃어버린 채 물속의 잉어처럼 마음대로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주발의 소리에 내 온몸은 강한 진동에 휩싸였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몸으로 소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소리가 내 온몸을 마사지하듯 너울거리면서 몸 주변을 에워쌌다. 소리가 강한 만큼 여음은 길게 이어졌다.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된 것일까? 이 시간이 조금만 더 길게 이어진다면 황홀경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주발의 진동은 서서히 잦아들고 격렬하게 떨었던 내 몸과 심장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처음 체험하는 것이라 놀랍고 신비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파울로 보르치니' 가 이끄는 현악4중주단이 연주하는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처음으로 들을 때가 생각난다. ‘파울로 보르치아니' 가 담배를 물고 있는 고독하고도 우수에 젖어있는 자켓이 마음에 들어 집어 들었던 음반이다. 그런데 음악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음반을 CD플레이어에 넣고 몇 초 후 흘러나오는 첼로의 둔중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현과 활이 서로 강하게 마찰하여 만들어진 음률이 활동사진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음률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춤추는듯한 활의 놀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자, 첼로의 활이 내 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더니 붉은 심장을 악기인 양 그 위에서 활달한 춤을 추대하는 것이 아닌가.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 몸은 첼로가 되어 활이 내 심장을 켤 수 있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현은 점점 내 심장을 파고들고 난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꼼짝하지 않고 온몸으로 소리를 받아들였다.
광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비바체로 흐를 때면, 활의 격렬함은 살을 파고드는 듯 심장은 통증으로 터질 것 같다. 그러다 음이 차츰 잦아들고 아다지오로 흐르면 내 심장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평온을 되찾는다. 통증도 기쁨으로, 아픔도 희열로 다가오는 이 주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그 느낌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나에게 주었다. 그때는 '소리 명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지만 내가 온몸으로 음악을 듣고, 느끼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소리는 귀로, 눈으로, 가슴으로 듣는다. 그리고 닫혀있던 온몸의 세포와 모공까지도 활짝 열고 소리를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다. 온몸의 세포까지도 행복에 잠겨있었던 시간, 그 시간을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