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희망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영성, 아시아 복음화의 코드
예레 18,18-20; 마태 20,17-28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023.3.8.; 이기우 신부
“나라는 민족의 몸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魂)”(이암李嵒, 1297~1364, 檀君世紀 序文)이라고 말합니다. 12~13세기 경에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파죽지세로 점령해 가던 몽골이 우리 영토까지도 지배하려들자 고려 조의 충신이던 이암이 한민족에게 민족 혼을 일깨우고자 역사 초기 기록을 수집 정리한 단군세기 서문에 쓴 글입니다. 그렇다면 혼에는 하느님의 영이 결합되어 있어야 민족의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을 수 있고, 이는 민족의 마음인 문화의 복음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어서 민족의 몸인 나라도 융성할 수 있게 됩니다.
단군 이래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우리 민족에게, 천주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수난과 부활의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 즉 부활의 희망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영성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현세적인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 그치지 않고 이미 무상으로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먼저 감사하며 사회 공동선에 투신하는 은총이었습니다. 만민평등과 남녀동등, 양심과 신앙의 자유야말로 천주교인들이 백년박해를 당하면서도 치명으로써 저항하고 기어이 쟁취했던 사회 공동선의 가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의 북쪽 세력과 남쪽 세력인 이집트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던 유다 왕실을 향하여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예언을 전하다가 자신을 향해 조여 오는 살해음모를 느끼자 공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 탄원하였습니다(예레 18,20).
그러나 고난을 이겨내는 힘은 부활의 희망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보다 더 암울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주류로부터 핍박을 받으시고 살해 위협까지 받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백성에 대한 선포를 얼추 마무리 지으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최후를 준비하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마태 20,18). 하지만 부활 예고로 이어진 이 수난 예고를 제자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던 듯합니다. 특히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어머니를 통해 한 술 더 떴습니다(마태 20,21).
그렇지만 예수 부활을 겪은 후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이 두 제자는 고난의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형 야고보는 그 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스라엘로 돌아와서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책임자로 있다가 헤로데 아그리파 영주에 의해 처형되어 순교하였습니다. 또 동생 요한은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으며 사도 바오로가 개척해 놓은 소아시아 초대교회를 물려받아 박해 받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세 통의 사목서한과 요한 묵시록을 써 보내고 요한 복음서를 지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목숨과 일생을 바쳐서 스승의 고난을 뒤따라 받을 수 있었던 힘 역시 스승이 지니셨던 부활의 희망 덕분이었습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이 증언하고 있다시피, 상치 않고, 빛나며, 빠르고, 사무치는 사기지은으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를 체험한 사도들 역시 로마의 복음화라는 부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에 복음선포의 고난을 능히 짊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들의 활약 후 약 250여 년 후인 서기 313년에 신앙의 자유를 얻었으며 395년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됨으로써, 서방이 그리스도교화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서방으로 향하면서 상대적으로 동방 세계의 복음화는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아 여러 민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각기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며 독특한 문화를 간직해 왔습니다만, 서방에 비해 천5백여 년 정도 늦게 복음이 전해지기는 했는데 문화적 충돌과 종교적 몰이해로 인해 박해를 초래하는 바람에 복음화는 늦추어졌습니다. 그 결과, 가장 기본적인 공동선이라 할 수 있는 빈곤 극복과 민주화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매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화된 한류 문화가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속에 숨어 있는 영광의 부활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핵심 영성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혼에 하느님의 영이 들어가고, 그리하여 생기를 되찾은 우리 민족 문화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빈곤 극복과 민주화라는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면서 이를 위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영성을 갖추게 할 수 있다면 민족의 몸인 나라들이 진리와 평화를 누리는 복음화의 지평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는 종교 간 대결을 하거나 문화적 가치를 겨루는 충돌로써가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이 간직해온 전통종교의 영성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고, 문화적 감수성을 사회 공동선 증진으로 꽃 피우게 하며, 가난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삼중의 대화로 가능한 선교적 가능성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희망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짊어지는 영성이야말로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핵심 코드입니다.
첫댓글 고정댓글: 어제의 강론에 대해서는 고정댓글로 서구적 인간관, 즉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간주함으로써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느님 없이 처신하게 만들었다는 폐해를 지적했습니다만, 오늘의 강론에 대한 고정댓글로서는 그 대척점에 있는 한국적 인간관에 대해서 한계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민족 혼을 강조하고 잃어버린 옛 역사를 상기시키는 노력이야 백배 찬성합니다만, 혼은 영을 받아야 영혼이 됩니다. 민족 혼을 강조하는 민족사관 사가들이 고조선의 문명은 하느님을 섬기는 문명이었다고 하나같이 알아보면서도, 그것이 마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인 양 기술하는 데 대해서는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나 신앙은 고대인들에게는 현대인들이 과학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과학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원인도 없이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맏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비과학적인 설명입니다. 한 마디로, 사가들의 종교 이해가 너무 저급합니다. 신앙인들 중에 역사를 전공하는 이가 없어서 그런 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민족사관을 추구하는 사가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무신론자들 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인간이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해야만 신앙이 발생되는 것이고, 신앙이 발생시킨 체험으로부터 종교라는 생활양식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연하게 하늘을 숭배하고 그 숭배심으로 정성껏 제사를 지낸온 고대인들을 현대인들보다 미개하다거나 원시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지적 오만입니다.
예레미야가 처한 고난, 그리고 아직 고난을 깨닫지 못했지만 훗날 깨달음을 통해 함께한 야고보와 요한. 닥칠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끔 한 것은 부활의 희망이었음을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이 이분법적인 서구적 인간관을 극복하고 몸, 마음, 혼의 조화로운 인간관을 바탕으로 아시아 복음화에도 기여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인간의 혼이 충만해지듯이 우리 민족의 혼도 하느님 영을 받아 충만해지길 기원합니다.
제발 그래야지요. 무신론 관점은 자연과학 진화론에만 있는 게 아니고, 역사학에도 있더라구요.
@이기우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이 하느님과 맺었던 수많은 약속이 하느님의 개입 과정이었고 신앙으로 깨달아 가며 종교가 되었던 과정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박천조 그럼요.
그래서도 우리 교회의 창립 선조들, 이벽과 정씨 삼형제가 대단한 안목을 지니신 인물들이셨음에 감탄하게 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나 교회 사도 이후 시대의 교부들 같은 분들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