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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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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사순 제5주일] 라자로의 소생,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 신앙
이기우 추천 1 조회 265 23.03.25 09:14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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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3.25 22:21

    첫댓글 중세의 르네상스가 무신론으로 흘러 하느님을 잊어버린 문예부흥이 되었고, 이 문예부흥이 인간위주로 되었기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인본주의와 인간성 회복은 다른 뜻입니까? 인간성 회복되는 사랑의 문명이 지향점이라 하셨기에 혼란을 없애기위해 문의해 봅니다.

  • 작성자 23.03.26 04:48

    르네상스(문예부흥)가 뜻하는 인본주의 사상은 다분히 육체적이며 따라서 경제적이고 하느님 신앙에 저항하는 성격을 띠었으며, 그로 인해 일어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혁명 과정에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를 경영하는 이기적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근세 인본주의가 배태한 한계입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신앙과 등진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신앙을 꽃피우는 인본주의가 부흥되어야 하고 그것이 ‘홍익인간’적 ‘사랑의 문명’입니다.

  • 작성자 23.03.26 05:18

    위 댓글에 대한 사상적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근세 서구식 인본주의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탄생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을 배척하고, 또는 백인 우월주의적 제국주의를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포장하고 인류와 세계를 마구 정복하고 침탈하며 자연환경도 훼손하고 착취하는 현재의 물질문명을 초래하였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주변 민족들을 상대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일상적으로 치루어야 했던 사정으로 근세 백인들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정복하는 과정을 합리화하였고, 자신들보다 물질적으로 미개해 보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사냥해서 노예로 팔고 노예로 부리면서도 합리화하였습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들이 부르던 노래는 군가가 아니라 개신교 찬송가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앞으로 우리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인본주의는 하느님 신앙을 전제로 한 제대로 된 인본주의여야 합니다. 이것이 '홍익인간'적 '사랑의 문명'이라는 개념입니다.

  • 작성자 23.03.26 05:23

    '홍익인간'적 사유는 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인 인본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적 사유와는 반대로, 하늘도 땅도 인간도 신으로 보는 신인일체적 사유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땅-인간을 세계관의 기본으로 삼는 삼재사상이지요. 물론 이 삼신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삼위일체적 신 개념으로 정화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정화와 승화 과정은 이 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한민족에 대하여 진정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실천적이고 또 정신적인 십자가의 길을 거쳐야 가능할 것입니다. 한민족의 사유를 그리스도화시킬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우리 민족의 염원인 민족 통일과, 또 전 세계 보편교회의 염원인 아시아 복음화의 과정을 '사랑의 문명'으로 이룩하는 도정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 23.03.26 08:08

    사순 제5주일
    죽은 라자로를 살린 소생기적과 부활은
    신앙적으로 큰 의미를 주는듯 합니다.
    가톨릭신앙은 부활 신앙이기 때문 이겠죠

    소생기적사건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까지도 감내하셨던 예수님의 큰 사랑에 고개 숙여집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이 의미가 없듯이
    삶에서의 희생도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밑거름이라
    열심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막바지 사순시기를 보내야됨을
    느낍니다.

    미사참례를 하고난 뒤의 부뜻함은 신부님의 강론이 깊이 와 닿아 공감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이번
    한주도 주님의 수난과 고통 묵상하며 잘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3.03.26 11:15

    설명 잘 들었습니다. 용어의 개념 정의가 우선되었
    더라면 혼동이 덜 할 것 같습니다. 신본주의 와 인본주의가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면 하느님 신앙을 전제로한 인본주의란 말이 모순점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의도는 이해되나 표현상 혼동의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요? "메시지, 강의및 자유묵상"란에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죽음이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정치 이 두글을 재밋게 읽어보았고 더욱 신부님의 의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자도층의 사고가 조선시대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서 자주적이고 주도적인 생각이 부족한 것은 신앙이 예수의 영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 작성자 23.03.26 11:16

    바로 그렇습니다

  • 23.03.26 18:38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보며 죽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생각합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성의 상실, 교만, 이기적 태도... 예수님과 나눴던 마르타의 대화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자세를 떠올려 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이 유난히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아울러 신부님이 말씀하신 홍익인간적 인본주의를 보며 입으로는 신을 말하지만 행동에서는 무신론적,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부끄런 모습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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