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의 소생,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 신앙
에제 37,12-14; 사도 8,8-11; 요한 11,1-45
사순 제5주일; 2023.3.26.; 이기우 신부
1. 말씀의 초점
사순 제5주일인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생애 마지막으로 일으키신 이 소생 기적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시는 한편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부활 신앙을 일깨우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날 이 부활 신앙으로 메시아의 참 모습이 비로소 계시되었습니다. 이는 믿는 이들의 부활 신앙으로 싹이 트고 다시 겨레의 민족 정체성을 일깨움으로써 우리 민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활시키는 열매를 맺게 될 뿌리입니다.
루카 디 톰메, <라자로의 소생>, 1362년경, 목판에 템페라, 52x39cm, 바티칸 회화관, 바티칸.
2. 이스라엘과 인류의 부활
에제키엘 예언자도 일찍이 이 소생 기적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바 있습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2-13). 에제키엘이 예언자로 활약하던 당시에 바빌론에 끌려가 이민족의 노예로 살며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던 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해골 뼈들이 즐비한 골짜기에서 그 해골들이 일어나 살아 있는 병사로 소생하는 환시를 본 에제키엘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새로 재건되는 환시까지 보고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회복되는 꿈을 예언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에제키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일로서 예언했던 바를 사도 바오로는 더욱 확대하여 인류 전체에게 일어날 보편적인 일로 예언하였습니다. 즉,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될 일이며, 또한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에 걸쳐 일어나는 전반적인 인류의 부흥을 내다보았고, 그러자면 언젠가는 다시 죽게 마련인 육신의 소생이 아니라 영을 통하여 죽을 몸이 다시 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로마 8,11).
3.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경위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아끼시던 친구였습니다. 그분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지치실 때마다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으로 가서 쉬시곤 하셨습니다. 라자로에게는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평소 같으면 즉시 달려가서 그 병을 고쳐주고도 남았을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이 전갈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 이틀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라자로가 죽어서 묻혀 있는 동굴 무덤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언제나 제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기도드립니다”(요한 11,41-42). 이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43). 이리하여 죽어서 묻혔고 그러고 나서도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4. 라자로 소생 사건의 파장
이렇게 되자 이 소문은 급속도로 가까운 예루살렘에까지 퍼졌고 마침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던 군중은 그분이 이번에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앞세워서 로마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혁명을 꿈꾸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낌새를 눈치 챈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되면 로마군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고 자신들의 특권도 박탈당하게 될까봐 민중이 봉기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미리 제거하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법한 각본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 이틀 후에 그에게 가려고 하실 때에 눈치빠른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하게 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면 그 때문에 오히려 당신 목숨이 위험해지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럴지언정 죽었다가 당신이 부활하실 것도 믿고 계셨기 때문에 라자로의 소생이 당신 부활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표징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목숨을 걸 수도 있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에 관한 신앙을 심어주는 일은 예수님께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십자가 신앙까지 겸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5. 소생과 부활
사실 예수님께서는 소생 기적을 여러 번 일으키셨습니다. 나인에 살던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 회당장 야이로의 딸(루카 8,54), 헤로데 왕실관리의 아들(요한 4,51) 등 죽은 이들을 살려주신 일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 사건을 일으키시는 틈틈이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하셨고, 그때마다 수난과 부활을 함께 예고하셨습니다(마태 16,21; 17,22-23; 20,18-19).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 없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매우 강경하고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렇듯 중차대한, 십자가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최후의 만찬에서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면서, 당신이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제자들끼리도 서로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족례 예식은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의 성사였습니다. 그 전제 하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당신의 뒤를 이어 성체성사를 거행할 임무를 서로 섬기는 조건을 채우는 사도들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서로 섬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채우지 않고도 자동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명제는 예수님께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6. 상호 섬김의 십자가 신앙
서로를 섬기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이 전제조건이야말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도 봉사해야 하되 세속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봉사하는 하느님의 종이라야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성체성사에서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도 십자가 신앙에서 출발하여 부활 신앙과 메시아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우리의 길잡이가 십자가임을 보며, 십자가가 주는 희생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효과를 믿는 신앙으로만 우리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에제키엘이 내다본 바대로, 하느님 백성이 부흥할 수 있는 조건 역시 이 십자가라는 목표에 적중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 대로,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영으로 살아갈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역시 십자가라는 표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교가 유럽 백인들을 복음화시키는 과정에서, 고대 로마의 제국주의와 중세 봉건영주제의 질서에 토착화된 시절을 거쳐오면서 복음적인 토양에서 생겨난 이 섬김의 취지는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성체성사를 집전하고 거행하는 성직자들의 교계제도는 섬김보다는 다스리거나 군림하는 이미지에 더 가깝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보편사제직에 봉사해야 할 직무사제직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섬김의 문화는 아직 멀었고 의사결정과정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제도화의 길은 훨씬 더 멉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7. 신앙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다시 태어남을 프랑스어로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데, 유럽 역사에서는 문예부흥을 뜻합니다. 신적인 종교질서가 지배적이던 중세에 이슬람 문명에서 얻은 지적 자산을 토대로 인간적인 모든 가시적 매력에 눈을 뜸으로써 생겨난 문예부흥을 후대의 근세인들은 인류가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르네상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예부흥이 토대가 되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라는 경제부흥도 이룩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로 인류가 얻은 경제적인 소득과 문화적 혜택도 많지만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어 비인간화 현상과 양극화가 심해지는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이제 신앙의 르네상스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르네상스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문예부흥 차원에서 더 나아가 역사부흥 차원에서 인간성이 회복되는 사랑의 문명을 이룩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개별 신앙인들이 부활 신앙을 간직함에서 출발하여 교회가 겨레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민족의 부활을 목표로 하고 부활된 한민족은 ‘홍익인간’과 ‘사랑의 문명’을 위한 밀알이 되는 목적을 지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죽음을 각오하고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 부활의 예표로 삼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활 신앙을 이끌고자 말씀하시는 오늘 미사의 메시지입니다.
첫댓글 중세의 르네상스가 무신론으로 흘러 하느님을 잊어버린 문예부흥이 되었고, 이 문예부흥이 인간위주로 되었기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인본주의와 인간성 회복은 다른 뜻입니까? 인간성 회복되는 사랑의 문명이 지향점이라 하셨기에 혼란을 없애기위해 문의해 봅니다.
르네상스(문예부흥)가 뜻하는 인본주의 사상은 다분히 육체적이며 따라서 경제적이고 하느님 신앙에 저항하는 성격을 띠었으며, 그로 인해 일어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혁명 과정에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제국주의를 경영하는 이기적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근세 인본주의가 배태한 한계입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신앙과 등진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신앙을 꽃피우는 인본주의가 부흥되어야 하고 그것이 ‘홍익인간’적 ‘사랑의 문명’입니다.
위 댓글에 대한 사상적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근세 서구식 인본주의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탄생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을 배척하고, 또는 백인 우월주의적 제국주의를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포장하고 인류와 세계를 마구 정복하고 침탈하며 자연환경도 훼손하고 착취하는 현재의 물질문명을 초래하였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주변 민족들을 상대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일상적으로 치루어야 했던 사정으로 근세 백인들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정복하는 과정을 합리화하였고, 자신들보다 물질적으로 미개해 보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사냥해서 노예로 팔고 노예로 부리면서도 합리화하였습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들이 부르던 노래는 군가가 아니라 개신교 찬송가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앞으로 우리와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인본주의는 하느님 신앙을 전제로 한 제대로 된 인본주의여야 합니다. 이것이 '홍익인간'적 '사랑의 문명'이라는 개념입니다.
'홍익인간'적 사유는 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인 인본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적 사유와는 반대로, 하늘도 땅도 인간도 신으로 보는 신인일체적 사유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땅-인간을 세계관의 기본으로 삼는 삼재사상이지요. 물론 이 삼신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삼위일체적 신 개념으로 정화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정화와 승화 과정은 이 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한민족에 대하여 진정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실천적이고 또 정신적인 십자가의 길을 거쳐야 가능할 것입니다. 한민족의 사유를 그리스도화시킬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우리 민족의 염원인 민족 통일과, 또 전 세계 보편교회의 염원인 아시아 복음화의 과정을 '사랑의 문명'으로 이룩하는 도정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사순 제5주일
죽은 라자로를 살린 소생기적과 부활은
신앙적으로 큰 의미를 주는듯 합니다.
가톨릭신앙은 부활 신앙이기 때문 이겠죠
소생기적사건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까지도 감내하셨던 예수님의 큰 사랑에 고개 숙여집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이 의미가 없듯이
삶에서의 희생도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밑거름이라
열심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막바지 사순시기를 보내야됨을
느낍니다.
미사참례를 하고난 뒤의 부뜻함은 신부님의 강론이 깊이 와 닿아 공감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이번
한주도 주님의 수난과 고통 묵상하며 잘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용어의 개념 정의가 우선되었
더라면 혼동이 덜 할 것 같습니다. 신본주의 와 인본주의가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면 하느님 신앙을 전제로한 인본주의란 말이 모순점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의도는 이해되나 표현상 혼동의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요? "메시지, 강의및 자유묵상"란에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죽음이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정치 이 두글을 재밋게 읽어보았고 더욱 신부님의 의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자도층의 사고가 조선시대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서 자주적이고 주도적인 생각이 부족한 것은 신앙이 예수의 영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보며 죽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생각합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성의 상실, 교만, 이기적 태도... 예수님과 나눴던 마르타의 대화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자세를 떠올려 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이 유난히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아울러 신부님이 말씀하신 홍익인간적 인본주의를 보며 입으로는 신을 말하지만 행동에서는 무신론적,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부끄런 모습도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