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권 시집 『적막한 저녁』(밥북, 2023. 1. 6)
■ 표4
비가 내리고 어둠이 저녁의 꼬리를 물고 가던
유월 어느 날 나는 그대를 찾아가다
넘어지고 말았다
기적 소리가 울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사방엔 연초록의 흔들림만 분명한데,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대를 찾아가다 넘어지고 말았다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가다
비의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비가 내리고 꽃이 졌다는 건
한 사람의 영혼이 길을 떠났다는 뜻이다
달을 꿈꾸던 꽃의 심장 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영혼이 어둠의 건너편을 향해 손을 흔든다
적막한 저녁이 저물고 있다
-「적막한 저녁」 전문
■ 차례
서시 _ 화양연화
제1부
마량에 가야 한다/모기사냥/우표 없는 편지/곱빼기는 안 팔아요/모논/적막한 저녁/어느 환경운동가의 죽음/슬픔변경선/오후 세 시의 낮달/그대, 지리산으로 가라/신 사랑가/마지막 김장/아그배나무 세 그루가 있는 풍경/정치인의 자격/첫 키스/첫사랑/초침에서 분침까지/반달의 사랑
제2부
주상절리에 가야 한다/처녀 장례지도사 선미 씨/마지막 광부/등을 읽었다/빈집/펜혹을 벗다/하얀 민들레의 귀환/개 같은 날의 아침/별에서 온 여자/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결/활화산/나팔꽃 소녀에게/나비의 꿈/응답하라 1991/청량리시장 홍두깨 칼국숫집/2월의 별빛 사리/함박눈
제3부
달이 돌아왔다/사랑의 마피아/오우도/최초의 꽃빛/우리는 지금 청령포역으로 가야 한다/진달래꽃 필 무렵/꽃춘기/물고기의 변명/종점/진달래꽃의 변명/소금 연인/아버지의 꼬리/바람난 유월/달이 기울다/하얗다/명자꽃의 비밀/이름의 의미/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릉역에 내리면/자아와 초자아 사이
제4부
희망을 파는 사월/두부 장수/소쩍새를 조문하다/밑장 빼기/그늘/정암사 적멸보궁에 비가 내리면/평창 오일장/61년생 김영호에게/부르지 못한 별의 노래/봉투/밥 한번 먹자/바람의 사형수/독獨, 毒/검룡소 가는 길/불/비자림/몽유도화도/마지막 인사
■ 시집 속의 시 한 편
등이 닿았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인생의 무늬가 새겨진
그 사람의 등에서 물고기가 파드득거렸다
사람의 온도를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등에서도 별 냄새가 났다
말 한마디 없어도 수많은 말이 오고 갔다
등을 맞댔는데 심장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등이 맞닿은 동안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무늬가
그대로 카피되어 내 등에 새겨졌다
이렇게 빨리 한 사람의 일생이
건너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의 등으로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가 읽고 있는 시집 속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 녹고 있었다
-「등을 읽었다」 전문
■ 서시
화양연화
까마득한 공중에서
연분홍 꽃잎 한 장 날아와
내 가슴에 닿았다
노을이 부드LOVE게 출렁거렸다
삶이 꽃이 된 이 순간,
이젠 아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김남권
경기도 가평 출생.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타는 학의 날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등.
첫댓글 김남권 시인님의 시집 『적막한 저녁』 출간을 마음 깊이 축하드립니다. 시인님의 문학 행보가 이리도 환하네요. 지금 이 순간 화양연화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좋은 날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