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魯迅)
김광균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기적(汽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배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生活)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五臟)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시집 『황혼가』. 1957)
[작품해설]
김광균의 시는 대부분 서구 모더니즘 또는 이미지즘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시가 지닌 감각성과 이미지 등 기법적인 면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듯이 김광균은 그간의 회화적 이미지의 조형이나 비유의 제시라는 시 세계에서 현실적 삶에서 겪게 되는 구체적인 고통과 슬픔을 담아내는 시 세계로 옮겨진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시인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다. 그것은 뒤에 이어지는 시행들로 하여 보다 강한 설득력을 얻는데,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이나 ‘먹고 산다는 것’에 ‘상심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화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시를 믿고’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시가 발표된 해방 직후(1947년)의 좌우익의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그에 따른 문단의 판도 변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밤눈이 내려 쌓이’는 어느 겨울 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회의를 갖게 된 화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옆에서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을 바라보며 그는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을 뒤돌아보지만, 그 생활은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워 물’자 쓸쓸한 기운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와사등」의 ‘등불’이 공허와 비애로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절망적 삶을 표상하는 데 비해, 이 시에서의 ‘등불’은 화자의 내적 갈등, 즉 실존적 고독을 상징한다. 이러한 ‘등불’의 고독한 이미지를 통해 화자는 그 역시 고독하게 살다간 중국의 작가 ‘노신(魯迅, 뤼신)’을 생각하게 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노신(1881~1936)’은 근대중국소설사를 대표하는 작가이면서 시인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시인은 고독한 ‘등불’의 이미지를 통해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 앞에 쓸쓸히 앉아 있는 자신과 중국 소설가 ‘노신’을 병치(倂置)시킨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등불’은 시인의 실존적인 고독과, 절망한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는 ‘노신’, 즉 시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이미지 자체의 객관적 제시나 도시적 감각 및 막연한 감상(感傷)에 경도(傾倒)되었던 전기 시 세계와 기법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신한 비유를 통한 이미지 제시나 감각적인 언어 구사가 없는 대신, 현실에서 느끼는 감회를 행을 바꿔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등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대하여 현재의 시인돠 과거의 ‘노신’을 병치하는 수법은 대단히 돋보인다. 즉 ‘노신’에 대한 과거 회상이 현재화됨으로써 시인의 현재 생활과 병치되는 것은 물론, 현실에서의 시인의 등불과 상해 뒷골목에서의 ‘노신’의 등불이 의식의 흐름으로 중첩됨으로써 이 시는 이중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자신의 방’이라는 전반부의 현실 공간과 ‘상해 호마로 어느 뒷골목’이라는 후반부의 상상 공간을 갖는 이중 구조를 채택한다. 그럼으로써 이 시는 단일 이미지의 평면적 구조를 갖는 시에 비해 한결 세련되고 성숙한 면모를 보여 주게 되었다.
[작가소개]
김광균(金光均)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고등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 발표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 당선
1950년 이후실업계에 투신
1990년 제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사망
시집 :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황혼가(黃昏歌)』(1969)
『추풍귀우』(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