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을 거룩함으로 변화시켜라
에제 18,21-28; 마태 5,20-26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23.3.3.; 이기우 신부
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황금율을 통해서 이웃 사랑의 최소한(最小限)과 최대한(最大限)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남이 우리에게 해 주지 않기를 바라는 싫은 일은 우리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최소한은, 공정과 정의를 위해 규정된 법률을 지키고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질서를 준수하는 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또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좋은 일은 먼저 우리가 남에게 해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최대한은, 에스테르나 유관순 그리고 안중근 같이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한 위인들의 삶에서 배웁니다. 이것이 황금율이 알려주는 이웃 사랑의 범위인데, 오늘의 말씀은 그 이웃 사랑의 깊이에 대해 묵상하게 해 줍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또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빛처럼 사람들을 비추어서 사람들이 그 사랑을 보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하느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보다 많다는 것은 아직도 믿는 이들이 이웃 사랑으로 보여주는 하느님 사랑이 그들을 믿게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뜻일 겁니다.
에제키엘은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사랑의 최소한이란 사회생활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행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불공정하고 불의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특히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적은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이든 권세든 재산이든 또는 믿음이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가진 이들이 이들의 처지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공정함과 의로움은 기본입니다. 에제키엘이 예언한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면, 공정과 정의는 악인이라도 과거에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이를 실천하면 살 수 있고, 의인이라도 이를 어기면 죽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구원의 잣대입니다(에제 18,26-28).
예수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호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사랑의 최대한은 그 자신이 하느님께 대하여 지닌 믿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관계를 복음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중요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회생활에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이 과제도 만만치 않은 기본 과제이지만, 누구나 맺고 있는 개인적인 인간관계들을 하느님께 바쳐드릴 만한 예물로 가꾸는 일은 사회생활의 목표라 할 수 있을 만큼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오늘 복음인데,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우리에게 품고 있는 원망이 생각나거든 일단 예물을 제단에 그대로 두고 나서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의 내용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예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규정된 예물이란 우리네 인간관계를 반영하는 그래서 그 산물로서의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 담겨야 할 내용이란 바로 그 예물을 마련하기까지 거쳐야 했던 인간관계의 품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예물은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반영이고, 또 반대로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에 정비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이란 우리의 인간관계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가꾼 결과로 마련한 예물이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 자체가 사실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값지고 귀한 예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잣대입니다. 그분이 예시해 주신 사례에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는데, 그 감옥이란 이웃과 화해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진 빚을 상징합니다. 직접 화해해서 하느님께 빚을 갚을 수 없으면 다른 이웃에게라도 갚으면 됩니다. 그것이 불화(不和)에 대한 보속(補贖)이고 먼저 베풀어야 하는 정신적 자비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똑같이 다 잘 하기는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으로 중요한 원칙은 선택과 집중일 것입니다. 즉, 주어진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자신이 하느님께 바칠 예물로 가꾸어 봉헌하려는 자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엮이지 않도록 피해야 할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소중한 인간관계를 알아보고 가꾸는 안목만큼이나 엮이지 않도록 피해야 할 인간관계를 알아보고 거리를 두는 안목도 필요합니다. 이 중요성을 알아보고 매기는 일도 성령칠은에 속하는 의견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에 따라서 선택된 인간관계를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으로 변화되어야 할 의로움입니다.
첫댓글 '공정과 정의의 실천만이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며 '의로움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함'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관계야 말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며 하느님 사랑의 결과임도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이웃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의로움을 이해하고 관계 개선을 통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여 회개할 수 있는 사람만이 관계 개선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의견의 은사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03 05:2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03 05:5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03 06:0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03 0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