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 현대 한국 불교의 방향
병고 고익진 (전 동대 불교학과 교수)
1. 이념정립의 필요성
본 내용중에서 도입부분은 생략하고 글 올립니다.
생략된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 내용
권상로의 불교개혁론 등 일제의 식민지 하에 한국불교 개혁을 위한 노력.
현대 불교 혁신을 위한 조계종 총무원 주최 세미나 내용
- 이하 계속 -
종단을 정비하고 승려를 교육하고 민중속에 뛰어들어 사회구제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가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런 일들이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일이 사상적 뒷받침없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사상이다.
종교사상에 입각해서 종교행동이 있게 되고, 종교행동에 의해서 종교경험이 있게 되며, 그 위에 종교집단이 형성된다.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사상이다.
따라서 사상적인 방침이 결정되지 않은 채 승려교육이나 포교 현대화, 종교문제등을 논한다는 것은 근본을 망각하고 지엽을 쫓는 것과 같다.
필자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 모른다.
그러한 것은 이미 자명한 일이 아닌가.
조계종의 경우 1956년에 공포된 종헌 제2조에는 그 종지가 다음과 같이 뚜렷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본 종은 석가 세존의 근본교리인 자각.각타.각행원만을 바탕으로 삼고, 직지인심.견성성불.전법도생을 종지로 삼는다.
그런뒤에 금강경과 전등법어로써 소의경전을 삼되,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지주(지주)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제3조)
한마디로 말해서 금강경에 의해 오도한 육조혜능의 선 사상을 계승한다는 입장이다.
조계(조계 : 육조의 주처)라는 종명에 어울리는 종지이다.
그러나 종단에서 이러한 종지가 실제로 얼마만큼 지켜지고 있을까?
승려교육을 맡아 왔던 전통적인 강원의 커리큘럼은 사집과 사교로 구성되고 그 위에 대교과가 있는데, 이것은 화엄을 최상의 교법으로 치고 있음이 뚜렸하다.
선원 또한 오로지 화두에만 골몰하여, 경전은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에서 부터 선과 교는 심한 대립상태에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다.
일반을 상대로 한 포교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신도회가 조직되고, 정기법회가 봉행되고, 포교활동이 활발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포교가 현재 어떤 상태로 진행되고 있는가?
각 법회마다 방침이 다르고, 동일한 법회라고 해도 수시로 방침이 달라진다.
설법자의 뜻에 따라 어떤 때는 금강경이 설해지고 어떤 능엄경이 강의된다.
염불이 권해지는가 하면, 선이 권장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나는 많은 보살에게까지 화두를 주어, '화두타러 간다'는 말까지 들린다.
이렇게 일정한 방침이 없는데도 포교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정한 교리가 반복적으로 설해지고 사유될때 비로소 듣는 사람의 마음에 신앙체제가 형성된다.
정기 법회의 가장 큰 목적은 이러한 신앙체계의 형성과 강화에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방침없이 임의로 법문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소리를 구하게 될 것이고, 단순히 그렇게 '듣는 법회'에서 경건한 신앙심이 함양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불교 중흥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상적인 이념의 정립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종헌에 종지가 명시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대의 추이와 함께 교리는 끊임없이 새로 해석되고 새로 적용되어야 한다.
종헌에 명시된 종지에 대해서 그런 연구가 일찌기 우리 종단에서 행해진 일이 있는가?
그러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논술된 논서나 장소(장소)가 생산된 일이 있는가?
논서는 차지하고, 종지에 상응하는 통리된 성전하나 제대로 발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지에서 필자는 힘에 닿지 않는 일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감히 한국 불교의 이념적인 측면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염두에 두는 대상은 소수 엘리트를 위한 불교나, 종파에 국집된 불교가 아니다.
일반 대중에게 오늘날 어떤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를 폭넓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2. 선의 문제성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선(선)이라 해도 좋다.
삼국시대에 이 땅에 도착한 불교는 통일기 신라 때 찬란한 교학의 꽃을 피웠다.
그러한 교학 중에 가장 성했던 것은 화엄이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는 선이 전래하여, 고려 일대는 선과 교의 대립과 지양이라는 현상을 드러낸다.
특히 보조지눌과 그의 제자 진각헤심에 의해 창도된 간화선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위치로 부상하였으며, 이런 전통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화두라는 문제를 가지고 조용히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화두는 1천 7백개를 헤아리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자(무자) 화두'이다.
옛날 중국에 조주라는 유명한 선승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그이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주는 왜 없다고 답하였을까?
간화선은 이런 '무' 자를 열심히 참구하는 것인데,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할까?
보조지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한마음으로 그 문제를 들되 이리 저리 생각해서는 않된다.
유 와 무로 풀어도 안 되고, 참다운 무라고 해도 않되고, 도리로 따져도 안되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도 안되고, 눈섭을 치켜 세우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서 근거를 찾아도 안되고, 언어 위에서 살 길을 찾아도 안되고, 일어나는 곳에서 합당함을 얻어도 안되고, 문자 가운데서 인증해도 안되고, 미혹을 버리고 깨침을 기다려도 안된다.
모든 헤아림을 떨쳐버리고 밝고 밝은 곳에서 간파할지니, 영리한 사람이면 듣는 순간 깨칠 것이다. 그러지 못할진댄 '유다 무다' 하지 말고 다만 그것을 응시해야 한다.
'이 무슨 도리인고?'
간화선이란 이런 형태의 선법을 가리킨다.송나라 대혜 선사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생사를 부정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소승불교의 염색적인 가치관을 극복하고자 흉기한 것이다.
모든 법이 공(공)하다는 대승의 직관지 곧 반야에는 생사와 열반이라는 분별은 자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은 대승불교의 그러한 실천적 반야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대혜선사는 그러한 선에 다시 독창적인 테크닉(화두)을 가하여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보조지눌은 이러한 대혜의 선사상을 깨달음에 이르는 곧 바로 뚫린 길(경절문) 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이해 시키기 위해 세가지 법문을 조직하고 있다.
첫째는 육조혜능의 선법을 크게 선양했던 하택신회(하택신회)의 선인데, 이것은 명석한 면이 있지만 아직 아직 헤아림(지해)의 자취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둘째는, 중생의 무명망념이 곧 부처의 보광명지(보광명지)라는 이통현의 화엄관이다.
이것 또한 교리적인 헤아림의 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셋째번의 대혜선에는 불덩어리에 눈송이가 붙지 못하듯이, 그런 분별이 붙은 곳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간화선은 바로 이러한 대혜선이다.
그렇다면 현 한국불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사상적 이념 정립'의 문제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내야 할 곳은 그러한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 종단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의 종지가 그러한 선의 전승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선이 과연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교는 매우 지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일반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더구나 대승의 심오한 공사상은 범인의 상식을 초월하고 있다.
선은 다시 그러한 교의 경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혀 다른 정신적 차원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날은 간화선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했던 보조의 선학까지도 비판하면서 더욱 극단에 흐르고 있는 경향이다.
일반대중이 어떻게 그런 난해한 선을 이해하여 그로써 종교적 생활을 영휘할 수가 있겠는가?
소수 엘리트나 서구 지성인의 호기심을 끌지는 모르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되기는 어렵다고 필자는 보고싶다.
일반 대중뿐 아니라 전문적인 출가인 에게도 선은 쉬운 길이 아닌것 같다.
확철대오하였다고 자신할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많은 해를 선원에서 보내고도 답답한 마음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연수 선사는 "열사람이 가서 아홉사람은 탈락한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에 대한 속단이나 오해가 오늘날 불교계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끼치고 있는가.
불립문자라는 표방아래 경전을 배척하면서도 조사어록은 탐독한다.
무애행을 한다면서 파개를 일삼고 이를 합리화 한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법 아닌 것(비법)에 집작하는지 일종의 테크닉에 불가한 화두에 집착하여 교묘한 희론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사량 분별을 떠난다고 자처한다.
이 어찌 넌샌스가 아니가.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를 생각하는 견지에서 필자는 선을 이상과 같이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선에 선에 대한 전적인 부정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필자도 선이 불교의 진정한 뜻을 발휘하는데 놀랄만한 장정을 갖고 있다고 시인한다.
불교의 목적이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데 있을진데 선 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러한 깨달음을 제시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선은 반야 사상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선은 그러한 파격적인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로는 오히려 부적당하다는 말일 뿐이다.
3. 교학의 문제성
교는 선에 비해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다.
일반 대중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사유를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는 선보다도 대중불교에 더 적합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교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보통 '교'라고 말하는 것은 경전보다는 경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가리킨다.
부처님의 입멸후 1 백여년이 지난뒤 (BC 4세기경) 불교교단은 교리와 계율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크게 둘로 갈라지고, 그로부터 다시 소소한 분열이 일어나 20부파를 헤아리게 된다.
경전에 대한 연구는 이 부파불교 시대에 이미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BC 1 세기경) 그의 상응한 경전들이 성립하는데, 이러한 대승경전에 대해서도 다시 체계적인 연구가 행해져 중관(중관)과 유식(유식)이라는 두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원 1 세기경 부터 불교는 서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진다.
인도 불교의 경전과 연구논서가 중국어로 번역됨은 물론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국사람들에 의해 한역 경전과 논서가 연구되고 그러한 연구를 토대로 종파가 형성된다.
삼론.법상.화엄.천태.율.선.정토.밀교 등은 중국 종파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천태와 화엄은 인도 불교가 중국적으로 전개된 중국 교학불교의 2대쌍벽으로 칭해지고 있다.
중국불교의 이러한 종파적인 교학은 신라 통일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해지고 여기에 한국적 사유가 가해져 더욱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선에 대한 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적인 교학을 의미한다.
그러한 한국 불교의 교학 중에서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화엄학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화엄학은 의상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의 제 2 조 지엄에게 수학하고 그 종지를 전래한 뒤, 통일기 신라교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도 균여와 의천과 같은 훌륭한 화엄학자를 배출했으며, 심지어는 지눌과 같은 선가도 화엄을 연구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의 11 종이 6종으로 감축되고(태종 7년), 다시 선.교 2종으로 폐합된다(세종 6년). 그 뒤 청허 휴정의 '사교입선(사교입선)'설에 의해 여전히 연구되고 전승되었음은 조선조 중엽에 성립되었음을 강원과 그 커리큘럼(사집.사교.대교)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라고 하면 곧 화엄학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그리고 선보다도 교가 대중불교에 적합하다면, 이러한 화엄학으로 대중불교를 심자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화엄학이 과연 대중불교에 적절한 교리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엄학은 불교학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중관학파의 변증법적 공관(공관)과 유식학파의 아라야연기설, 기신론의 여래장 사상 등의 모든 교학적 이론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것이 화엄의 법계관(법계관)이다.
따라서 화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전 불교교학을 철저하게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적인 불교학자도 감당키 어려운 이러한 화엄학이 어떻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될 수 있겠는가?
비슷한 말을 삼론.법상.천태.밀교와 같은 교학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엄청난 부피의 전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화엄을 비롯한 이러한 종파적 교학들은 부처님의 뜻을 각 파의 소의경전이나 논서에 한정시키는 편협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각 파의 소위 교상판석(교상판석)이라는 경전 분류법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판정된 경전만이 집중적으로 천착되고, 그런 각도에서 다른 경전들을 이해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 경전은 영원한 진리를 간직한 문헌이지만,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뜻은 언제나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적용이 가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시대에 어느 한 종파에서 가졌던 견해로 불교의 진정한 뜻이 한정되어 버린다면, 이것을 어찌 문제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필자는 '선'에 못지 않게 '교'에도 문제성이 있다고 본다.
일반 대중을 위한 오늘날의 불교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종파적인 교학은 부적당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신학이 곧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경전에 의해야 할 것이다.
경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을 각자의 마음 속에 직접 들려 주도록 해야 한다.
새삼스러운 말인것 같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지금껏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조의 불교, 법장의 불교, 천태의 불교는 있지만 석가의 불교는 없다'는 한 불교학자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 바람직한 방향 : 경전의 선택
선이나 교보다는 경전에 의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그렇다면 이제 어떤 경전을 택해야 할까. 불교에는 소승에서 대승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그 많은 경전을 다 읽고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경전에서 긴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그것을 새로운 체계로 엮어놓는 방법이다.
'불교유신론'을쓴 한용운이 곧이어 '불교대전'을 편찬한 것은 그런 선구적인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 뒤 그런 종류의 불교성전은 여러 곳에서 편찬되었고, 취근의 것으로는 1972년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불교성전'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불교성전에 나타난 공통적인 양상은 그 목적이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전반에 대한 상식이나 교양을 얻게 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개의 경우 불.법.승의 3보를 중심으로 그에 관한 경전의 요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것도 교훈적인 말씀을 열거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번역 또한 '읽을 수 있는 성전'을 만든다는 취지 아래 지나친 윤문(윤문)이 행해져, 불교 술어가 지닌 미묘한 구조가 크게 손상되고 있다.
경전의 목적이 '깨달음을 가리키는 손짓'의 구실을 하는데 있을진대, 이러한 성전이 절대적인 귀의를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성전이란 어떤 것일까?
불교 경전은 어느 것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일미(일미)의 것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어느 경전이든 하나를 택하여 그것을 열심히 참구하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종래의 교학이 어느 한 경전을 집중적으로 천착한 것은 이러한 판단에서였을 것이고, 또 그것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일미의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경전이 다 동등한 수준의 교리를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는, 다른 종교가 궁극적인 진리 - 신관(신관)이나 우주론 - 에서부터 설해주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현실세계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교설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진리는 스스로 깨닫도록 그에 이르는 길만이 제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결코 말로 설해져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설하시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다.
따라서 모든 경전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교리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불교 교리는 점점 심화되어 가는중층적인 조직을 띠게 된다.
경전이란 바로 이러한 교리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경전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일미의 것이긴 하지만 각 경전이 저마다 다른 교리적 수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교경전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자.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된 경전으로는 반야경.법화경.십주경.무량수경 등을 들 수가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바탕은 이러한 초기 대승경전이라고 하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것은 반야경이다.
이 반야경에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되면서, 보살에게 반야바라밀다에 행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모든 법이 공한가'에 대한 뚜렸한 이유는 제시 되어 있지 않다.
'공'은 다만 직관해야 할 성질의 것일까?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중요시 하는 불교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명제에 대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반야경의 공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중관학파의 비조 용수는 공의 논리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연기한 것은 공이요, 그것은 가명이며, 그것은 또 중도의 뜻이다.
" 공의 이유가 연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기'라는 것이 용수의 저술에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존재의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집착의 잘못만을 파하고 있을 분이다.
그렇다면 공의 이유로서의 그 '연기'라는 개념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이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대승불교 이전에 성립된 아함경에서이다.
B . 불교학은 아함에서 부터
<1> 불교를 처음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아함에서 부터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불교입문서나 불교학개론이 불교를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에 추천되는 책들이지만, 이런 책들은 여행에 들어서서의 실제적인 '길'은 아니다.
아함은 불교라는 긴 여로의 맨 처음에 밟아야 할 길인 것이다.
불문에 들어와 이미 상당한 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의 불교가 어딘지 모르게 헛점이 있는것으로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런 분에게도 나는 아함에서부터 다시 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아함은 모든 불교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은 원시불교로부터 시작된것이고, 아함은 원시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아함에 대한 연구없이는 불교학의 기초는 다져질 수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나는 아함을 부디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승불교는 아함의 이론과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한것이라는 점에 오늘날 모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비근한 예로 반야심경만 보아도 거기 나오는 5온, 12처, 18계, 12연기,4제, 삼약삼보리와 같은 개념은 어느것 하나 아함에 설해지지 않았던 것이 없다.
반야개공의 제법무자성 사상은 아함에 숱하게 되풀리 되고 있는 " 5온은 무상, 고, 무아 " 라는 교의의 발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법화나 화엄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전은 잘알면서도 그러한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아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함을 소승경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함은 대승의 기초경전이라고 해야 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얻게 하려는 일대사 인연을 갖고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설하고 " 삼승방편 일승진실 " 의 교설의 뜻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모두 성불의 기별을 주고 계신다.
이것은 아함에 " 여래는 세상에서 다섯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나니, 첫째는 법륜을 굴리고, 둘째는 아버지를 위해서 법을 설하고, 셋째는 어머니를 위해서 법을 설하고, 넷째는 범부를 깨우쳐 보살행을 닦게하고, 다섯째는 보살에게 기별을 주는 것이니라 " < 증일아함권 15 > 고 설한 부처님의 오사에서 넷째와 다섯째의 과업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함에 " 마음이 더럽기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비하건대 화가가 하얀 화폭에 뭇채색을 갖추어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 잡아함 권10 > 고 한것은 화업에서 "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오음을 그리나니, 모든 세계중에 만들지 않은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가 그렇고, 부처와 같이 중생이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와중생의 이 셋은 차별이 없다 "고 한 주목할 만한 사상의 선구를이루고 있슴은 일독으로 요연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여기에서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함에 쌓여있다.
대승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것은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 할 정도이다.
원시불교 사상의 연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부디 아함에서부터 읽어 갈 것을 권하고 싶다.
<2> 부처님의 금구소설<금구소설>은 부처님의 제세시는 물론,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2,3백년 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문자에 정착되기는 부파불교 시대에 경율론 3장의 성립이 이루어 지면서 부터라고 생각된다.
일미화합했던 불교교단은 불멸후 백 년쯤에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열하고 이 근본 2부로부터 다시 18파가 파생하여 20부파를 이루게 된다.
각 부파는 각기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함은 이 중에서 경장에 해당된다.
아함이라는 말은 범어(agama)를 음역한 것인데 "옴" 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경장을 "옴"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뜻 하나만으로 경장을 아함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전으로 말한다면 율장(율장)도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의 교설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런 움직임은 교단내에서 견해차를 발생시켜 이것이 부파형성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럴 경우 이견(이견)의 대립속에 구전되어온 교설이야 말로 움직일수 없는 권위로 내세워질 것이다.
경장을 특히 아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아함이 당시에 얼마나 중시된 경전이었던가 ] 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한역 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다.
(1) 장아함 ( 22권 30경 )
(2) 중아함 ( 60권 222경 )
(3) 잡아함 ( 50권 1362경 )
(4) 증일아함 ( 51권 471경 )
장아함은 긴 경전을, 중아함은 중간 길이의 경전을, 잡아함은 짧은 경전을 모아 편집한 것이고, 증일아함은 법수(법수)에 따라 1법에서 11법에 이르는 경전을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길이나 법의 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수집해 놓은 것은 아니다.
일단 그렇게 분류한 다음, 그들을 다시 어떤 방침 아래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편찬 방침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지만, 어떻든 현 장아함은 4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제1분은 부처님을 밝히고, 제2분은 부처님의 자각내용으로서의 법을 밝히고, 제4분은 세기경(세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아함은 원시불교의 전반에 걸친 교리가 5송(오송)으로 편집되어 있음을 본다.
현재의 한역 잡아함은 내용배열이 극히 혼란하고, 이질적인 요소(아소카왕에 관한 권23,25)까지 섞여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것이 어느땐가 착간(착간)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착간의 시기를 대개 A.D. 5~6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착간 이전의 원형을 추구하여 훌륭한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잡 아함은 앞으로 이렇게 복원된 원형에 의하여 읽는것이 좋을 것이다.
남방불교는 아함에 해당되는 경장으로 현재 다음과 같은 5니카야를 갖고 있다.
(1) Digha-nikaya (장부) 3품 33경
(2) Majjhima-nikaya (중부) 15품 152경
(3) Samyutta-nikaya (상응부) 5품 2875경
(4) Anguttara-nikaya (증지부) 170품 2198경
(5) Khuddaka-nikaya (소부) 15경
이 5니카야를 아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니카야(nikaya) 라고 부르는 것은 전승(전승) 보다는 편집이라는 뜻을 강조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팔리어로 니카야는 "신(신)" 이나 "집(집)"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각 부파의 경전이 대개 장.중.잡.증일의 형식으로 편찬되고 있음을 보면, 이런 편찬 형식의 기원은 상당히 오랜 것으로 부파 분열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편찬 방식은 기억.구전(구전)을 위한 형식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따라서 구전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편찬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함의 전승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므로 각 부파의 지송경전(지송경전)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차이에는 시대가 흐르고 부파간의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 부파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더욱 증대되어 갔을 것이다.
오늘날 한역 4아함과 팔리 5니카야만 비교해 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따라서 각 부파는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부파의 3장이 오늘날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것은 남방불교의 팔리 3장 뿐이다.
한역 4아함은 장.중.잡.증일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실은 여러 부파에 속했던 것이 한역되어 4아함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내용을 자세히 고찰함에 밝혀지는 것인데, 학자들은 각 아함의 소속부파를 대개 앞에서 표시한 바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4아함은 총 18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부피이다.
그러나 그들속에는 중복되는 것이 허다하고, 같은 내용에 편찬 형식만이 다른것도 상당히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것만을 추린다면 그렇게 많지 않을것 이다.
오늘날 이런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되며 그런 작업이 행해져서 아함의 요집(요집)과 같은 것이 나온다면 아함의 지송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3> 아함에는 불교의 원초적인 형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 나타나는 부처님은 모든 염오의 차별상을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법계에 충만해 있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도 아니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어 청정무구한 정토에 안주하여 중생들의 귀의를 받고 있는 부처도 아니다.
오만하기 이르데 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 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 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근간 사상과 입장이 무엇인가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함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할 것이다.
아함에서는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이 불교에 도전 해오고 그런 도전에 대해서 부처님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인생의 의의인가를 밝히고 게신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사상과 입장이 다른 철학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정통 바라문의 사상을 전변설(전변설)이라 하고 새로운 사문들의 사상을 적취설(적취설)이라고 한다면, 불교철학은 연기설(연기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각자의 무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처님은 전변설의 "아트만(아)"을 부정하고, 적취설의 단견(단견)을 부정하여 그러한 두 끝을 지양한 중도(중도)적 "무아"를 종교적 실천의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연기만 알면 불교철학은 다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기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아함에는 6근.12처.육육법.5온.4제.12연기와 같은 법들이 잡다하게 산설(산설)되어 있다.
아무런 체계도 철학도 없이 법을 설해 놓은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조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가 연기의 일종이다.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정교한 짜임새로 시설된 것들이다.
연기의 진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함에서부터 읽어가고 그 미묘한 뜻을 심시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아함에 그려진 부처님 제자들의 청순한 구도의 정렬과 생명을 아끼지 않는 홍법(홍법)의 정신도 우리들을 무한한 감도에 젖게 할 것이다.
증일아함 권13에 그려진 아나율을 보자.
부처님 제자중에서 아나율은 천안(천안) 제일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가 천안을 얻게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이 읽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인 것 같다.
아나율은 어느날 좌선하다가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그때 마침 부처님이 이것을 보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로부터 아나율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아 마침내 시력을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처절할 정도로 뜨거운 구도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함 권13에 나오는 부루나는 홍법에 목숨을 바친 일례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부루나는 부처님 앞에 나와 서쪽 지방의 포교에 나가겠다고 청하였다.
부처님은 그에게 " 서쪽 지방 사람들은 사나우니, 욕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때 부루나는 "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고 대답했다.
" 만일에 때린다면 ?" " 몽둥이나 돌로 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몽둥이나 돌로 친다면?"
"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열반에 들게 해주는 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부루나는 드디어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서방포교에 힘쓰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마쳤다 한다.
아함을 통해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의 뜨거운 구도열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여 불자로서의 사명에 다시금 불타게 할 것이다.
C . 아함경의 교설체계(법상체계)
아함교설의 체계성을 밝히기 위하여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12처, 6법. 5온, 12연기의 네가지 세간의 법문은 첫째, 각 법문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교리조직을 갖고 있으며 둘째, 그들은 다시 전체적으로 관련하여 놀랍도록 정연한 교리체계를 이루고 있음이 발견된다.
고찰의 대상이 된 네 가지 법문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12처라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이 법문은 우리의 주관과 객관의 인식관계를 근거로 시설된 것이지만 거기에 다시 중생(satta)과 자연(nissatta) 사이에 작용.반응의 인과관계까지를 나타낸 것이다.
제 6근의 '의지(의 : manas)'와 그에 대한 제6경의 '법(법 : dhamma)'은 바로 그러한 뜻을 나타내고 있는 술어이다. 중생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인과율은 업윤회설의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이론적 기초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 둘은 결합하여 하나의 교리조직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세간법(세간법)의 체계'라고 부르고 싶다.
12처의 주관과 객관 사이에 연기관계가 있지만 아직 그에 대한 환멸계(환멸계)가 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6법은 아함이나 니카야에서 6처부(육처부: salaya'tana-vagga)에 속해 있는데 이런 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분명히 12처에서 발달한 법문이다.
6.6법이 12처에서 분립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6식의 발생에 있는데, 이 6식의 대상은 유위법의 주이상(주이상)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변이(변이 : annatha'bha'va)의 전후 두법을 완전히 '다르다'고 식별함을 말한다.
전후 두 법을 완전히 다르다고 식별하면 필연적으로 전법은 멸하고 후법은 생한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불교 특유의 주이관으로서 수론학파 등의 전변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유의법의 주이상에 대한 아함의 논리적인 성찰은 이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변이(변이)의 전후 두 법이 이와 같이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전법은 후법발생의 필수조건의 하나가 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 두 법 사이에는 연고(연고 : paccaya)관계가 있다.
인연론은 바로 이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멸하는 전후 두 법사이에 연고관계가 있다면 다시 그 '생.멸'의 개념이 반성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성찰에서 마침내 유위법의 실상의 구조가 밝혀져 18계가 성립한다.
6.6법은 6근.6경.6식으로 이루어진 전반부와 6촉.6수.6애 등으로 이루어진 후반부로 갈라진다.
전반부는 18계 성립의 기반이 됨을 보았다.
다시 말하면 18계는 그들에 대한 진여실상계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18계를 연하여 일어난다고 아함은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6.6법의 후반부는 18계를 근거로 한 연기이다.
이와 같이 6.6법은 전반부.후반부로 단절되는데 아함은 다시 후반부의 최초 지분인 6촉을 '삼사화합(삼사화합)'이라고 설하고 있다.
삼사(삼사)는 6근.6경.6식, 다시 말하면 육육법의 전반부를 가리킨다.
따라서 전반부.후반부로 단절되었던 육육법은 다시 연기론적인 연쇄를 회복하게 된다.
이리하여 육육법은 전체적으로 18계를 근거로 한 연기가 되고 18계는 그러한 유위세간에 대한 진여법계가 된다.
육육법과 18계는 이와 같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하나의 연기론적인 교리조직을 이루고 있다.
육육법에 대해서 종래 주의를 못했다는 것은 불교학의 헛점을 드러내고 있다.
18계를 삼과분류(삼과분류)의 하나로만 취급해 온 것도 '계(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계의 '종족의(종족의)'는 유위법이 그에 실상에 보여주는 복합구조성을 표현한 것이다.
육육법의 근본 12처가 지.수.화.풍 4대(사대 : 원소)로 분서되면 12처의 구별 다시 말하면 6법성(육법성)이 사라진다.
18계에서 6법성이 사라짐과 함께 일진무변법계(일진무변법계)를 이루게 된 것이 다름 아닌 6계이다.
5온은 6계를 근거로 연기한 유위세간이다. 그러나 교리조직상 5온의 연기성은 배제되어 분단상(분단상, 온 , khandha)을 나타내고 있다.
5온 연기에서 연기성이 배제되지 않을 수 없음은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다시 '5온계'의 집(집)이 겹쳐 이중적인 등기(samuppa'da)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5온은 4성제를 맞아들이며, 6계를 근거로 연기론적인 교리조직을 이루고 있다.
사문사과는 이러한 교리조직에 입각한 수행 진로를 네 단계로 구분한 것인데, 그 술어가 나타내는 의미는 심상치 않은 바가 있다.
12연기의 성립근거를 이루고 있는 진여실상은 '명(명)'이라는 술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명은 6계에서 '계성(계성 : 복합구조성)'이 태개된 것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6계에서 계성이 타계되어 단일 구조적인 청정(청정).무애.상적(상적)한 명에 이르는 논리적 전개과정은 각자가 자증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문사과의 심상치 않은 의미는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12연기는 이러한 명을 미(미)한 무명연기(무명연기)인데, 그 성립근거인 명이 이처럼 계성을 여읜 단일 구조적인데서 그 교리 조직은 지극히 순일간략(순일간결)하고 완전무결한 것이 되었다.
아함의 모든 교설은 궁극적으로 12연기에 이르러 완성된다.
12연기 이전의 모든 교설은 그를 설하기 위한 또는 그에 유도하기 위한 예비적 방편시설이었으며, 논리적 전개과정이었다.
12처.육육법.5온을 설하는 동안 12지(지)는 설명되고 있었으며, '연기'은 '인연'과 '집(집)'을 결합한 개념이다.
6식에서 발달한 아함의 실상론은 18계.6계를 성립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명에 이르러야 한다.
18계.6계가 육육법.5온에 대한 진여법계에 해당되지만 무상.고.무아로 배척된 것은 이 때문이며, 부처님이 장야(장야)에 벌유법(목벌 유 법)을 설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12연기는 아함의 구경이요, 완성이요, 묘법이다.
12처.육육법.5온.12연기를 중심으로 고찰한 이상과 같은 아함의 교리체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유위세간(유위세간) 진여법계(진여법계)
12처 <--------------- 업.윤회설
|
|------------- [6식발생 - 인연론] --------> 18계
| |
6.6법 <---------------------------------------| |
|
|------------- [4대설 - 6법성 타개 ] ------> 6계
| |
5온.4제 <-------------------------------------| |
|
|------------- [사문4과 - 계성타개] -------> 명
|
12연기 <-----------------------------------------|
아함은 이러한 교리체계에 입각해서 제법개공을 부르짖고 있다.
따라서 그 '공(공)'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제법개공의 '제법'은 12처.육육법.오온.12연기와 같은 유위법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모두 연기한 것이므로 제법개공은 '연기한 것은 공'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연기는 무명이 있는 한은 아(아)가 있으므로 무(무)도 아니고, 무명이 멸하면 아(아)도 멸하므로 유(유)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유무를 떠난 중도이다.
따라서 아함의 '공'은 무명이 있는 한은 망아(망아)도 있다는 중도적인 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의 반야개공(반야개공)은 아함의 이러한 이론을 기초로 성립한 것이다.
그의 진여실상은 12연기의 명에서 다시 명.무명 등의 일체의 '차별성"을 타개한 것이지만 역시 단일 구조적인 공이다.
그리고 명에서 명.무명 등의 일체의 차별성을 타개하게 되는 것도 아함의 인연론에 근거를 둔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이론적 기초를 쌓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흔히 아함의 교설은 단순한 수의설(수의설 )로서 거기에서 논리적인 체계를 찾으려 함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멀하는 것이 오히려 속단임을 알았다.
아함의 수의설 속에는 놀라운 의미연관의 체계가 들어있다.
점교성 또는 일미성의 시사는 바로 그러한 체계성을 두고 한말이다.
아함교설의 그러한 체계성은 선의선설(선의선설)된 아함의 법상을 깊이 고찰함으로써만 밝혀질 것이다. '독일정처에서 전정사유하여 관찰기의하라'는 간곡한 설유를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서는 그러한 체계성의 일단을 밝혀본 것이지만 결코 충분한 고찰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이 문제 추구를 위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팔리 니키야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한 것이다.
서명에 '아함'이라는 한정사를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근본교설의 이론적인 체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알림 ] : 본 논문은 고익진 교수님의 '아함법상의 체계성연구, 동국대 출판부' 의 결론 부분입니다...
|
첫댓글 현 한국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기가 다가오는 듯 곳 곳에서 현 시점의 어지러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불제자로서 또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다만 아쉬운 점은 학승은 학승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각각의 입장에 서서 학문적인 견지를 앞세워 주제를 정하고, 법과 교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려는 부분이 투쟁의 논지를 남기는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글들을 접 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나름 지식적 상위층에 있다는 분들의 공통된 일면 중 하나는 자신의 사고의 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즉 논리가 적용
되지 않는 부분을, 교리 체계상의 문제나 역사적 흐름속에서의 비불법적 개입에서 문제를 찾으려고 한다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학창시절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의 답을 찾듯이 앞뒤가 맞아 떨어 지고 논리라는 체계에 맞춰 법을 체계화 하려는 목표를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불법을 학교 공부하듯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체계를 세우고 가르치려는 우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불법 공부를 머리좋은 모범생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당연한 학교 공부처럼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말이지요.^^
포교를 위해 가장 기초적인 교리로서 아함경을 거론한 것은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나 위 글에서 체계를 중시하는 듯 한 뉘앙스로 언급하긴 하지만, 원론적인 의미는 체계속에 또 다른 체계를 세워 머리로 이해 가능한 포교를 하자는 숨은 뜻이 있어 보이네요.^^
처음엔 전문 지식인이 아닌 일반 불자의 포교를 위해 어려운 경전이 아닌 쉬운 경전을 찾아 아함경을 필두로 체계를 세울 듯 하다가 말미에 와서
"아함교설의 그러한 체계성은 선의선설(선의선설)된 아함의 법상을 깊이 고찰함으로써만 밝혀질 것이다."하며 일반 불자를 떠나 전문성을 갖춘 깊이있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버리니
본디 의도를 벗어나 내용의 촛점이 흐려지고 갈팡 질팡하는 모습이 다소 안스럽게 보입니다.^^()
혜명님 긴 글 전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
저도 처음엔 불교에 굉장한 진리가 들어있고 .. 그 공부를 하면 초능력 도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두루 공부를 해 보니 .. 그리 대단한 진리가 들어있는게 아니더구만요
법승(교승), 학자들이 밥그릇 지키느라 이렇쿵 저렇쿵 분석을 하고 주석을 붙혀 어렵게 만들어 놨더구만요
아랫글의 댓글에서도 저의 견처를 밝혔지만 ..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 부처님이 무엇이 되라고 가르쳤겠습니까 ?
부처 ? 도인 ? 각인 ? .. 아닙니다
깨달음 ? .. 본래 부처임을 ? ..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 이승의 삶이 고통이다 .. 생노병사가 고통이다 .. 이 고통에서 벗어나라
즉 , .. 불교는 윤회가 실재하지 않으면 100 % 허구이며 거짓입니다
윤회가 부정되면 불교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머리 깨지도록 .. 처 자식 내 팽개치고 .. 지관법이니, 간화선이니, 진언이니, 에 목숨 걸 이유가 없습니다
혼자 깨달아 몇 십년 살다가면 무엇 합니까 .. 다른 모든사람들은 , 기독교인 포함해서 .. 전부 자기 나름대로 .. 자기 주관대로 소신껏 즐기다 가는데 .. 혼자서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지요.
병이 들어 언제 죽을지 ..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데 .. 불교공부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
윤회를 한다면 .. 이야기가 완전 달라지지요 .. 다음에 희망이 있으니까 .. 남들이 뭐라든 목숨을 걸고 할만 하지요 ^^ ()
여기서 .. 불교의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
현재까지 조계종 산하의 스님, 학자 다수의 의견이 ' 행복 추구 ' 라 합니다 .. 한국불교가 내 세우는 궁극 목표 입니다 .. 삶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또 몇 페이지 입니다 ^^
지금승에서 윤회를 끊는 공부를 하여 다음생에 인간으로 윤회를 하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 .. 물론, 동물, 식물 .. 등으로 다시 태어남도 아니지요 ^^
오직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남이 불교의 근본 입니다 ^^ ()
면목거사님의 견해를 접하면서 한국불교의 폐단이 더욱 두드러져 보임은, 비단 이 혜명만의 개인적 생각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집니다.^^
수많은 불교인들이 윤회사상을 불교 고유의 사상이며, 석가세존의 가르침으로 오인하고
관념적 병폐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깊은 한숨만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석가세존의 가르침에 있어 3법인(무상, 고, 무아)중 일체제고가 포함되어 있어 일체가 고 아닌 것이 없음을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 해법으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설하신 내용은 어느 법문에도 없습니다.^^
불법 수행의 촛점을 윤회를 끊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시면 크게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볼 것없이 면목 거사님의 짧은 댓글 몇 줄에서도 벌써 모순이 생겨버리지 않습니까.^^
윤회가 실재하지 않으면 불교가 100%로 허구가 되고, 불교 공부 할 이유가 없다구요?^^
윤회가 있어야 다음이 있고 희망이 있다구요?^^
그렇다면 무엇하러 어렵사리 수행해서 윤회고를 끊을 것입니까?^^
항상 희망을 붙들고 끊임없는 윤회생을 살아 나가면 될 것을...^^
희망은 관념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 희망이라는 망념 때문에 참 불법은 뒤로하고 희망만 쫓고 있음을 아시는지요.^^
전해오는 설화중 백장선사와 500년 묵은 여우 얘기를 접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인과불락)와 인과에 매하지 않는다(인과불매)의 차이를 깊이있게 고찰해 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면목거사님의 말씀처럼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 사람의 인생이며, 언제 병들고 사고가나서 죽을지 모르는
참으로 허무한 것이 사람의 인생임을 보셨다면, 희망 행복등에 집착하여 관념적 망상으로 하루 하루를 소진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뜨고 살아 있음에 깊이 감사하고 하시라도 진여자성을 증득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내는 것이 정사유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불교의 근본은 무명에 의한 번뇌망상을 여의고, 본디 구족한 보리반야를 발현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오직 보리반야만이 오롯함을 증득하실 것입니다.^^
혜명이 이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면목거사님께 이리 아는체를 하며 주접을 떠는 것은
혜명이 면목거사님 보다 뛰어 나거나 잘났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써
오징어와 땅콩의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아주시길 앙망해 봅니다.^^()
어떤 한 분은 ...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 내 코가 석자인데 .. 부처, 도인, 각인, 깨달음 .. 다 ~ 귀찮고 .. 현재 당장의 행복, 만족이 중요하지 .. 뭔 배부른 부자들 놀음 같은 '진리' '깨달음' '부처' 찾고 있느냐 ?
내일 출근하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도록 노력해야하는데 .. 뭔 얼어죽을 불교공부이니 .. 한가한 소리 하느냐 ...... 하는 회원이 있습니다. ^^
맞습니다 ! .. 정답입니다 !
이승이 행복하고 즐거우면 .. 석가부처의 설법은 전부 헛소리 입니다
이승에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가 시급하면 .. 불교공부는 먼산의 불구경 입니다
왕자로 태어나 배불러 할 일 없는 사람의 사치스런 여유로움일 뿐입니다.
다시 윤회하면 .. 또 지금처럼 열심히 바쁘게 살면 그만 입니다
뭔 얼어죽을 .. 깨달음, 부처, 진리 이겠습니까 ?
지금도 전생을 하나도 기억 못 하는데 .. 어차피 다음생에서도 이번생을 기억 못할낀데 ... 다음생에서 받는 행복이 이번생에서 죽으라 고생한 결과인지 모를터인데
왜 ? 다음생을 위해 ..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다음생을 위해 .. 이번생에 불교공부에 목숨 걸어야 합니까 ? .. 머리 깨어지도록 고생해야 합니까 ? .. 화두 ? 해체하기 ? 진언 ? 염불 ? 삼매 ? 장좌불와 ? .....
왜 ? .. 무엇때문에 ? .. 무엇할려고 ? .. ? ? ?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중 하나는 밖으로 세간살이를 분별치 말고, 세간법은 생사법이라 구하고 따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하셨습니다.^^
항상 밖을 보고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의 업식을 잘 갈무리하여 나를 통해 내 안에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소를 잘 쳐야 하겠지요.^^
본디 이승 저승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남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생각 하는지에 끄달리지 마시고,
스스로 내면을 다스리시며, 답답함이 일면 이 답답함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간파하여 밖으로 나가는 소를 끌고 오시길 빌어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자등명 법등명 하라..."()()()
문득 청봉 큰스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노상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치고, 시인이 아니면 시를 논하지 말라..."()()()
중생계는 윤회의 사슬고리이고 담생에 인간으로 태어나란 보장은 없습니다
몸벗는순간 이생에 진빛 갚으러 가는것이 담생이지요
무심한 인과의 그물은 개미새끼 한마리 건너뛰지 않습니다
모쪼록 사람몸 받았으니 머리 쬐매 써서 얻은 지혜는 이 인과의 그물이 무엇이길래 그러하며
어찌하면 비켜갈 수 있을까를 비추어 줍니다
()
윤회의 사슬이 이 중생계면 이왕이면 이 사슬을 본디 마음쪽으로 몰고가야 하는것이 깨어있는 의식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마귀세상도 부처님이고
부처님 세상도 부처님이면
이 부처님 세상이 마귀세상이 되어야겠습니까? 부처님세상이 되어야겠습니까?
부처님은 이 부처님세상이 더이상 오탁악세가 되는걸 막기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처님세상은 가장 완성된 진리의 세상이란걸 어느 누구도 무시하면 안됩니다
부처님 세상을 무시하는 인간은 담생에 절대로 인간으로 못태어납니다 자신을 무시했기에 자신에게
버림받아 무수한 겁을 자신을 알아볼수도 알아볼능력도 엄두도 못내는 지옥고를 당해야 합니다()
불교를 믿지 않거나 몰라도 지혜가 있고 인정이 넘치면 <불교적>이고
절에 다니고 승복을 입고 불교 교리를 머리에 잔뜩 담고 다녀도
지혜가 없고 현실 적응도 못하여 맹하면 <비불교적>입니다.
대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지/ 배우고 익히고 잘난척 하다가는
천년 만년도 부족하고/ 중생은 고사하고 가족, 친지, 친구, 동료 ,,..
본인 생각 몸뚱아리 하나 건사 못하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비참하게 끝나겠지요.
오! 끔찍해라..
저 자신을 돌아 보면서 빙긋 웃으며
음악 사이트에 노래 부르러 갑니다.
이 좋은 밤에 왠, 헛소리.,,
내가 무슨 말을 했지 ???
질투 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가관 !!!
우리 끼리 아웅 다웅 하니
그나마 천만 다행 ?
실제로는 저게 지옥이라,...
지옥. 지옥. 생지옥.,, 얼마나 막막하고 괴로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