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의 한 부분
이혼한 뒤 채차 싱글이 된 이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를 챙겨 보시던 분이 어느 날 뜻밖의 이야기를 해 줍니다. 출연자들에게 의외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출연진 중 정신과 약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용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안 먹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약을 먹게 된 젝각각의 구체적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약을 먹지 못하면 버티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혼"이 그 직간접적 원인이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실패감 때문인지, 깨어짐의 아픔 대문인지, 인간에 대한 회의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깨어짐 자체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자용하여 그들의 정서를 괴롭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 몸을 이루었던 이들의 해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자명합니다.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이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절대 안 돼!"라고 말하지는 않는 듯하나, 한결같이 부정적 뉘앙스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 "이혼"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이혼에 관해 성경이 언급한 구절들을 추적하면, 결국 여성을 소유이자 수단으로 대우했던 고대 사회의 뒤틀린 문화에 대한 저격이 우선되는 이유로, 또한 그렇게 갈라섰을 때 특히 여성에게만 생존의 위기가 찾아오는 문제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부정저 뉘앙스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존재 방시에 기인한 바가 아닐까요? 한 번이라고 한 몸을 이루었던 이들이 분리된다는 것은 산술적 나눔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깨어짐의 문제이기에 말입니다. 만약 하나였던 구체가 충격에 의해 두 조각이 난다면, 칼로 벤 듯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울퉁불퉁하게, 심지어 흉측한 몰골로 갈라지고, 그처럼 지저분한 면끼리 서로를 향하게 됩니다. 한 몸의 분리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분리는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까요? 과연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이보다 더 완벽히 하나 된 인간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들은 제도로서 "이혼"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것과 한 몸이었던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또한 이전에 누렸던 한 몸 이룸의 기쁨을 기억하는 상태로 그저 함께 살기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혹한 징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고통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죄책감으로, 혹은 "여기서 더 무너지면 어찌 살지.."라는 불안감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남자는 아담의 한 부분이고, 모든 여자는 하와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최초의 분리 이후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패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하나 됨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일어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 됨을 회피함으로 얻는 죄책감과 불안감 아래 짓눌리는 아이러니한 인생 패턴 말입니다. 남녀 간의 한 몸 이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듯, 인간과 인간의 "이어짐"은 진정 신비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이룰 만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호르몬이라는 신비의 도구를 통해 일시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곧 소멸될 이어짐일 뿐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로 우리는 이끄는 신비는 오직 "사랑"으로부터 발현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