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역설을 살아가는 법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꽤 잘 어울리는 답변 가운데 하나가
‘역설을 살아가신 분’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그다지 영광스럽게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혼인도 아직 치르지 못한 처녀에게 잉태되셨으니 까요. 또 태어나신 예수님
곁에는 당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목동들을 비롯해, 심지어
동물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어부나 세리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 모욕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삶을 ‘실패한 삶’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실패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역설이 예수님 삶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분 가르침의 요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가난하고 굶주리며 미움 받고 울고 있는 이들은 행복하고, 오히려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있는 이들이 불행하다는 가르침은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역설은 우리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하느님의 행복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고 할 때 사용되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원래 마카리오스는 신들, 부자,
권력자처럼 모든 것이 풍요로워서 근심이 없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전혀 반대의 뜻으로 사용하십니다.
풍요로움이 아니라 빈곤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설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역설은 상식적으로는 부조리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옳은 모순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설은 우리가 우리의 상식, 우리의 부유함,
우리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에는 결핍, 모욕, 실패로
보이는 것들로 우리를 채울 때 삶의 참된 실체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설이 주는 행복함을 잃어버릴 때, 그럼으로써 상식의 세계로 넘어가버릴 때,
우리는 번영 신학과 같은 영적인 천박함에 빠지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본질인 겸손함과 고통을 잊어버린 채
세상의 부귀영화에 눈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이 품고 있는 역설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가난과 겸손은 비참과 비굴의 동의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삶 자체에 깃든 풍요로움에 대한 감각을 잊게 되었던 것입니다.
좀 더 우리가 예수님의 역설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글 : 金旻 Johan 神父 – 예수회(인권연대 연구센터)
사람 사이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저와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여 주시곤 합니다.
아내에게 반해 한국으로 온 저는 춘천에서 공부를 마친 후, 취업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이 있는 서울은 집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학생이었던 저에게 모아 놓은 돈이 있을 리 없었죠.
막막하기만 하던 그때, 춘천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서울에 사는 이모
댁에서 지내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도 친구지만 이모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조카랑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카 친구’를 받아주시다니! ‘왜?’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요?
당장 친구의 이모 댁으로 들어갔고 이모님은 남편과 세 아이까지 총 다섯
식구가 살고 있는 집에 기꺼이 방 하나를 내어 주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지내는 동안 월세나 식비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신 겁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세계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한국이니까 가능한 정(情)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문화의 정은
사람 사이의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느끼게 하는 문화라 생각합니다. 놀이터만 가도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간식을 나누어 주는 부모님이나, 무턱대고 찾아온
외국인을 조기 축구회에 끼워주는 아저씨나 모두에게 정이 있고,
그 사이에 하느님이 계신 거죠.
하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죠.
아내의 부모님은 신실한 개신교 신자십니다. 외국 사람인 건 둘째 치고,
천주교 신자인 사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내와 저도
이 부분이 고민이었는데 결혼을 결심하고 찾아뵌
‘저의 신부님’과 ‘아내의 목사님’이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치 두 분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씀을 해주신 겁니다.
그 말씀은 바로 “두 사람 사이의 주님을 사랑하세요.”였습니다.
‘나의 하느님’,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저희 둘 사이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셨죠.
저희 둘은 해답을 얻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이었기에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뭉클해집니다.
저희는 신부님과 목사님 두 분을 모두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고, 그 이후부터
저는 더 깊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 사이는 물론이고 전혀 다른 모습, 다른 성격, 다른 문화의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또 다른 종교, 다른 인종, 다른 국가의 사람 사이에서도
말이죠. 그 모든 사람 사이에는 분명 하느님이 계십니다.
글 : 알베르토 몬디 – 放送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