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다 ●지은이_장세현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3. 5. 13
●전체페이지_136쪽 ●ISBN 979-11-91914-39-9 03810/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여기와 저기, 수면 위에 새긴 무늬 같은 시편들
장세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다』가 1991년 첫 시집 출간 이후 만 32년 만의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고백하듯 “시보다 중한 게 밥이고 목숨이었”기에 시는 “나중의 일이 되”었다. 따라서 비록 삶은 ‘오선지 위에서 추는 춤처럼 아슬아슬했’지만 시편들은 정제되고 갈무리되어 여기와 저기, 수면 위에 새긴 무늬같이 애잔하면서도 깊다.
나는 12월로 갑니다//마음을 앓기에는/사랑만한 게 없습니다//아무래도/우리 사이는 11월//그대는 가을 같고/나는 겨울 같습니다//봄이고 여름이던 시절은/함께 설레었으나/이삿짐 꾸리듯/낙엽은 이미 졌습니다//12월이 된 나는/홀로 추울 예정입니다/겨울에도 자라는 나무처럼/꿋꿋해야겠습니다//옹이를 새기며/단단해지기에는/이별만한 게 없습니다
―「11과 12 사이」 전문
“마음을 앓기에는/사랑만한 게 없”다면서 사랑의 아픔을 긍정할 줄 알게 된 세월, “옹이를 새기며/단단해지기에는/이별만한 게 없”(「11과 12 사이」)다고 아픔을 수용할 줄 알게 된 세월이 지나갔다. 그 사이 “죄를 사해 줄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런 여자는 엄마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나를 그린 나」)는 자신을 고백할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는 “고요히 합장이나” 하면서 “내 속에 젖은/눅눅한 것들 꾸덕꾸덕 말리”(「불멍」)는 담담함에 이르고 있다. “글썽이는 웃음”과 “흐느끼는 웃음”(「호호 웃음 깔깔 웃음」)이라는 아픈 역설은 그가 이른 어떤 지경에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가 들어간 호리병 속을 세상은 결혼이라 불렀다 주둥이가 좁은 병 속은 질식하기 좋았다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진 순간 결단코 병을 깼다
탈출한 새는 남겨둔 알에 날개가 묶였다 부화된 알은 새병아리가 되어 자랐다 사금파리에 먹이를 물어다 놓고 멀찍이 지켜보는 새가 아버지인 줄 알았으나 아버지라 부르진 않았다
아픈 손가락이 되어 무심히 가슴을 톡톡 쪼아 구멍을 냈다 황소바람이 새어 들어와 시리고 아팠다 쪼는 부리의 힘은 갈수록 세졌다 차라리 프로메테우스처럼 바위산에 올라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했다
―「다 빈」 부분
시인의 결혼 생활은 여의치 못했다. “좁은 병 속” 같은 생활이었고, “호흡곤란으로 위독해진 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좁은 호리병을 탈출하지만 “탈출한 새는 남겨둔 알에 날개가 묶였다”. “남겨둔 알”, 남겨둔 자식이 “아픈 손가락이 되어” 자주 “무심히 가슴을 톡톡 쪼아 구멍을” 낸다. 그 구멍으로 “황소바람이 새어 들어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말라야상품이다
누가일부러말한적없는말을
몸이안다
삶을연기하는무대위를걷자면
그래야한다
외로움만살이쪄서뚱뚱하다
―「그 여자의 거식증」 전문
고향에서와 달리 “삶을연기하는무대위를” 걷는 도시적 삶에 대한 회의가 그를 자꾸 고향 쪽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연로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아픈 동생이 있는 고향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으리라. “멸시를 받아도 부지런하니 살았고/구박을 받아도 인정이 많으니 살았고/천대를 받아도 골목 할멈들의 환대”(「오줌이 울었다」)가 있어 척박한 삶을 살아내신 어머니, “몸속에 노란 피나 파란 피가 흐를지 모르는/그것은 집안에서 기르는 짐승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스스로를 가둔 우리 속에서 꾸무럭거리다/가끔 우리 밖으로 뛰쳐나와 집안을 분탕질했고/흉한 짐승의 말을 토하는 살덩어리로 늙어”(「아버지의 이름표」)가신 아버지, 그리고 어린 나이에 죽어 상여도 없이 떠나간 고향 친구의 무덤이 있는 곳, 그곳이 시인의 고향이다.
“세월을 아무리 건너도 열여섯의 나는 여전히 우울한 얼굴을 목에 매달고 골목을 서성이고 있”(「그날 골목에」)으니 귀향하지 못하는 날마다 “나는 내가 가여워 나를 품고 잠들었지/뱀이 된 내가 꿈꿀 수 있도록/꿈에서 다시 꿈을 꾸고 환생할 수 있도록”(「독」) 자신을 채찍질하였으리라. 또한 “가짜 미소에 홀린 아수라판의 세상/모나리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며 예수의 십자가 유언을 거리마다 게워냈다”(「모나리자」)거나 “고장 난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고장 난 라디오/세상이 보내는 신호를 잡는 안테나가 망가진 라디오를 버려야겠”(「고장 난 라디오」)다고 하는 것처럼 부조리한 현실 사회와 인간 정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놓치지 않는다. 마음의 고향을 잃은 자본주의 사회, 인간의 몸마저 상품화된 현실에 대해 통쾌한 주먹질을 날리는 것이다.
틈이 있어야 숨을 쉰다/틈이 있어야 움이 튼다//틈은 곧 생명
―「틈」 부분
“틈은 곧 생명”이다. 틈은 “수만 리 걸어온 바람과/수만 리 걸어갈 바람을/안아주고 배웅하는 문앞이”고 “씨앗”이다. 삶의 오선지는 여전히 위태롭지만 시인은 그동안 중심을 잡아줄 잔근육이 늘었다. 시 농사 32년 만에 수확을 하는 이번 시집은 시인이 살아온 삶의 고백이자 또 살아갈 숨통인 셈이다. 그래서 막막함 속에서도 틈을 발견하고 틈을 만들어 스스로도 숨을 쉬게 한다. “잉태를 꿈꾸”고, “모든 것들 포옹”하는 “숨구멍”은 시를 읽는 독자들의 숨통까지도 틔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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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제1부
불멍·11
11과 12 사이·12
초승달·14
구렁이 불알맛·16
오줌이 울었다·18
호호 웃음 깔깔 웃음·20
까마귀네 아저씨·22
아버지의 이름표·24
모나리자·26
물의 마음·28
그 여자의 거식증·29
독·30
나를 그린 나·33
연애 불량자·34
그날 골목에·36
제2부
1회용·41
비 오는 밤의 크로키·42
맑은 물에도 물때가 낀다·43
심장 정원·44
다 빈·46
엄마의 바다·48
까치 두 마리·50
비멍·52
말로 그린 마음 스케치·54
헤어질 결심·57
독서하는 잠·58
틈·60
파도, 치다·62
도형이 기억의 연대기·64
제3부
압력밥솥·69
무의도, 섬 사이에·70
홀로 영화관에서·72
불임일기·74
변신 도마뱀·75
빗살무늬토기의 추억·76
요술쟁이 말의 집·78
전교 1등의 신화·80
초난도 선장 박 씨·83
고장 난 라디오·84
소의 뿔·86
형용 모순의 시대·88
자동식 센서·90
흐린 밤의 일기·92
모래시계·93
거울 보는 여자·94
제4부
로망스·99
슬픈 머리핀·100
엄마의 손·101
고독에 대하여·102
멍든 날·103
나도 예쁜 똥을 누고 싶다·104
손톱을 깎다가·106
목구멍에 떨어진 포도알·108
손가락 편지·110
토마토를 먹는 순간·112
뻥튀기에 대한 명상·114
회상·115
시당(詩堂)에 시주(詩主)를 모셔라·116
서점 산책·119
협재 포구에서·120
발문│김주대·123
시인의 말·135
■ 시집 속의 시 한 편
부끄럼이 많았다 암사내라 불렀다 어스름을 등짐처럼 지고 오는 엄마 품속으로 숨곤 했다
가족의 굴레는 천형이거나 어느 전생의 벌인지도 모른다 죄를 사해 줄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 여자는 엄마밖에 없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나를 상실한 나는 숨 쉬면서 죽었다 숙명을 거스른 탈출은 또 다른 섬으로의 고립이었다 억울해, 억울해, 목구멍에 걸려 넘어진 말은 무릎이 깨져 울었다
먼저 살아야 했다 독을 품은 짐승마냥 침을 꼿꼿이 세웠으나 세상 앞에 서면 마냥 부끄러웠다 간혹 제 살을 물어뜯은 상처의 피로 낭자했다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나를 그린 나」 전문
■ 시인의 말
삶의 오선지 위에서 추는 춤은 늘 아슬아슬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였다. 시보다 중한 게 밥이고 목숨이었다. 시 같은 건 나중의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학 4년, 이른 나이에 첫 시집을 냈다. 시는 아득한 안갯속의 섬 같았다. 그 섬에 가고 싶었지만 배도 없고 노도 없었다. 젊은 시절, 맨몸으로라도 헤엄쳐 가고자 몸부림쳤으나 힘에 부쳤다. 가뭄에 콩 나듯 간간이 썼던 시가 세월의 더께로 쌓이다 보니, 이처럼 그럴싸한 변명의 말을 쓰는 날을 맞았다. 두 번째지만 마치 첫 시집처럼 설렌다.
삶의 오선지는 여전히 위태롭지만 중심을 잡아줄 잔근육이 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몸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쉬이 늙지 않는다. 그 섬을 향해 풍덩 몸을 던져도 좋겠다.
2023년 봄
장세현
■ 표4(약평)
얼마 만에 나오는 시집인가. 오래 참았던 숨을 내뱉듯 곰삭은 목소리의 울림이 깊고 아득하다. 장세현의 시는 사이의 언어와 서정을 구축한다.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 사이, 골목에서 서성이며 길항한다. 당황하기도 하고 엉거주춤하기도 하면서 그 사이를 치열하고 정직하게 대면한다. 경계에 선다는 건 양단을 통섭한다는 것인즉 깊은 통찰과 내공이 요구된다. 그의 시는 심연에 고인 파동이 어느 순간 솟구쳐 수면 위에 새긴 무늬 같다. 때론 아름답고 때론 애잔하고 때론 세태를 꼬집는다. 그의 비유는 자주 신화적이고 해학적이면서 저물녘의 석양처럼 처연하게 스며든다._정우택(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시 곳곳에 삶의 매순간을 시적 정서로 기록했을 한 인간의 예술적 고단함이 읽힌다. 시를 견딤의 수단으로 삼고 살아온 은밀하고도 핍진한 내력이 엿보인다. 그 문장은 마음의 고향을 잃은 자본주의 사회, 인간의 몸마저 상품화된 현실에 대해 통쾌한 주먹질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모순된 현실을 예민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타관의 어둠을 견뎌 나간다. 장세현의 시는 막막함 속에서도 틈을 발견하고 틈을 만들어 스스로도 숨을 쉬고 시를 읽는 독자들의 숨통까지도 틔워준다._김주대(시인)
■ 장세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91년 시집 『거리에서 부르는 사랑노래』로 등단하였다. 창작 그림책 『엉터리 집배원』, 『호랑이를 죽이는 방법』, 『엄마도 처음』 등이 있다.
첫댓글 장세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다』가 1991년 첫 시집 출간 이후 만 32년 만의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과 사랑(지금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