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幸福)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문예』 초하호, 1953)
[어휘풀이]
-행길 : 한길, 사람이나 차가 많이 다니는 넓은 길.
[작품해설]
일반적으로 청마의 시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의지의 문제를 주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존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러한 일반적인 청마의 시와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어찌 보면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센티멘탈리즘에 휩싸인 사춘기적 연정을 노래한 듯하다. 그러나 이 시는, 진정한 행복이란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쉬운 표현으로 전달해 주고 있어, 오늘날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연시(戀詩)로 널리 알려져 있다.(실제 이 작품은 시조시인 이영도-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를 연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1연에서는 주제에 해당하는 명제를 모두(冒頭)에 제시함으러써 ‘너’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뿐 아니라, 그 사연까지도 밝고 아름다운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에메랄드빛 하늘’이라든가 ‘환히 내다뵈는’ 이하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화자의 행복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연에서는 우체국에 와서 편지를 부치거나 전보를 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표정을 통해 화자가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체국에 온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편에 서있는 이들이란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3연에서는 화자가 ‘너’와의 애틋한 연분을 밝히고 있다. 그 연분은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아진 인정의 꽃밭’에 피어난 ‘진홍빛 양귀비꽃’과 같다는 표현으로써 그 연분을 승화시키고 있다. 사랑은 고단한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필요한 법이고,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애틋한 사랑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4연에서는 1연에 내세운 명제를 다시금 반복함으로써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과 행복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수미상관식 구저에 의해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청마 특유의 관념적·남성적 시어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부드러운 정감이 넘치는 여성적 시어만을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