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위한 그날
연중 시기의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가난하다’는 성경의 표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억압당하거나 소외된 이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 등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아마도 현재의 관점에서 가난한 이들에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사지로 내몰린 이들도 속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난’이라는 말은
인간의 힘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우신 조화로운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이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연중 제33주일 말씀은 종말과 심판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종말을 어둡고 두려운 이미지 안에서 소개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복음 말씀이 그렇습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마치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이 모두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종말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종말에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고 전합니다. 이것은 종말 때의 심판에 관한 설명입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영광과 수치는 더 이상 공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상에서의 선택이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때입니다.
언제일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날을 위한 준비는 일상에서의,
오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지만, 종말에 관한 말씀이 우리에게
항상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궁
금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태도입니다. 언제인지
모르기에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충실한 이들은 그날이 언제 오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선을 선택하는 이들은 심판의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종말에 관한 말씀은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가올 언제가 아니라 오늘을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의 선택으로, 지금의 선택으로 꾸며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한 번의 십자가 사건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죽음이라는
고통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이 세상의 마지막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종말과 심판은 두려운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기쁨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운
기쁨의 날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글 : 許珪 Benedict 神父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혀만 남았다고?
수․포․자(수학은 포기한 자)가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덕분에 제 이름 앞에는 ‘일타강사’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제 강의를 듣는 학생이 늘어났고 그에 비례하여 수입도 늘게 되었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과분하게 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부’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전 기부를 해봤어야 알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성당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가톨릭과 관련된 기관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분은 무심히 “까리따스로 연락 한 번 해보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저의 기부는 ‘까리따스 알코올 회복 센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회복 센터는 알코올 의존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곳인데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을 위기에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직 홀로 설 수 없는 이들이 거리로, 유혹 속으로 내몰릴 위기였던 거죠.
그런 상황에 마침 주님께서는 저를 그곳으로 보내주신 겁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 쓰일 수 있음에 기부한 제가 오히려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보내셔서 간 것뿐인데 이후, 수녀님은 틈날 때마다
저에게 고마움을 전하셨습니다. 특히, 수도원에서 만든 빵을 들고
사무실에 오시곤 하셨는데, 어느 날은 저의 성인을 언급하시면서
“안토니오 성인이 꼭 선생님 같았어요.”라는 말을 해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 저는 저의 성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유아세례 때 어머니께서 붙여주신 세례명이 ‘안토니오’일 뿐,
저에게 성인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저와 같았다니,
성인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성인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찌나 설교를 잘했는지 가는 곳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합니다. 성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이단자가 회개하여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황금 혀’라 불렸다고요. 심지어
묻힌 지 30년 후에 시신이 발굴됐는데 오직 혀만 썩지 않고 남아있었고,
이 혀는 이탈리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 혀만 남았다고?’ 그 사실을 안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말로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하며 사는 것도
성인의 도우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제가 전하는 것은 수학만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을 닮아 제 혀에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담아야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쓸 자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인처럼 혀만 남는
기적까지는 아니어도 혀를 함부로 쓰는 사람은 아니어야 할 테니까요.
나중에 이탈리아 파도바에 가면, 꼭 한 번 성인의 혀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제 혀가 성인의 혀를 닮아가고 있는지 중간 점검을 하고 싶거든요.
- 글·구성 서희정 마리아 작가
글 : 정승제 안토니오 – 수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