좆선 망하도록 지름길 열어재친 민비년급 개ㅆ년 우씨왕후
고국천왕(고남무)의 아비 신대왕은 왕위후계 서열에 있지 않았었음
왕위계승 후보에 들지 않는 왕족은 처신이 존나 불안했지
자칫하면 역모에 휘말리거나 누명을 덮어쓰기 딱 좋지
더군다나 당시 고구려는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부족연합체(연맹체)였기 때문에
어느 한 부족이 강성해져서 욕심을 부리면 왕을 꼭두각시로 부리려 하는 경향이 자동으로 생기지
연개소문을 보면 잘 알 수 있어
그래서 고남무 아비(고백고)는 왕도를 피해 권력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않으려 산속으로 피해 살았어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차대왕(고수성)은 연나부의 명림답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살해하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132
권력을 장악한 명림답부 패거리들에 의해 산으로부터 끌려내려와 왕으로 세워진 게
고남무(고국천왕)의 아비 신대왕이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752
즉, 쿠데타 세력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왕이지. 그러고는 쿠데타 수장 명림답부는
고구려 최고관직이자 종신직인 "국상"에 스스로 올라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명림답부는 왕권을 계속 자신들의 발 아래 두기 위해
차기 왕의 배필을 자기 세력인 우씨로 집어넣은 거야
즉, 고남무(고국천왕)과 우씨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랑하거나 짝짜쿵 할 정도의 사이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고남무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왕후로 들여앉힌 건데 어떻게 사이가 좋겠냐고
그러니까 둘 사이에 자식이 생길 수가 없었던 거 아니겠노
쿠데타 세력은 명림답부가 우씨를 고남무 조종, 견제용으로 박아넣었다는 것은
고국천왕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우씨왕후가 명림답부의 아들 명림어수를 그 애비가 앉았던 자리 그대로
"국상"에 앉힌 것으로도 우 개썅년의 정체성이 어디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지
그런데 제목에서부터 우씨왕후가 뭔데 개썅욕부터 박고 시작하냐...
이 개썅년이 버젓이 고국천왕이 있음에도 지 멋대로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앉힐만큼
권력이 왕을 넘어서 있었다는 걸 방증하지
당시 고구려는 이 연노부 명림족속과 우씨패거리에 의해 고혈이 짜이고 착취를 존나 당하고 있었어
봄만 되면 굶어 뒈지는 백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에도 우씨 세력은 지들 권력을 믿고
남의 처자와 재산을 지들 꼴리는대로 탐하고 노략질하길 서슴지 않았어
힘이 미력할 때의 고국천왕은 차대왕이 살해 당한 뒤 아비 신대왕이 벌벌 떨었던 것처럼 엎드리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우씨 일파의 전횡과 포악질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문제 삼으며 단죄하려 하자
우씨의 친족인 좌가려와 어비류가 감히 니까짓게? 차대왕처럼 모가지 한번 썰어줘?!!라며 또 반란을 일으켰지
하지만 고국천왕이 거의 항우급의 덩치와 용맹이 있었기에 간단히 진압해버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온갖 사리사욕과 횡포를 일삼던 우씨일파는 급격히 세가 약화됐고
고국천왕은 그 기세를 몰아,
산야에서 괭이질이나 하며 겨우 피죽이나 끓여먹던 "을파소"를 발굴해내고 또
그 유명한,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복지제도라는 "진대법"을 실시하게 했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28
(진대법 : 곡식이 떨어진 봄에서 초여름 동안 저리로 정부미 대주고 가을에 추수하면 되갚는 구휼제도)
고국천왕이 치세할 동안은 백성들이 굶어죽는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어
하.지.만
고국천왕이 갑자기 죽어버림.
그날 밤 우씨왕후는 셋째동생(고국천왕은 둘째였음) 발기에게 몰래 찾아가
왕이 죽은 사실은 말하지 않고, 발기에게 이렇게 말해
"왕에게 자식이 없으니 다음 왕위는 누가 되겠습니까?"
(다음 왕은 당연히 발기 니가 될 테니까 나를 위해서도 발기해다오)
발기 : 믱? 왕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무어 그리 불충한 언사를 함부로 내뱉으시오?!!
그리고 아녀자가 야밤에 함부로 이런 곳에 드나드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
(형 죽으면 당연히 내가 왕이 될 텐데 뭣하러 상폐년과 손 잡노 이기야)
우씨썅년은 속으로 울그락불그락하며 포기 못하고 넷째인 연우에게 또 찾아가지
연우는 이미 발기가 있어서 왕위 계승에 대해선 포기한 상태인데,
우씨가 찾아와
"좀전에 왕이 돌아가셨습니다. 나와 손 잡으면 왕위는 당신 것이요"
연우 : 이게 왠 떡? 님도 보고 뽕도 따겠네. 도랑 치고 가게 잡고 누이 좋고 매부도 좆네~
다음 날 두 년놈이 궁궐로 나란히 들어가
우씨 : 왕께서 승하하셨다. 유고로 다음 왕은 연우로 하시라 하셨다
라고 유언을 날조해내고 연우는 "산상왕"이 되었지
이에 빡친 발기가 군사를 일으켰지만 대패하고 자살앤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247
드라마의 날조가 여기서 두드러지지
고국천왕의 죽음과 진대법에 대한 우씨썅년의 입장
이게 그냥저냥 포장 정도가 아니라 우씨년이 고국천왕 유언을 날조해냈듯
드라마 작가(원작소설이 있겠지)년이 생날조를 해낸 거야
고국천왕이 죽고 난 뒤 진대법이 폐지됐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어. 하지만
고국천왕이 197년 5월에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두 달 뒤(7월)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기록은 있지
이게 뭘 의미하겠노? 진대법이 시행될 동안엔 구휼미 풀 일이 없었어
구휼미를 풀기 전에 이미 모두 저리 융자를 해줘서 백성들이 굶을 일이 없는데 구휼미 풀 일이 왜 있었겠냐고
고국천왕이 죽자마자 연우랑 손 잡고 권력탈환한 우씨패거리가 바로 폐지해버렸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건 뻔하지
권력을 위해 뭉친 년놈이라서
산상왕과 우씨 또한 함께 뒹굴만큼 사이가 부드럽지 못했다는 것은
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어
필요에 의해 부부가 된 데다 권력욕에 눈이 시뻘개진 년을 섹파로 여길 남자가 있겠노? 노예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데, DNA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산상왕 또한 우씨일파의 전횡을 가만히 두고만 보진 않았어
왕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을파소를 불러 선왕의 치세를 되이을 궁리를 하게 돼
을파소는 왕에게 조급히 굴지 말고 장기플랜으로 조지자는 제안을 함
왕이 동의하고 우씨패거리들 몰래 공작을 하지 5년 동안
그리고 5년 뒤 산상왕의 애를 밴 소후 등장.
우씨개썅년 격분해서 참살을 명함
우씨 명을 받은 군사들이 남장 하고 달아나던 소후를 잡아 참살하려던 순간,
소후 : 니들이 나를 죽일 순 있을 것이나 내 뱃속에 있는 왕의 씨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
라고 하니 군사들이 오줄 질질 싸며 달아나버려
이후에도 우씨개썅년은 소후와 그의 아들(동천왕) 제거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게 되고
산상왕과 을파소의 우씨패거리 몰아내기 장기플랜은 대를 이어 동천왕까지 이어지게 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818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사서들에서
저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저따위로 날조를 해?
게다가 천하의 패악년을 정반대로 미화까지 한다?
씨발 드라마 제목을 "을파소"라고 해야 할 것을 "명성황후"급 개썅씹창으로 뽑아놨노
우씨패거리의 뒷배 연나부(연노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왕의 권위를 병신으로 만들어버리면
딱 지금의 민좆국개꼴이 나는 건 동서고금이 똑같다이기
명림, 우씨 패거리의 위세는 연개소문대까지도 이어졌다고 봐야 하고
결국 왕이든 무엇이든 국가의 권위보다 사욕이 앞서는 종자, 집단이 설쳐대면 그 끝은 패망 밖에 없다이기야
세줄요약)
고국천왕과 우씨개년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정략결혼이고 섹파는 더더욱 아니었다
너무 길어서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사극대작을 기대한 게이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고 싶었어
보지가 주인공인 사극(천추태후, 명성왕후)은 왜 죄다 역사를 거꾸로 날조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