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 셋의 후예
창세 4,1-15.25; 마르 8,11-13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2023.2.13.;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반석이시고 우리를 구원할 성채이십니다(시편 31,3. 입당송). 반석이시오 성채이신 하느님을 당신 생애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그분이 보내신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한 14,6. 복음 환호송).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아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창세 4,8), 이스라엘의 율법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들은 어이없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미 일어난 기적들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기적을 자꾸 요구하였습니다(마르 8,11). 이처럼 진리는 예수님처럼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게 되는 사연은 으레 복잡한 편입니다.
농부였던 카인이 양치기였던 아벨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둘이 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는데, 카인이 바친 곡식 소출보다는 아벨이 바친 양의 맏배를 기꺼이 굽어보셨습니다(창세 4,4).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차별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에서 얻은 것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일은 양치기가 바친 양이건 농부가 바친 곡식이건 다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범한 살인죄의 단서는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느냐?”(창세 4,6ㄷ), 그러니까 카인과 아벨이 종사했던 직업이나 그들이 바친 제물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직업으로 그 제물을 바치기까지 지녔던 마음의 지향과 행위의 가치가 올바르지 않았었음을 하느님께서는 지적하신 겁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숨겨놓은 이 진실을 감춘 카인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트집을 잡은 셈입니다. 죄는 이렇게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 명쾌한 진리를 저버리고 복잡하고 그릇된 거짓을 일삼는 카인의 후예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으니,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숱한 기적을 일으켜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바라사이 자신들도 목격한 많은 기적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향해서 바리사이들은 또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마르 8,11)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그 모든 기적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고, 자신들이 인정할 수 있는 맞춤형 기적을 보여 달라는 생떼였으며 그래야 자신들도 믿어 주겠다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비상식적으로 억지를 부리며 까탈스럽게 굴던 그 자들에게는 더 이상 믿게 하려는 기대를 접으시고 그들을 버려두신 채 피해 가셨습니다. 요구가 복잡해지면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겁니다. 카인의 후예다운 행태였습니다.
카인이 동생을 죽여 저지른 죄를 창세기 저자가 기록해 놓은 뜻은 인류의 역사에서 벌어지는 죄악이 과연 어떻게 저질러지는가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원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카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께는 무디고 악에는 취약하며 자신의 이익에만 민감한 세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여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서도 우리는 경건하게 산다면서도 정작 선에는 무디고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인 고집을 부리는 고약한 ‘바리사이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죄의 현상에 대해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아마도 죄에는 예민할 정도로 취약한 현상 대신에 선에 대해서 오히려 민감할 수 있는 메시아 백성을 모으시고자 하셨습니다. 선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선에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힘은 선에 대한 영적 감각으로 거룩한 기운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메시아 백성이 되려는 진실한 지향으로 우리를 선에로 이끄시는 은총을 받아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거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가능한 한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도 사람들을 공동체로 모아서 할 수 있는 대로 함께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본기도). 그러면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사도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리사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
에덴의 동쪽으로 간 카인은 자신처럼 하느님께 무디고 선에도 무디지만 이익에만 민감하여 죄에 취약한 후예들을 세상에 널리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카인의 동생으로 태어난 셋은 노아를 비롯한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제사를 중시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문명을 세웠습니다.
사랑의 문명으로 나아가자면, 우리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현존을 믿고 특별한 기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선행을 하는 기적을 보여주겠다는 뜻을 세우면 됩니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면 우리의 생활양식과 행동양식이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작은 씨앗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단순합니다.
첫댓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보면서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오늘날의 불신자와 불가지론자를 떠 올립니다. 아울러 씨앗이 길위에, 돌덩이위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사람들도 생각납니다. 무언가를 받아야 믿겠다는 자들이 오늘날의 바리사이들이겠지요.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그 생명을 보호해 주시려 했던 하느님의 사랑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의 초기 공동체가 있었을 튀르키에와 시리아가 겪는 아픔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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