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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5대 교리
서론 진행되는 내용은 석원태 목사의 구원의 5대 교리를 해설한 것이다. 서론에 나오는 "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자세히 읽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이 배경은 기독교 역사에서 정통적 신앙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 교재에 나오는 "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읽고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기독교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생각하면 구원의 5대 교리와 정통 기독교 사상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있게 느끼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복음시대
복음시대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이 세상을 찾아와서 복음을 전한 시대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복음을 3년 동안 전하였는데, 이 기간을 그의 공생애라고 하며, 그와 함께 일어난 사건들은 4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시대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도시대(A. D. 27-100)
사도시대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한 후 그의 제자들로 인하여 엮어지는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수하였고, 전도의 방법도 가르친다. 그의 제자 12명은 스승이 승천한 후 그에게서 전수 받은 복음과 그의 생애에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전하게 된다. 이 시절을 기독교 역사가들은 사도시대라고 한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점차 범위를 넓혀 전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들도 예수님처럼 제자 양육에 힘을 쏟는다.
사도란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붙여지는 고유한 명칭이다. 사도시대는 사도 요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사도 후시대( A.D.100-313)
사도들은 갔으나 기독교의 복음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직접 듣고 배운 제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전파된다. 이 시대를 속사도 시대 혹은 사도 후시대라고 기독교 역사는 말하고 있다.
사도 후 시대는 사도 요한의 별세에서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할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로마 정부의 10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며, 기꺼이 목숨을 주님께 바치는 순교의 시기이다.
둘째, 많은 이교적이며 이단적인 사상의 공격을 받고, 교회는 바른 믿음의 도리를 확립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많은 기독교 관계서적들을 발간하였고, 또 많은 진리논쟁을 통하여 진리를 확립한다. 사도의 뒤를 계승하여 교회의 발전을 도모한 인물들 중에 후세까지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들을 교부라고 한다.
이 때에 활약한 교부들 중 몇 사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글레멘트는 성경(빌 4:3)에도 그의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폴리캅은 서모나 교회(계 2:8)의 감독으로써 사도 요한의 제자이다.
바비아는 히에라볼리(골 4:13) 교회의 감독으로써 역시 사도 요한의 제자이다.
허마는 성경(롬16:14)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니케아 회의시대(A. D. 313-590)
사도 후시대가 지나면 기독교 역사는 니케아 회의시대(A. D. 313-590)로 진입한다. 니케아 회의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한 분이 아니라 유사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의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는 기독교 세계 대회의(大會議)를 말하며, 이때의 주역은 [아다나시우스]이다. 이 때를 기하여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가 확립되기 시작한다.
중세시대(A. D 590-1517)
니케아 회의 시대가 끝나면 중세 시대의 막이 열리는데, 기독교의 중세 역사는 초대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즉위로부터 시작하여 루터의 종교개혁까지를 말한다.
그레고리 1세는 서방 교회의 교부로써 최초로 로마 교황이라고 자칭한 인물이다. 그는 오늘의 천주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범한 과오 중 가장 큰 것은 연옥설을 신앙의 한 조목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연옥에 대한 논쟁은 그 전에도 있었으나 그레고리는 "작은 죄는 심판 전에 연옥의 불로서 정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로 구원된다"고 하므로 연옥설을 정식으로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는 시작부터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시작하였고 결국 [속죄표] 판매라는 일대 오점을 남기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낳는다.
속죄표란 13세기 때부터 전해지던 공적축적(功積蓄積)의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써 실제로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교황 [레오] 10세가 포고한 것이다.
이때 독일 지역에서 실제 모금의 책임을 맡은 인물은 뎃젤(Johann Tetzel)이며 그는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조상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간다]고 선전을 하면서 속죄표를 판매하였다. 이와 같이 중세시대의 기독교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로 간주되며 암혹시대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비성경적인 사상 때문이다.
종교개혁(1517- )이 암혹한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종교개혁이라는 형태로 인류역사에 등장한다.
1517년 10월 30일 "마틴 루터"는 비덴베르그의 캣슐 교회(Castle Church) 북쪽 문에 95개조의 항의서를 게시한다.
항의서의 내용은 속죄표의 부당성과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교황청에 토론을 요청한 토론 제목들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있을 때, 스위스의 쥬리히(Zurich)에서 쯔빙글리(Ulrich Zwingli)가 역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본래 루터와는 관계없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시대적 배경이 속죄표와 관계가 있는 때인지라 그도 역시 속죄표를 문제를 삼았다. 그의 개혁은 루터보다 더 진보적이어서 지금의 개신교와 통하는 점이 많다.
이들과 동시대의 개혁자 존 칼뱅(Jhon Calvin)은 스위스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전개한다.
그는 1533년 10월 1일 그의 친구 니콜라스 곱(Nicholas Cop)이 파리대학 학감 취임연설문을 초안하면서 그의 개혁의지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학교당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파리를 따나게 된다. 그는 파리남쪽 앙굴남(Angouleme)에 머물면서 기독교강요를 저술한다(1535. 8 완성).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이며, 이것은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앙노선(장로교)이 되었다. 그후 그는 제네바로 가서 본격적으로 개혁사업에 착수한다.
세계역사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높이 평가하지만 기독교 사상적 입장에서는 마틴 루터의 사상은 완전한 개혁이 아니다. 다만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천주교의 중간지대라고 평가하면 옳을 것이다. 루터의 가장 핵심적 주장은 이신득구(以信得救)이다. 그래서 루터교의 신앙노선은 [오직 믿음으로]이다. 매우 좋은 신앙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노선을 선도한 칼뱅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구원을 위한 성도의 노력보다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루터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을 주장하였다.
우리 교회의 주보 표지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표어가 있는 것은 바로 개혁주의 노선의 구호이며 이런 신앙을 본받고 계승하는 교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개혁자의 공통점은 "성경으로 돌아가자"이다. 교황을 비롯한 천주교가 너무 성경을 왜곡하여 그릇된 신앙을 전파하였기 때문에 성경을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다시 찾기 위해서 이다.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종교 개혁이라고 평할 수 있다.
문예부흥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이 전하여 준 순수한 복음을 찾는 운동이 교회 안에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사건으로 전개되는 동안, 일반 사회에서는 문예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문예부흥운동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인본주의운동이다. 즉 지금까지 신권통치를 받고 있던 인간의 영역을 인간들이 다시 찾아보겠다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몫을 찾겠다는 운동은 일반 사회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결국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알미니안주의 운동이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이다.
<해설>
지금까지 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동기를 교회사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이제는 [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소개할 차례이다. 교재가 없는 독자들을 위하여 [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 본문을 소개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강해는 반드시 구원의 5대 교리 책을 필요하겠지만 교재를 구입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하여 본문 전체를 녹색으로 표시하여 올리기로 한다.
<본문>구원의 5대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
프랑스의 위대한 개혁자「존·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역사에 전무후무한 정통기독교 교리를 체계화시킨 자이다.
그것은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의 행정, 성도의 신앙생활, 인간사회 생활 전반에 걸친 위대한 개혁이었다.
성경중심주의와 영역주권적(領域主權的)인 개혁의 물결은 전 구라파에 파급되어 로마 카톨릭은 힘을 잃고, 개혁주의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대의민주제도(代議民主制度)아래 교회와 사회는 다 방면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개혁주의의 위대한 유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항상 마귀와의 전투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제네바를 깃점으로 절대주권 사상과 성경정치(Bibiocracy)를 정착시켜 놓고 개혁주의 교회를 이끌어가던 칼뱅이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소천(召天)된 후 약 40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1603년경, 장소는 네델란드였다.
당시 네델란드는 가장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개혁주의의 본산지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의 한 관리 출신인 "코른헤르트"(Coornhert)라는 자가 나타나서 칼빈주의의 "주권", "예정" 등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정부에 올렸던 것에서 사건은 터지기 시작했다.
정부와 국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격이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칼빈의 수제자「베자」(Deodre Beza)는 분개했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자기와 개혁주의를 같이 해온 화란신학교 교수「알미니우스」(James Arminius)를 불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코른헤르트를 찾아가 진상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알미니우스는 즉시 진상에 나섰다. 그리하여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었다.
그런데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코른헤르트의 글을 읽고 알미니우스가 그만 감동을 받아 버렸으니 말이다.
이제 알미니우스는 총 뿌리를 칼빈주의 쪽에 돌려대고 난사하기 시작했다.
「절대주권은 잘못되었다. 예정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아주 타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고 선택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이다.....」라고.
칼빈주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어처구니없는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칼빈주의는 진통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에 환란이 찾아 든 것이다.
그리고 1609년 알미니우스는 죽었다. 그가 죽은지 일년후인 1610년,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들, 곧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ists)들은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5개의 반항의 글을 발표했다.
1) 인간은 완전 타락하지 않았고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자율구원성).
2)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고 선택하였다(예지예정 및 조건선택).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만인구원).
4) 성령의 은혜는 충분히 저항 할 수 있다(자유의지).
5) 구원 얻은 사람도 잘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궁극적 구원 실패가능).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의 5대 항론(Remonstrance)이다.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자랑스럽게 지켜오던 화란 정부와 교회는 이러한 반대에 부딪혀 그냥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화란의회는 세계적인 종교회의를「돌트」(Dort)라는 도시에 개최하기에 이르렀다(1618. 11. 13).
스위스, 영국, 신성로마제국, 독일 등 각지에서 온 27명의 사절과 84명의 교회지도자, 그리고 18명의 정부 고위층이 참가한 대 회의였다.
이것이 돌트총회(Synod of Dort)이다.
회의에서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 5대 항론을 면밀히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다.
7개월간에 걸쳐 총 154회기를 거듭한 결과는 당연히 칼빈주의의 승리였다.
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가장 흉악한 이설(異說)임을 확인했다.
드디어 만장일치로 5대 항론을 기각시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을 세위기로 했다. 그것은 차제에 칼빈주의를 확고히 하는 어떤 강령(綱領)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미니안주의 5대 항론에 대치되는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을 작성, 채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1619. 5. 9).
이렇게 해서 알미니안주의는 정죄를 받고, 주모자들은 처형을 시켰다. 그리고 추종무리들은 모두 국외로 추방시켰다. 그 잔존자들이 후에 영국으로 건너가 명맥을 유지하다가,「요한·웨슬레」(John Weskey)가 그 일파에 감명을 받고 알미니안 주의자가 된 후, 마침내「감리교」(Methodist)를 창설하기 이른다.
우리는 보통 이 5대강령을 속칭「칼빈의 5대 교리」라고 하지만 이상과 같은 역사를 통해서 그것이 칼빈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또한 이 5대 강령은 칼빈주의 사상의 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이 알미니안 주의 5대 항론에 의거한 상대성 때문에, 바로 '칼빈주의 기본원리'라고 단정하기에 곤란하다.
칼빈주의 기본이념은「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다.
그러면 이 5대 강령은 무엇인가?
이것은「구원에」대한 칼빈주의 입장을 밝히는「구원론적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 교재의 제목을「구원에 대한 5대 강령」혹은「구원의 5대 교리」라고 다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니, 그것은 칼빈주의의 전체 사상에 대한 오해를 막고, 또한 구원의 도리(道理)를 좀더 평이하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칼빈주의를 집이라고 할 때 절대주권 사상은 주춧돌이요 5대 교리는 그 위에 세워진 다섯 기둥에 비유할 수 있다」
<해설 1>이상 서문에서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으리라.
칼빈주의는 하늘에서 시작하였으나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에게서 시작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장로교)와 알미니안 주의(감리교)는 출발이 다르고 신앙의 방향도 정 반대이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신본주의인데 반해 감리교는 인간의 주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예정론에서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과 예정을 믿으나 감리교는 인간의 선행을 근거한 예지예정을 믿는다. 구원론에서 장로교는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의 부르심에 의하여 죄인이 회개하여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믿으나 감리교는 인간의 자기 결단과 선행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해설 2>알미니안 주의와 요한 웨슬레
한가지 부연할 것은 화란에서 추방된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왜 영국으로 건너갔고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하여 알미니안 주의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국 국교회는 크게 두개의 파가 있다. 첫째는 고교회파이고, 둘째는 저교회파이다. 이 두파 중에서 개혁을 인정하면서 개혁주의를 수용하려는 파는 저교회파이며, 개혁을 싫어하면서 로마 천주교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파는 고교회파이다. 이들은 정권과 야합하여 개혁주의자들에게 심한 핍박을 가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에서 개혁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알미니안 주의를 옹호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월리암 로오드 (William Laud, 1573-1645)이다. 이 사람이 화란에서 열린 돌트회의에 영국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는데, 그는 칼빈주의에 반대하고 알미니안 주의를 찬성하였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를 옹호하면 영국 국교회가 로마 천주교로 복귀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 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로오드의 이런 판단 때문에 영국 국교회는 알미니안 주의를 옹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는 고교회파의 사제였기 때문에 알미니안 주의자가 된 것은 자연스런 귀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