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동정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택배 기사님들을 위한 간식 통이 있습니다. 고생하는 분들께 작은 기쁨을 드리고자 간식을 채워 어디서든 잘 보이는 엘리베이터 옆에 놓았는데 대성공이었습니다. 예상외로 다들 엄청나게 잘 가져갔기에 너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휴거라도 된 듯, 간식들이 일거에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기사님이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나 보다며 에둘러 넘겼는데, 자주 반복되다 보니 누군가 훔쳐 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가져가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아프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치지 않고 계속 채워 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났습니다. 간식과 음료가 휴거 된 것을 넘어,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 조각들과 새어 나온 음료가 흥건히 고여 있었으며, 심지어 그 위에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식 통을 예배당 안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설마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냥 가져가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하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간식 통 안의 간식만이 아니라, 예배당에 비치된 성도용 간식들마저 싹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 번 더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고민이 되었습니다.
"간식 제공을 지속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느끼는 이 불편감은 정당한 정의감인가, 시혜자의 오만함인가?" 고민하던 중에도 이런 사건은 계속되었고, 내 마음 역시 계속 어려워지자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 하는 화장실 안으로 간식 통을 옮겼습니다. 택배 기사님들은 번호를 알고 있기에 그리했습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휴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찜찜했습니다. 그래도 먹는 것을 화장실 안에 두는 게 맞느냐는 생각에, 무엇보다 "과연 그게 옳은 선택이었나?"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충분히 알더라도 가끔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힘이 다 빠져 그저 가라앉고 있는 상황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물에 빠진 지 오래된, 그래서 물 밖의 삶을 기억도, 상상도 못 하는 삶. 이런 서사 아래 있는 이들에게까지 동일한 잣대를 놓고 정의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실패했습니다. 훔쳐 가는 게 정상적인 것은 아니기에, 분명 이 사람이 아픈 것 같다는 의식은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 이해는 얕디얕았습니다. 흔히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이들이 지금껏 감내한 삶에서 얻은 상흔은 우리가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깊음이 분명합니다.
좀처럼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침잠의 경지입니다. 그래서 소위 "약자"라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내적 역동 가운데 언제라도 무너질 태세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와 같은 상태로 계속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고맙습니다"라는 말조차 돌려받을 수 없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누군가를 도왔는데, 마땅히 2,000원짜리 편의점 김밥이나 먹어야 하는 자가 20,000원짜리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의 삶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꼬락서니를 보면 좀처럼 참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정의입니다. 단 한순간이지만 내가 강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고, 또한 내가 누려야 할 것을 저 녀석이 빼앗아 갔다는 불공정 의식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나의 모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게 내 통제 아래에서만 이루어지길 원하며, 언제나 나는 강자의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 비뚤어진 사랑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긍휼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긍휼이 아닌 동정이었을 뿐입니다.
간식 통은 여전히 화장실 선반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그 간식 통을 마주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볼 수밖에 없는 그 간식 통이 내게는 영혼의 "비상벨"로 작용합니다. 그 비상벨을 볼 때마다 나는 동정이 아닌 긍휼의 관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