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 속에 형제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형제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어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
「마니피캇(Magnificat)」462장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가사입니다.
저녁 식사 후 묵주기도가 끝나면 신학교 운동장에 둘러 모여 마침 성가로
참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저학년, 수단을 입은 고학년,
클러지 셔츠(Clergy shirts)의 부제와 신부님들… 교구도 다르고 학년도
다르며 살아가는 공간도 달랐지만, 같은 마음에 같은 지향으로 입을 모아
밤하늘에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는
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그 누구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 Clergy shirts란 가톨릭 성직자의 약식 제복을 말한다.
도반(道伴, 불교 용어로 함께 도를 닦는 벗의 의미)으로 또 이 세상에
하느님을 전할 도구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 때, 이 노래를 들으면 다시금 살아갈 수 있는 용기들이
생겼습니다. 함께 가는 이 길이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인생의 여정 안에 ‘나’와 ‘너’
그리고 ‘우리’ ‘하느님’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제110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문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걸어가십니다.”라는 주제로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한 여정 중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장 작은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의미에서 당신 백성 안에서
함께 걸어가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오르다 보면 흔히들 말하는 깔딱 고개. 죽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나타납니다. 이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등으로 전해진다면 우리는
힘을 내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정부 정책 변화로 삶의 자리를 위협받는 이주민들입니다.
우리 형제·자매인 이주민과 난민들에게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함께”하고
있음을 전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손길이
그들에게는 인생이라는 큰 산을 오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하늘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하느님의 순례하는 교회인 저희는
고향 땅에서도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낯선 땅이 집이고 모든 고향 땅이 낯선 곳입니다.
지상에서 살아가지만 저희는 하늘나라의 참 시민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잠시 머물 이 세상 것에 저희가 매이지 않게 하소서.
이주민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마련해 두신
영원한 집을 향하여 저희가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희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시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게 하소서. 아멘.
글 : 金鍾聲 Peter 神父 – 전주교구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우리는 일상에서 기도를 자주 드립니다.
시험 합격을 위해, 사업의 성공을 위해, 건강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저
역시 이런 일상에서의 기도뿐만 아니라 재판을 앞두고도 종종 기도를 합니다.
대부분은 “오늘 재판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지혜의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늘 사건 꼭 승소하게 해 주소서!”라고
대놓고 뻔뻔하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기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변호사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은 없지만, 유독 더 신경이 쓰이는
사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 그날의 사건이 그랬습니다.
청구취지 금액도 상당히 크고, 상대방 변호사와의 법리 공방도 매우
치열하게 이루어져 난도가 꽤 높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 저 이 사건 꼭 이기고 싶습니다!
승소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 변론을 마치고
상대방 변호사의 반박 변론을 듣기 위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변호사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묵주반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왜 그리 그 묵주반지가 제 눈에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법정에서 나오는데,
‘상대방 변호사도 나처럼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께 꼭 승소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 그랬다면 과연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느님도 참 피곤하시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판에서 승소하게 해 달라’는 식으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무언가를 구하는 청원기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날 이후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조금 더 올바른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다가 마침 법률가의 수호성인인 ‘성 토마스 모어에게
드리는 변호사의 기도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문 중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문구는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며 기도합니다.’,
‘의뢰인에게 충실하고, 모든 이에게 정직하고, 상대방에게 예의 바르며,
언제나 양심에 깨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승리에 집착하려다가 제 영혼을 잃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의 좋은 종이 되되, 하느님의 종이 먼저 되게 하소서.’라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 놓았습니다.
기도문을 계속 보다 보니 올바른 청원기도란 단순히 무언가를 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요구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기를 바라고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마태 26,39 참조)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약한 신앙인이기에 여전히 기도 중에 승소를 바라는 제
마음을 스리슬쩍 표현하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 애교로 바라봐
주실 것으로 믿고, 앞으로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려고 합니다.
“하느님, 이 사건에서 승소하기를 원하오나 오로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럼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글 : 성진욱 Peter – 법무법인 海星 辯護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