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끄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모습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 쳐 오는
뭇 구로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총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아일보』, 1960. 3. 13)
[어휘풀이]
-요조 : 깊고 으늑함.
-옥 : 감옥
-연자 : 연자매, 연자방아, 둥글게 만든 돌을 굴려서 곡식을 찧게 된 매. ‘매’는 맷돌
-치레 : 잘 손질하여 모양을 냄.
[작품해설]
이 시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연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 독재 정권 말기에 씌어진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투철한 현실 인시과 함께 시인에에 부여된 대역사적 · 대사회적 책무를 제시하고 있다. 3.15 부정선거란,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집권 연장을 위하여 경찰과 공무원, 심지어는 조직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 · 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결국 4.19 혁명을 유발했던 우리 선거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정이 다행된 선거였다. 이와 같은 자유당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청마의 시는 그간의 사유와 관념을 버리고 현실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바로 이 작품의 저항적 색채와 자기 다짐의 강건한 어조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뜨거운 노래’는 1·3연에서 제시된 것처럼 ‘욕되지 않은 고독을 /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이며,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으로, 그것은 다름 아닌 부정한 사회에 대한 시인의 분노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다시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라는 명제와 결합됨으로써 화자는 지조와 정의에 대한 뜨거운 결의를 불태우는 한편, 자신의 이름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라는 시제(詩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다짐일 뿐 아니라,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정의와 진실의 시로써 ‘겨울’로 상징된 암울한 현실의 ‘땅’을 녹여 버리겠다는 결의로 볼 수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지조를 지키고 사는 자신의 긍지를 표현하고 있다. 부정과 불의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권력과 부귀, 영예로부터 멀어진 이의 고독은 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값진 영광이라고 인식하는 화자에게서 우리는 지조 높은 선비의 곧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2연에서는 부정한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요조된 빛깔’과 ‘설레이던 몸짓’은 일체의 희망을 뜻하며,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 ‘겨울의 숲’은 자유당 정권하의 암담한 현실 상황을 상징한다. 화자는 일제의 강점과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 동족상잔의 비극과 남북 분단 등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온 엄청난 시련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잠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왔음을 상기한다. 그러한 화자는 ‘먼 한천 끝까지 잇닿아 있’는, 이 ‘앙상한 공허’의 현실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불의와 부정이 횡행하는 사회일수록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화자는 그 깨달음을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라는 구절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3연은 주제연으로, 현실 상황을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이라는 구체적 표현을 통해 제시하는 한편, 그 같은 현실에 ‘뜨거운 노래’를 하나의 밀알처럼 묻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4연은 3연의 부연으로서, ‘뜨거운 노래’의 의미를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5연에서는 어떠한 고문(拷問)에도 꺾이지 않을 ‘뜨거운 노래’를 통해 자신의 지조와 정의에 대한 결의를 다시금 다짐한다. 화자는, 정신보다 약한 육신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 무쇠 연자를 돌리’는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지라도, 올곧은 정신에서 탄생하는 자신의 진실된 시는 일체의 비도덕적인 것을 장식하는 에에는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이렇게 정직하지 못한 권력에 야합하거나 그것의 시녀로 추락하지는 않겠다는 맵찬 각오를 보여 준다.
6연에서는 ‘거짓의 거리’라는 현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온갖 비리를 고발한다. 그것은 자유당을 지지하는 관제 데모대의 ‘뭇 구호’이며, 지조를 버리고 권력에 매수된 자들이 아첨하는 ‘빈 찬양’으로, 화자는 이것을 영혼을 팔아치운 자들의 ‘헛한 울림’이라고 비판한다. 7연은 3연의 주제행을 반복한 것으로, 언 땅을 녹여 만물을 소생시키는 빗물처럼 화자의 노래도 동토(凍土)의 현실 속으로 스며들어 소망스런 세상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불태운다. 이것은 청마 혼자만의 다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를 위한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문학인들에게 장엄함 목소리로 일깨워 준다.
[작가소개]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