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오의 법칙과 하느님의 자비
다니 9,4-10; 루카 6,36-38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2023.3.6.; 이기우 신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成文法)이라고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탈리오의 법칙이 적혀 있었습니다. 라틴어 ‘탈리오(talio)’는 “받은 그대로 되갚아주기”라는 동태복수(同態復讐)를 말합니다. 탈리오 법의 취지는 폭력을 당했을 경우에 그 피해를 받은 만큼만 복수할 수 있도록 제한함으로써 과잉보복을 막고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자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의 형사법 체계에서도 죄와 형벌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죄형균형(罪刑均衡)의 원칙’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은 죄만큼 벌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폭력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죄의 양상도 변하고 또 늘어남에 따라 갖가지 법률이 제정되고 형벌도 강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이 법망을 피하는 새로운 범죄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탈리오 법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이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마태 5,38) 복수해야 한다는 관행은 위력을 떨치고 있었고 따라서 폭력의 악순환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아예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마저 돌려 대라.”든지, “천 걸음을 가자고 하면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든지,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마저 내주어라.” 하고 대항 폭력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39-42). 대항폭력조차 금하는 이러한 철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 특히 무자비한 독재자에게서 억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에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을 근절시키려던 예수님의 본래의 의도는 오늘 복음에 잘 나와 있으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6,36)는 것입니다. 이미 자행된 악행에 대해 어떻게 보복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부당하고 불의한 폭력이 가해질 때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정당방위는 인정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게다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고, 그것도 무상으로 베푸시면서 그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그저 당신을 닮기만을 바라셨을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상호 실천하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이 공동체들이 많아지고 퍼져나가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책이었고, 이것이 교회였습니다. 세상이 당장 그리고 한꺼번에 이렇게 변화되기는 어렵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회칙 ‘자비의 얼굴’ 참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아 왔었기 때문에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된 동족이 걸어온 역사를 하느님 앞에서 회고하며 참회의 고백을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성실하게 이끌어주셨지만 조상과 동족들이 하느님의 법을 상기시킨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죄를 짓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겨서 유배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청원에 있어서도 핵심은 하느님께로부터 자비로운 심판을 받고자 하면, 향후 하느님의 자비를 자신들 안에서 먼저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회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비를 실천하는 행동양식으로 회개해야 하는 요청은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 역시 똑같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자비 실천을 이어 받는 자비의 공동체로서 창조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 통념의 윤리와 법률에 맞추어 살아가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윤리일 뿐이고, 교회 안에서 신자들 상호간에서나, 또는 적어도 자신들이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라면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실천하려는 행동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비라는 선이 살아있게 되는 것이고 그 선이 점차로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야 악이 사라지게 될 것인 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윤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면, 먼저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십자가입니다. 가장 크게 손해를 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 덕분에 그분께 죄를 지은 이들이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분을 본받는 삶을 용감하게 실천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발자취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이들이 받은 손해는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현세에서나 심판 때에 하느님의 자비로운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게 될 것”(마태 5,7)이며,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받을 것”입니다(마태 6,38). 자비를 베풀고 자비를 입는 이들의 인간관계가 퍼지고, 이러한 자비의 공동체를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 충실하시고 세상을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 채우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첫댓글 사람들이 만든 율법을 전지전능 한 것처럼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법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거짓 정의와 공정도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부당하고 불의한 폭력이 가해질 때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정당방위는 인정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
'인간의 계명과 법규'가 아니라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 충실하는 것,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임을 떠올립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매우 절박하고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요구되는 주제입니다. 이른바 법 전문가라는 검사, 판사들이 공정과 상식을 너무도 훼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한심하고 안타까운 것은 신앙인들조차도 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고 있다는 점이지요. 자비의 공동체를 확립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넓혀나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