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1가해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코 9,30-37)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람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하느님에게도 관심 없다>
어느 성당에 가건 조금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신자분들이 한둘씩은 있습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었을 때 한 자매님이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미사 중간에 항상 씩씩하게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며 비키라고 하고 미사 분위기를 부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 특별히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해서 사제가 담배 피우는 것만 보아도 바로 빼앗아서 발로 밟아버렸습니다. 그분은 버스를 탈 때도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 내려가 달리는 버스를 세워 잡아 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교구에서도 유명한 분으로 통했습니다.
많은 신자는 그분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심지어 소리까지 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분을 보면 궁금해집니다.
‘왜 저렇게 되셨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보고 알았는지, 아니면 그분을 잘 아는 분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분은 매우 똑똑한 분이었고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여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담뱃불로 학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그분이 가엾게 여겨지고 회복되시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본당 사제로 온 이후에는 매우 차분해졌다는 소리를 들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끝내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나오기 싫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판단만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께 관심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술품에 관심이 없으면서 예술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하는 묵상에 관심이 전혀 없으면서 저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는 말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서 성체 성사엔 관심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성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배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배에서 태어나 평생 배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듯 자신이 아는 세계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을 알아야만 하는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엔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당시 누구나 볼 수 있는 성물방 책방 코너에 꽂혀 있었지만, 그 책을 빼서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묵상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으면 내가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면 효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이를 먼저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만드신 작은 것들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알기 위해 질문을 던져봅시다.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