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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金剛山, 1.638m)
높이 1,638m. 금강산은 동해에 임박한 태백산맥 북부의 아름다운 명승지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주위가 약 80㎞에 이르는데, 강원도의 회양·통천·고성의 3개 군에 걸쳐 있으며, 면적이 약 160㎢에 이른다.
금강산의 ‘금강(金剛)’이라는 말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적힌 데서 연유되었다. 풍악(楓嶽)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승려들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금강산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이름이 고정된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개골(皆骨)·열반(涅槃)·풍악·기달(怾怛)의 다섯 가지 이름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금강’과 ‘열반’은 불교의 용어라 하고, 이 밖의 이름은 금강산이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경색이 달라져 판이한 정취를 주기 때문에 계절에 따른 명칭이 있다고 하였다.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蓬萊)라 하고, 가을에는 일만이천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드므로 풍악이라 하고,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암석만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으면서도 일반적으로 ‘금강산’으로 통칭된 것은 이 산이 불교의 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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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열기자연환경
금강산 일대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을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었는데, 그 동쪽과 서쪽으로는 주봉에서 갈라진 산줄기와 수많은 산봉우리가 잇달아 솟아 ‘일만이천봉’을 이루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 북쪽으로는 영랑봉(永郎峰, 1,601m)·옥녀봉(1,424m)·상등봉(上登峰, 1,227m), 오봉산(五峰山, 1,264m)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월출봉(1,580m)·일출봉(1,552m)·차일봉(遮日峰, 1,529m)·미륵봉(1,538m)·백마봉(白馬峰, 1,510m)·호룡봉(虎龍峰, 1,403m)·국사봉(國士峰, 1,385m) 등이 뻗어 있다.
이들이 형성한 분수계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구분한다. 내금강에는 북한강의 상류인 동금강천과 금강천이 흐르고 외금강에는 고성 남강(南江) 및 그 지류인 온정천(溫井川) 등이 흐른다.
이들 하천이 태백산맥의 분수계를 향하여 활발한 두부침식(頭部侵蝕)을 진행하여 이른바 일만이천봉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비로봉·영랑봉·채하봉(彩霞峰, 1,588m) 일대에는 태백산맥이 융기하기 전의 원지형으로 비교적 평평한 고위평탄면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금강산의 지체 구조는 지금으로부터 약 1천만 년 전인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傾動性撓曲運動)으로 형성되었다.
지반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수직의 절리가 탁월한 흑운모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들 암석은 석질이 치밀하나 수직절리·판상절리·경사절리 등 여러 방향으로 뻗은 절리의 발달이 현저하다.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와 침식으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함께 수많은 골짜기마다 노암(露巖)의 수직절벽·암대(巖臺)·폭포·분류(奔流)·심담(深潭)을 형성해 놓았다.
내금강을 흐르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들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나, 외금강의 하천들은 길이가 짧고 경사가 매우 급하여 침식력이 더 크므로 산세의 험한 정도나 골짜기의 깊은 정도에 있어서 외금강 쪽이 훨씬 뛰어나고 지역적 범위도 넓다.
그리하여 흔히 내금강은 온자우아(蘊藉優雅)하여 여성적이고, 외금강은 웅건수특(雄健秀特)하여 남성적이라고 비교한다. 금강산의 동쪽 해안에는 수원단(水源端)으로부터 구선봉(九仙峰)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석호(潟湖)와 기암이 어울린 해금강이 있다.
금강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는 지리적 위치에 따른 변화 많은 기상 조건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아왔다. 금강산에서는 높이와 동서 사면의 위치에 따라 기후 요소별로 차이가 많은데, 내금강에 해당되는 말휘리와 외금강과 해금강 쪽에 자리잡은 장전리의 기온과 강수량을 비교해 보면, 동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외금강 쪽이 내륙 쪽에 속하는 내금강보다 겨울 기온이 5℃ 이상 높고, 연교차는 2℃가 낮으며, 강수량이 훨씬 풍부하다. 금강산 동쪽 사면에서는 봄철에 덥고 메마르며 속도가 빠른 특이한 바람이 분다. 금강산 일대의 연평균풍속은 2.1m/sec이다.
대개 첫서리가 내리는 것은 10월 5일경이며 마지막 내리는 것은 이듬해 5월 13일경이다. 강수량이 많은 탓에 폭포와 못, 시냇물이 많으며 화강암 산지를 흐르므로 수정같이 맑은 물도 이 곳의 자랑거리이다.
동해안에 인접하여 비교적 습윤하고 따뜻한 지역에 속하는 금강산은 북부 계통의 식물과 남부 계통의 식물들이 바뀌는 지대로, 식물상이 무척 다채롭고 풍부하다. 빼어난 계곡미와 암석미에 더하여 암벽 사이를 수놓은 수목과 수림은 철따라 특이한 경승을 이루며, 곳에 따라 광대한 처녀림을 이룬 곳도 있다.
이곳에는 약 710종의 현화식물(顯花植物)을 비롯하여 금강산 특유의 식물과 고산식물이 무성하여, 우리나라 중부 산악식물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대표적인 수종으로는 소나무·잣나무·전나무 등의 침엽수와 단풍나무·벚나무·신갈나무·떡갈나무 등의 활엽수를 들 수 있다. 표고가 높은 산마루에는 누운잣나무·누운측백나무·만병초(萬病草)·들쭉나무 등도 있다.
특히, 금강산에는 금강초롱을 비롯하여 금강봄맞이꽃·금강국수나무·만리화(萬里花) 등 우리나라 특산식물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들 갖가지 식물들이 철따라 아름다운 자태로 산을 장식하여 금강산의 용태를 돋보이게 해준다. 금강산은 식생이 다양하고 풍부하므로 동물의 서식 조건도 좋아 여러 종류의 동물상을 유지하고 있다.
금강산에는 68종의 짐승류와 2백종의 조류, 9종의 파충류, 10종의 양서류, 30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 보고되어 있다. 특히 사향노루·노루·곰·산양 따위의 동물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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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열기역사와 문화유적
금강산에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만 『동국여지승람』 유점사조(楡岾寺條)에 월지국(月支國)에서 53불이 쇠북을 타고 이곳 해안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정주한 곳이 유점사의 터였다는 전설이 전할 뿐이다.
신라 진덕왕 때에는 네 곳의 영지(靈地)가 있어 나라에서 큰일을 결정할 때 이 영지에 모여 의논을 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네 영지 가운데에 금강산이 들어가 있으나, 거기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모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금강산에는 마의태자(麻衣太子)의 고사가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최후의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귀속하려 하자 태자가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과 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할 때에야 마지막을 맞을 것이지,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고 반대하였다.
부왕이 이에 응하지 아니하자 통곡을 하며 부왕과 작별을 하고,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베옷과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확인할 근거는 없지마는 태자묘라고 이르는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도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으나, 그저 ‘왕자 한 사람’이라 하고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간옹문집(艮翁文集)』에는 장안사(長安寺)에서 옥경대(玉鏡臺)로 들어가면 왼쪽에 절벽이 있는데 이 절벽을 명경대(明鏡臺)라 한다고 하고, 이어 대 밑에는 황천강(黃泉江)이 있고, 그 물 위쪽에 돌로 쌓아올린 옛 성이 있어 성문은 겨우 사람이 출입할 만한데 이 문을 지옥문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신라가 망할 때 마의태자는 수행자와 같이 이 안에서 살았고 지옥문 안에 있는 영원암(靈源庵)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강산 안에는 사찰이 많다. 속칭 금강산 4대 사찰이라고 부르는 유점사·신계사(神溪寺)·장안사·표훈사(表訓寺) 외에도 정양사(正陽寺)·보덕굴(普德窟)·마하연(摩訶衍)·도솔암(兜率庵)·장경암(長慶庵)·지장암(地藏庵)·관음암(觀音庵)·안양암(安養庵) 등 크고 작은 절이 많다.
이들 중에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암자도 있으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 있는 큰 사찰은 대부분 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들이다.
『조선왕조실록』 에 의하면 태종이 신하에게 묻되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금강산을 보고자 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니 하륜(河崙) 등이 아뢰기를 “『대장경』 속에 금강산 이야기가 실려 있어 널리 세상에 알려진 탓이다.”라고 하였다.
1372년(태조 5)에는 왕명으로 강릉의 쌀 6백 석을 금강산 안의 여러 절에 나누어준 일이 있고, 1374년에는 천재지괴를 막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에 법석을 개설한 일이 있었다.
세종 때 산수의 승지가 아닌 곳의 사찰은 없애는 한편, 금강산 장안사를 선종에, 정양사를 교종에 속하게 하고, 장안사는 큰 절이기 때문에 흥룡사(興龍寺)의 토지 150결(結)로는 공양에 부족할 것이므로 150결을 더 준다고 하였다.
역대 왕 중에서 금강산을 탐승한 이가 드문데 세조는 금강산을 다녀갔다. 곧, 세조 12년 2월에 금강산 온정리(溫井里)의 행궁(行宮)을 수축시키고 금강산 순행길에 올라, 3월 21일에 장안사에 들렀다가 정양사를 거쳐 표훈사로 가서 간경도감(刊經都監)에 명하여 수륙회(水陸會)를 설하게 하고 호조에 명하여 쌀 3백 석, 찹쌀 10석, 깨 20석을 금강산 안의 여러 절에 나누어주었다.
조선조에는 외국인의 금강산 유람이 쉽지 아니하였다. 성종 때 일본의 중이 외교사절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금강산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간청하자, 조정에서는 여러 번의 중신회의까지 열었으나 찬반이 양립하였다.
이 때 반대 의견은 외국인에게 국토를 깊숙이 보이는 것은 군사상으로 불리한 일이고, 외국인의 탐승에는 많은 사람이 동행하여야 하므로 각 고을에 민폐가 크며, 이것이 뒷날 관례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찬성하는 편에서는 국제간의 친선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외국 사람들조차도 이렇게 금강산을 보기를 소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강산의 유물·유적은 거의 전부가 사찰들이고, 간혹 경치 좋은 곳에 옛 사람들의 필적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사찰 가운데에서도 역사가 오래되고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만을 골라 그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점사는 금강산에 있는 모든 사찰의 본산이다. 1466년에 세조가 유점사에 왔다가 승 학열(學悅)에게 중건을 명하여 거찰이 되었다.
법당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고, 절 앞 계류를 가로질러 세워진 산영루(山映樓)도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쓴 대종기(大鐘記)가 있다.
전각 안에는 53금불과 각향목(刻香木) 상천축산(象天竺山)이 있고, 마당에는 13층석탑이 있는데 돌빛이 푸르고 솜씨가 정교하다. 이 밖에 패엽서(貝葉書)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필 및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쓴 불경 한 권이 소장되어 있다.
표훈사는 670년에 표훈(表訓)이 창건하였으나, 1457년에 세조가 보수하여 그 규모가 일신되었다. 1890년에 화산(華山)이 반야전(般若殿)을 중수하였고, 1893년에 형령(衡靈)이 영산전(靈山殿)을 창건하였다.
내금강 만폭동(萬瀑洞) 동구에 있다. 이곳에 원나라 영종(英宗)이 세운 비가 있는데, 영종이 그의 태후·태자와 함께 보시(布施)를 하였던 곳이다. 장안사는 표훈사 아래에 있는 내금강의 거찰로 514년에 진표(眞表)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그 뒤 990년(성종 1)에 회정선사(懷正禪師)가 대웅보전·삼여래사보살사성전·석가모니불십육나한존상·명부전·지장보살십육왕존상 등을 중건 또는 조성하였다. 고려 충혜왕 때 원나라 기황후가 관원을 고려에 파견하여 굉하(宏下)와 함께 장안사를 중건하게 하였다.
이 때 중건된 건물은 대웅보전·사성전(四聖殿)·명부전·신선루·수정각(水亭閣) 등과 여러 요사들이다. 또, 1791년(정조 15) 순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여러 요사를 비롯하여 어향각(御香閣)·적묵당(寂默堂)·설선당(說禪堂)·장경암·영원암 등을 중수했다.
그 뒤 조선 말기에도 석담(石潭)이 지장암을 세웠고, 그 뒤에 심공(心空)이 비로전(毘盧殿)과 극락전을 세웠다. 정양사는 표훈사 북쪽에 있는 절로, 이 터가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위치하고 있어 그 이름을 정양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672년에 회정선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하며, 1459년(세조 5)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이 절에 봉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수하였다. 그 뒤에 보우(普雨)가 왕의 하사금을 받아 절을 보수하고 서적들을 보관하였다.
정양사에는 헐성루(歇惺樓)가 있어 여기에 올라가면 뭇 산봉우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이 절의 육면전(六面殿) 안에는 석구약사상(石軀藥師像)이 안치되어 있고 사면 벽에는 천왕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덕굴은 만폭동 안에 있는 암자로 규모는 크지 아니하나 특이한 구조로 해서 금강산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암자는 절벽의 일부를 뚫어 거기에 널쪽을 걸치고, 이 널쪽이 떨어지지 않게 밑에서 구리 기둥으로 받친 다음 그 위에 지은 것이다.
구리 기둥만으로는 암자가 지탱되지 않으므로 암자 위쪽 암석에 구멍을 파고 쇠말뚝을 박아 쇠사슬로 암자와 연결시켜 놓았다.
정동(鄭同)이라는 중국 사신이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보덕굴을 보고 참 불계(佛界)가 바로 여기라 하고, 죽어 다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길이 이 불계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마하연은 신라 시대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그 뒤 월송(月松)이 중건한 절이다.
도솔암은 유점사 북쪽 2㎞ 지점에 있는 암자로, 1535년(중종 30)에 금강산 승려인 성희(性熙)가 창건, 요사와 극락전을 짓고 불상 7구를 봉안하였다.
알려진 유물로는 극락전의 순금미타회(純金彌陀會) 1점, 서방구품회(西方九品會) 1점 외에 지지천장지장삼보살진(持地天藏地藏三菩薩眞)·천선신부이십사중(天仙神部二十四衆)·어람보살수묵진(魚藍菩薩水墨眞) 등이 있다.
이들 불화는 모두 당나라의 화가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라고 한다. 불화 이외의 유물로는 삼족동로(三足銅爐)와 고동병(古銅甁)이 있다.
묘길상(妙吉祥)은 마하연에서 동쪽으로 계류를 따라 내무재령(內霧在嶺, 1,275m) 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는 금강산 내의 최대 석불이다. 거대한 암벽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미륵보살이 부조되어 있다.
높이 약 16m, 연좌(蓮座)의 길이 약 10m이며, 앞면에는 삼단의 석계가 있고 그 석계 위에 석등이 하나 있다. 고려 때 나옹(懶翁)이 원불로 조성하였다 한다.
금강산은 암석산인데다 경관이 좋아 암석에 글씨를 써서 각자한 것이 많다. 그 중 내금강에는 만폭동에 있는 양사언(楊士彦)의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고 쓴 초서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속설에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냥이라면, 그 중의 오백 냥은 양사언의 이 글씨 값”이라는 말이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글씨의 크기로는 외금강 구룡폭(九龍瀑) 절벽에 새겨져 있는 ‘미륵불(彌勒佛)’이라는 글씨가 으뜸이다.
금강산 안의 문화 유물 중 일제 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는 장안사사성전·유점사금동석가여래입상·유점사금동보살입상·금장암지사자삼층석탑(金藏庵址獅子三層石塔)·금장암지석등·남보현사지목조소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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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열기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금강산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산으로 경관이 뛰어나 예로부터 시가나 문장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고려 시대 이전까지 금강산을 표현한 시문은 남아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지어진 한시문들이 약간 전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이다.
이 글은 지은이가 1349년 가을에 개성을 출발하여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금강산 배점(拜岾)을 거쳐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에까지 탐승한 기행문이다.
금강산 기행문에 나타난 탐승 노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안사를 기점으로 내금강에서 들어가 외금강으로 빠지는 노정이요, 다른 하나는 반대로 유점사를 기점으로 외금강에서 시작하여 내금강으로 빠지는 노정이다.
이곡의 「동유기」는 전자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는 성현(成俔)의 「동행기(東行記)」와 남효온(南孝溫)의 「금강산기(金剛山記)」가 있다.
1485년 4월 15일 서울을 떠나서 만경대(萬景臺)·보덕굴·금강대 등 금강산의 승경을 살피고 그 경관과 느낌을 기록하였다. 이이(李珥)의 금강산 관유기로 「풍악행(楓嶽行)」이 있다. 이 관유기는 금강산을 관유하면서 지은 오언삼천구의 장시이다.
이이는 금강산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사람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곳까지 속속들이 답파한 끝에 이 시를 지었으므로 그 내용이 퍽 상세하다. 이정구(李廷龜)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도 금강산 기행문으로, 함경도 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고성에 와서 외금강에서부터 탐승에 올라 내금강을 거쳐 단발령으로 나오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정곤수(鄭崑壽)의 「금강록(金剛錄)」은 고성에서 출발하여 유점사 승려들의 가마를 타고 금강을 탐승한 기행문인데, 끝에 칠언율시 한 수로 그 감회를 포괄하였다. 인조 때 이경석(李景奭)이 금강을 탐승한 기행에 「풍악록(楓嶽錄)」이 있다.
이 글은 산문과 운문을 섞어 쓴 것으로, 산문으로 서술하다가 정감이 고조되면 군데군데 절구나 율시를 섞어 놓았다.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 쪽에서 탐승을 시작하여 외금강유점사 쪽으로 나온 일기체 기행문이다.
한문 기행으로서는 장문이어서 금강산의 경관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숙종 때 김창협(金昌協)의 「동유기(東遊記)」도 일기체로 된 금강산 기행문이다. 전 노정을 몇 개의 단락으로 갈라서 서술하고 있다. 그 노정의 단락은 경성∼회양, 회양∼장안사, 장안사∼표훈사 등 모두 12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으로 빠져 통천의 총석정을 보고, 다시 추지령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노정 중심이 아니라 경관 중심으로 단락을 설정한 기행문으로는 한말의 이상수(李象秀)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가 있다.
법종(法宗)의 「유금강록(遊金剛錄)」은 지은이가 승려이기 때문에 경관에 대한 서경 이외에 산내 사찰의 불교 유적도 깊이 언급하여, 유생들의 기행문과는 정취를 달리하고 있다.
금강산을 읊은 한시는 지금까지 전하는 것만도 대단히 많다. 금강산 유람객 가운데 한시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면 으레 몇 수씩 지었을 것이니, 실제 지어진 편수는 엄청난 양에 이를 것이다.
1928년에 발간된 『신민(新民)』 8월호인 ‘금강산호’에 실려 있는 한시만 해도, 고려의 이곡·이색(李穡)·안축(安軸)을 비롯하여 조선조의 수많은 문인들의 한시가 실려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단일 승지로서 한시문에 가장 많이 표현된 것이 금강산일 것이다.
가사문학이나 시조에도 금강산을 노래한 것이 있다. 가사에는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가운데 “개심대(開心臺)고텨 올나 중향성(衆香城) 바라보며 만이천봉을 역력히 혀여ᄒᆞ니 봉마다 ᄆᆡᆺ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ᄆᆞᆰ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ᄆᆞᆰ디 마나…….”라고 서술한 것이 금강산 묘사의 일부이다.
시조로는 안민영(安玟英)의 “금강 일만이천봉이 눈 아니면 옥이로다/헐성루 올라가니 천상인 되였거다/아마도 서부진화부득(書不盡畫不得)은 금강인가 하노라.”를 비롯하여, 사설시조에도 더러 나오기는 하나 그 양은 한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개화 이후 민족적 자각과 함께 세계적 명승지인 금강산을 예찬하는 시문이 부쩍 늘어났다. 그 중 이은상(李殷相)의 시조 「금강행(金剛行)」은 그 일부가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읊어졌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운무 데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요//이 몸이 싀어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댄/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랏다/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과져.”가 그것이다.
수필이나 기행문 가운데 몇 편을 골라보면 최남선(崔南善)의 「금강예찬(金剛禮讚)」이 널리 알려진 글의 하나이다. 이 글은 서사에 이어 금강산을 편력하면서 그 자연과 문화를 76단락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기술했다.
아마도 금강산 탐승기로서는 역사상 가장 길고 넓고 깊은 글일 것이다. 분량으로 보아서 이와 거의 엇비슷한 것에 이광수(李光洙)의 「금강산유기」가 있다. 이 글은 『신생활(新生活)』 1922년 3월호부터 8월호까지에 실렸던 일기체의 기행문이다.
「금강예찬」이 역사나 경관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서술인 데 비해 「금강산유기」는 역사나 경관을 서술하면서 주관적인 심회를 사이사이에 시로 엮어놓은 특징이 있고 필요할 때에는 대화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정비석(鄭飛石)의 금강산 기행문인 「산정무한(山情無限)」이 있다.
내금강에서 외금강에 걸친 금강산의 경관과 감회를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한편, 학자가 쓴 글로는 문일평(文一平)의 「동해유기(東海遊記)」가 대표적이다. 고대와 현대를 통해서 단일한 자연물이 이처럼 많은 글로 표현된 것은 금강산이 으뜸일 것이다.
금강산을 접해본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저 경치 좋은 자연이라기보다 조물주가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창조한 예술 작품으로 느끼게 된다. 지난날 일본의 수많은 화가들이 금강산을 그려보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단 한 폭의 명작도 남기지 못했다. 모리타[守田龍光]라는 화가는 이러한 말을 남기었다.
“금강산의 경치는 전연 상상 이상의 것으로, 화가의 머리로는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우리들은 이 진경에 접하면서 드디어 당황하게 되며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된다.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 왼쪽을 보아도 그림, 앞도 뒤도 그림이며, 또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변하는 데 있어서 고만 붓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동양 산수화는 화가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산수를 그리는 것인데, 화가들이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산수가 금강산이다.
시로써 읊을 수 없는 시경이 금강산이요, 붓으로 그릴 수 없는 그림이 금강산이지만, “금강산을 읊은 시를 다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도서관을 하나 채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최남선은 말했다. 금강산 그림 또한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미술관이 몇 개 될 정도로 많다.
금강산을 주제로 한 미술 자료는 거의 전부가 금강산도라고 불리는 회화 자료로 전해져 있으므로, 결국 금강산도가 금강산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금강산도는 금강전도·금강팔경도·금강십경도·금강십이경도 등의 화제로써 마련된 큰 규모의 병풍화체로도 나타나고, 선면화(扇面畫)·편화·판화·족자·화첩 등 소규모의 작품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전도란 두말할 것 없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담은 전경도를 뜻한다. 연결식 병풍으로 꾸며지는 것이 상례이지만, 선면화나 족자화로 축소, 집약된 소품으로도 그려진다. 이에 비하여 금강팔경도는 금강산 중에서도 이름난 명소풍경을 선택하여 각 폭 병풍체로 꾸며진다.
관동팔경도와 같이 8개 명소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단발령·만물초(萬物肖)·만폭동·해금강·총석정·구룡연·옥류동·명경대·은선대·묘길상·보덕굴·정양사·비로봉·마하연 등의 명소 중에서 선택하고 있다. 화풍상으로 금강산도는 정통화체·민화체·판화체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리고 연대적으로 본다면 남아 있는 자료들이 모두 조선조 중엽 이후의 것이므로 그 이전의 것을 알아볼 길이 없으며, 기록상으로도 뚜렷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백제 시대의 산악문전(塼)에 새겨진 그림 모습이 조선 후기의 민화체 금강산도와 일맥 통하는 점은 있으나, 그것을 금강산도라고 귀결지을 근거는 없다.
따라서, 금강산도의 역사적 흐름이란 정리할 도리가 없으며, 조선조의 작품을 가지고 특이한 한국의 금강산도가 보여주는 예술적 특성과 정신적 배경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정통화를 중심으로 볼 때 금강산도 하면 먼저 정선(鄭敾)을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정선은 금강산도의 대표적 작가이기 때문이다.
정선은 중국류의 상상적 산수화 기법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실경을 화제로 삼아 새로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를 창작하여 18세기 화단의 선봉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금강산도 창작에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속필수정체(速筆水晶體)의 골선준법(骨線齧法)은 하나의 새로운 산수화법을 이루었고, 후세에 많은 화가들이 그것을 본받았다.
정선은 금강산 전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금강산의 구석구석을 사생해 왔고, 그에 따라서 금강십경도나 십이경도의 병풍을 많이 그렸다.
때로는 20여 척의 거대한 화폭에 일만이천봉 전부를 배치하여 금강전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러한 대작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정선의 마지막 작품은 금강전도의 선면화로서 마무리된 감이 든다.
옛날 화평에 “만이천봉일파중(萬二千峯一把中)”이라 하였는데, 이 짤막한 화평이 정선의 착상을 적중시킨 것 같다.
정선 이외에도 김홍도(金弘道)·최북(崔北)·이인문(李寅文) 등 당시의 일류 산수 화가들이 금강산도의 명작들을 남겼으니, 골선체 금강산도야말로 18세기의 한국 화단이 동양화에 기여한 독창적인 산수화라고 하겠다.
조선조 말기에서부터 일제 강점기를 통하는 동안 근대화된 금강산도가 많이 성행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서 김규진(金圭鎭)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큰 글씨만 쓴 것이 아니라 큰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으로 창덕궁 희정당에 6×30자의 벽화인 「금강산도」가 남아 있다. 순종의 어명을 받아가지고 3개월 동안 금강산에 들어가서 진경을 사생한 뒤에 이루어진 거작이다.
비교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금강산도 작가로는 김의식(金義植)·박남곡(朴南谷)·황현룡(黃見龍) 등을 들 수 있다. 김의식은 화려한 채색화로써 특히 풍악을 즐겨 그렸고, 박남곡은 추상적인 담색화로 그 특징을 나타냈으며, 황현룡은 민화풍의 환상화체로 기상천외의 명작을 남겼다.
다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금강산도의 민화 자료라고 믿어진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민화 발굴 운동에 의하여 그 자료가 광범위하게 수집되고 그 미술사적 가치가 발견된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민화인 금강산도에는 낙관이 없으므로 그 작가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실용을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거의가 다 병풍화로 꾸며져 있으며, 화제로서는 정통화의 경우와 같이 금강전도·금강팔경도·금강십경도 등이 압도적이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오월단오 때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부채에 그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정초에 세화(歲畫)가 유행했듯이 단오 때는 단오화가 유행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금강산을 죽기 전에 한번은 올라야 한다는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금강산도가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민화로서의 금강산도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미술 의식보다도 금강산의 민족적·종교적 상징성에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의 영산으로서의 존재는 불교·도교·유교·무교 등 우리나라에 정착한 모든 종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난다.
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이나 바위 이름, 건축물의 이름을 보아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불교는 압도적으로 금강산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 사상이 금강산 민화의 절대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 민화 자료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정신적인 배경은 다름 아닌 만물정령관(萬物精靈觀)의 원시신앙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산신 숭배나 암석 숭배 같은 원시신앙이 바탕이 되어 환상적인 금강산도의 민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따라서, 금강산 민화의 미술적 특색은 첫째, ‘정령주의’의 반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모습을 부처·보살·승려·나한·인왕 같은 형상으로 그렸는가 하면, 신선·선녀·도사 같은 도교계의 신상으로도 나타내었고, 효자·애기어머니·군자상으로도 표현하였다.
또한 호랑이·용·사자·무당 같은 형상으로도 표현하였다. 조물주의 우주 창조를 위한 모델의 집합소라 하여 불리게 된 만물초라는 별명을 그대로 조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둘째, 추상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때로는 현대 추상화를 앞지를 기상천외의 명작도 많이 나타난다. 사실적인 노력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전연 실경과는 다른 공상적인 미술적 창작이 뚜렷하게 결실된 것이다.
셋째, 정통화의 골선체 기법을 추종하고는 있지만, 완필법(緩筆法)을 구사하여 무늬그림[文樣畫]을 창조해냈다는 점이다.
넷째, 관광 안내도와 흡사한 지도화(地圖畫)로 일관되고 있어서, 산봉·계곡·폭포·건물 등의 명칭이 빨간색으로 기입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민화가 실용을 목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을 나타내준다.
민화와 병행하여 단색 목판화도 성행했을 것이나 유점사목판화 이외에 판화 자료가 없으므로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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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자원으로 으뜸가는 것은 관광자원이며, 일부 광산자원과 임산자원도 있다. 금강산 일대의 지하자원으로 손꼽히는 것으로는 중석·금·수정·수연(水鉛) 등이다. 이 가운데 중석은 매장량이 많기로 유명하고, 비로봉 북쪽의 외금강 여러 곳에서 생산된다.
통천군 임남면의 구하동 일대와 선창계(仙蒼溪), 천불동 일대에 중석광산이 집중되어 있으며, 회양군 장양면에 속하는 신풍리와 금전동, 상등봉 일대 등 관음연봉(觀音連峰) 서쪽에도 중석광구가 개발되어 있다.
상등봉 서남쪽의 구성동계곡에는 수연광산이 있다. 금강산 일대의 주요 산물로는 머루·다래 등의 산과일, 고비·도라지·족두리풀 등의 산나물과 약초가 대표적이다.
금강산의 관광자원은 자연의 걸작인 만물상을 비롯하여 구룡폭포·무봉폭포(舞鳳瀑布)·비봉폭포(飛鳳瀑布)·수렴폭포(水簾瀑布)·옥류동·만폭동 등의 수많은 폭포와 담수, 그리고 망군대(望軍臺)·명경대·귀면암(鬼面巖)·삼선암(三仙巖)·마석암(磨石巖)·육선암·칠보대·은선대 등의 기암망대(奇巖望臺)가 발길 닿는 곳마다 훌륭한 경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어울려 세워진 대가람(大伽籃)으로 장안사·표훈사·정양사·유점사·신계사 등이 천년의 법등(法燈)을 지켜 왔으며, 20여 채가 넘는 사찰의 건축미는 그 옛날 팔만구암자의 정사를 미루어볼 수 있게 하고, 빼어난 조화를 이룬 산봉우리와 계곡, 사찰에 얽힌 전설과 사화는 더욱 금강산의 관광 가치를 높여준다.
예로부터 삼신산의 하나로 꼽던 성산(聖山)인 금강산은 신라 시대에 화랑도들이 심신을 수련하였던 곳이며, 불교도들의 순례지로도 유명하였다.
크고 작은 사찰이 108개나 있었다고 하며, 불교와 관련된 산봉우리도 많아 지장봉(1,381m)·석가봉(946m)·세존봉(世尊峰, 1,122m)·관음봉(453m)·천불산(654m)·대자봉(大慈峰, 362m)·미륵봉·칠보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금강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산맥능봉선(山脈稜峰線)과 비로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선에 의하여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이 내금강, 동북쪽 부분이 외금강, 동남쪽 부분이 신금강(新金剛)이며 동쪽 해안이 해금강이다.
내금강은 능허봉(凌虛峰, 1,456m)·영랑봉·비로봉·월출봉·일출봉·내무재령·차일봉·백마봉 등으로 연결되며, 촛대봉(燭臺峰, 1,148m)·중향성(1,396m)·지장봉·시왕봉(十王峰, 1,147m)·백운대(1,105m) 등 가파르고 높이 솟은 봉우리와 금강산 계곡미의 상징이라 할 만폭동골짜기를 비롯하여, 백천동골짜기·태상동골짜기·구성동골짜기 등 아름답고 이름난 계곡이 많은 곳이다.
금강산 전기 철도의 종점이었고 금강산관광의 기점이었던 장안사로부터 동금강천을 거슬러 오르면서 표훈사와 금강문을 지나면 약 2㎞ 규모의 만폭동이 시작된다. 이곳에는 분설담·흑룡담·벽하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 등의 만폭팔담(萬瀑八潭)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사자바위·마하연암·묘길상·사선교(四仙橋)가 나오며, 백운대에서는 중향성과 만폭동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일만이천봉과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로서, 금사다리 은사다리로 불리는 절경을 끼고 있으며, 꼭대기에 평탄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바람이 심하여 나무들이 모두 옆으로 뻗어 있는데, 누운잣나무·누운향나무·누운측백나무가 많고 만병초 따위의 고산식물도 많다.
비로봉 북서쪽의 구성동 골짜기에는 가막소·봉의대·사자관(獅子關)·조양폭포(朝陽瀑布) 등 명소가 있다. 조양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구룡폭·십이폭·비봉폭·조양폭)의 하나로, 너비 3m에 높이 31m의 2단 폭포이다.
장안사에서 동쪽의 지장봉 쪽으로 뻗어 있는 백탑동과 수렴동계곡에는 높이 70m에 너비 10m의 거울처럼 매끈한 암벽인 명경대를 비롯하여, 황천담·옥경대·옥초대·반야대·수렴폭포·망군대·영원암 등이 있으며, 또한 다보탑이라고 불리는 50m 높이의 천연 석탑도 남아 있다.
외금강은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옥녀봉·상등봉·온정령(溫井嶺, 858m)·오봉산을 잇는 산능선과 남동쪽으로 채하봉을 이루고 뻗은 산줄기 사이에 자리잡은 문주봉(文珠峰, 906m)·수정봉(水晶峰, 773m)·세존봉·집선봉(集仙峰, 1,351m) 등 아름다운 산봉우리와 곳곳의 깊은 계곡이 장엄하고 기세찬 산악미를 보여주는 곳이다.
기암괴석이 온갖 모양을 다 갖춘 만물상의 여러 봉우리와 톱니 모양의 빼어난 봉탑(峰塔)을 이룬 관음연봉은 온정천이 침식한 한하계(寒霞溪)와 함께 장관을 이루고 있다. 신계천이 침식한 구룡연계곡에는 금강문·옥류동·연주담·비봉폭포와 연주폭포·구룡폭포·비사문(飛沙門)·상팔담(上八潭)이 계곡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구룡폭포는 금강산의 대폭포일 뿐 아니라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높이 74m, 너비 4m이다.
폭포 아래에는 깊이 13m의 구룡연이 있다. 구룡폭포 위에 있는 8개의 맑고 푸른 못이 상팔담이다. 금강산의 산악미가 돋보이는 만물상은 온정리에서 한하계 골짜기를 따라 온정령 가까이 올라가서야 시작된다.
첫사자목과 전망이 좋은 습경대·귀면암·삼선암·하늘문·천선대가 있고, 유선암 주변의 오만물상(奧萬物相) 쪽에는 연주폭포(連珠瀑布)·이단폭포(二段瀑布) 등이 있다.
온정령은 외금강의 산악미와 온정천의 계곡 풍경, 동해와 해금강의 원경, 내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수정봉에는 금강산 최대의 아치형 천연 석교가 있으며 수정도 많이 나온다.
신금강은 내금강의 동남쪽, 외금강의 남쪽 부분으로서, 은선대·칠보대·십이폭포·직류폭포·채하폭포·바리소·무지개다리·송림굴·송림사·소연소·구룡소·선담(船潭)·유점사·반야암(般若庵) 등의 명소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십이폭포는 높은 벼랑을 열두 번이나 꺾어서 떨어지는 너비 4m, 높이 289m의 놀라운 폭포로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다.
전반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 등의 울창한 원시림이 돋보이며, 53불의 전설을 가진 유점사는 미륵골의 초입이 된다. 성문동계곡(聲聞洞溪谷)이라는 송림사 골짜기에 바로 십이폭의 비경이 숨어 있다. 해금강은 금강산이 동해로 뻗은 명승으로, 통천의 총석정을 포함시키고 삼일포와 해만물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식지형이다.
총석정은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무수히 발달한 기반암이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며, 삼일포는 사주에 의하여 이루어진 석호로서 넓이가 0.79㎢인 아름다운 호수이다.
총석정과 삼일포의 빼어난 경관은 예로부터 관동팔경에 손꼽혔던 것이며, 호수 가운데 있는 와우도와 사선정터·무선대·단서암 등은 호수 경관을 돋우어주며, 장군대·봉래대·연화암·연화대·몽천(夢泉) 등의 명소가 있다.
삼일포에서 약 4㎞ 동쪽의 남강 하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해금강에는 송도·불암 등의 섬과 사공바위·칠성바위·입석 등의 해식애와 해식암초가 장관이다. 특히, 금강산에서 본 만물상을 바다에서 다시 보게 된다는 느낌을 주는 해만물상은 수정같이 맑은 물 밑으로 물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수중 만물상이 계속된다.
또한 이와 더불어 해초류와 어류 등 생물체의 활동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만물상의 대표적인 모양은 배바위·사공바위·동자바위·서적바위·사자바위·고양이바위·잉어바위 등으로 수없이 많다.
금강산이 천하의 명산이라고 일러온 것은 우리가 우리 국토를 자랑하기 위하여 과장한 말만은 아니다. 중국 사람 중에도 “바라건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한번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한 이가 있었다. 그 명성은 일찍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설사 이 이야기가 한 속설로서 근거가 없다 할지라도, 『태종실록』 권8에는 태종 4년 갑신 9월 기미에 왕이 하륜·이거이(李居易)·성석린(成石璘)·조준(趙浚)·이무(李茂)·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금강산을 보려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은 대목이 있다.
또한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이 금강을 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으로 “이적선(李謫仙)이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라고 한 글도 있다.
이러한 글로 보아서도 금강은 천하의 명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산세가 빼어나다 보니 물이 맑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경관이 달라져 그에 따른 명칭이 따로 있는 산은 금강산 이외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산이 많은 국토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산을 범연한 하나의 자연으로 보지 않고 산을 신성시했으며, 그 신성의 정도는 산세가 웅장하거나 빼어날수록 더하였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그 배경이 산으로 되어 있어 환웅(桓雄)이 하강할 때 평지 아닌 태백산정으로 내려왔으며, 단군이 왕이 되어 옮겨간 서울도 백악산(白岳山)이고, 단군이 죽은 뒤에도 아사달(阿斯達)의 산신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이름 있는 산 다섯을 택하여 그 산에 오악산신(五岳山神)을 두고 이것에 제향을 받들게 하였다. 이렇게 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의 원초 속에 신성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최남선은 백두산에 오르고 그 등산기 이름을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라 하였다. 여기서 ‘근참’이라는 말은 삼가 절하고 뵈옵는다는 말로, 종교적 외경심이 깔려 있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산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낱 이름 없는 산에 대하여도 범연치 아니하였으니 하물며 금강산이랴. 본 사람은 본 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보지 못한 대로, 외경과 동경과 경건한 마음을 품는 산이 금강산이다.
수려한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적 자랑의 표상이요 국토애의 원천이다. 내금강 쪽에 배점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내금강의 천봉만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 배점에 오른 사람은 막대를 놓고 삼가 금강산의 산봉들을 향하여 절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선인들의 금강산 관유기를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것을 들라고 하면 누구나 그 첫 번째로 꼽는 것은 금강산이라고 하였다.
금강산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 산으로 해서 민족의 의식이 굳고 이 산 때문에 민족적 자긍이 높아지고 있다면, 금강산은 확실히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한국의 산하는 한국 민족의 역사의 장이요, 사상과 정서의 갈피이며, 철학이다. 이 속에서 민족의 정서는 가다듬어졌고 사상은 영글어 왔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산은 경제적 효용성으로 그 값을 따질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앞세워야 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금강산은 우리 민족의식의 샘터이다. 금강산은 봉들이 수려하기 때문에 풍겨 주는 영기(靈氣)가 있고, 그 영기는 산의 영기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영기로서 승화되고 있다.
금강산의 봉 하나, 계류 하나를 우리가 아끼는 것은 그 경관이 승화되어 경관 뒤에 숨어 있는 영기가 주는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산동연해(山東沿海)는 고대로부터대외적 해상교통이 빈번하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해상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며 해상의 신화와 전설도 풍부하였다. 전국시대 말년에 제(齊) 나라와 연(燕) 나라 지방에서 신선방사파(神仙方士派)의 학설이 생겼다. 그들은 해상에 세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봉래(蓬萊)와방장(方丈)과영주(瀛州) 이며 이 산속에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선약(仙藥)이 자라고 있으며 수 많은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당시 진시황이 16 국(國)을 통일한 후 진시황은 산동연해를 여러 차례 순방하였다. 진시황은 랑아대(瑯邪臺)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 진시황은 제(齊) 나라 사람 서복(徐福)에게3000명의동남동녀(童男童女)를 대동하고 사수(射手)와 백공(百工)들과 함께 배를타고 바다로 항해하여 신선들을 찾고 선약을 구해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연(燕) 나라 사람 로생(盧生)과 화한종(和韓終)과 후공(侯公)과 석생(石生) 등도 신선을 찾고 불사약을 구하여 오라고 명을 받았다. 서복(徐福)은 삼 천 명의 동남동녀를 대동하고 항해하다가 해상에서 섬을 발견하고 거기서 머물러 살며 돌아오지 않았다. 로생과 후공 등은 항해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도주해 버렸다. 해상에 있는 삼산산이란? 봉래는 일본열도(日本列島)를 가리키고 방장은 제주도(濟州島)를 일컬으며 영주는 유구도(琉球島)를 일컫는다고 고증(考證)되었다. 일본열도의 서부 해상은 멕시코의 난류와 북해도의 한류가 서로 만나는 곳이다. 바다 속에서 한류와 난류가 서로 부딪혀서 좌선회류(左旋回流)되는 곳이다. 그리하여 산동반도에서 출발한 목선(木船)들은 일본열도 남부의 구주(九州)에 도착하면 해안을 따라서 항해 할 수 없다. 그래서 목선들은 어쩔수 없이 열도의 서안(西岸)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육지로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서복의 무리들이 도착한 지방은 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