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부인(水路夫人)의 얼굴
서정주
암소를 끌고 가던
수염이 흰 할아버지가
그 손의 삐를 아주 그만 놓아 버리게 할 만큼......
소 고삐 놓아두고
높은 낭떠러지를
다람쥐 새끼같이 보르르르 기어오르게 할 만큼......
기어올라가서
진달래꽃 꺾어다가
노래 불러 노래 불러
갖다 바치게 할 만큼......
(시집 『신라초』, 1961)
[작품해설]
이 시는 향가 「헌화가」와 고대 가요 「해가」, 그리고 그 배경 설화를 창작 모티프로 하여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이다. ‘수로 부인의 얼굴’ 1~4중, 1에 해당하는 작품은 ‘수로 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견우(牽牛) 노인’이 모티프이며, 나머지는 각각 해룡(海龍)에게 납치된 ‘수로부인’, 바닷가 언덕에서 「해가」를 부르는 백성들, 해룡에게 풀려난 ‘수로 부인’으로 되어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관찰자 또는 해설자의 입장에서 설화 속 주인공인 ‘견우 노인’과 ‘수로 부인’을 작품 안으로 끌어다가 자신의 특정 정서와 판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각 연을 말줄임표로 끝맺음으로써 시적 화자의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표현 형식을 취해 시적 대상인 ‘수로 부인’의 아픔다움을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아울러 1연의 마지막 내용이 2연의 처음 내용으로, 다시 2연의 마지막 내용이 3연의 처음 내용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설화의 기본 서사 구조가 자연스럽게 시의 시상 전개 구조로 구조화되는 효과를 얻고 있다. 또한 「헌화가」에서는 화자인 ‘견우 노인’이 자신의 사랑을 전하면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이 작품의 ‘견우 노인’은 ‘손이 고삐를 아주 놓아 버리’게 할 만큼 ‘수로 부인’의 미모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다. 이 시의 노인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낭떠러지를 / 다람쥐 새끼같이 뽀르르르 기어’올라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상하는 ‘진달래꽃’을 꺾어다 바치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
한편 이 작품과 「헌화가」의 세계관의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적 화자의 관계를 보면, 「헌화가」는 ‘견우 노인’의 입장에서 ‘수로 부인’에게 꽃을 꺾어다 바치는 내용이나, 이 작품은 제3자인 관찰자나 해설자의 입장에서 ‘견우 노인’이 꽃을 꺾어다 바칠 만큼 아름다운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둘째, 시적 대상에 대한 태도를 보면, 「헌화가」에서는 ‘견우 노인’과 ‘수로 부인’의 사회적 신분 차이가 드러나나, 이 작품은 사회적 신분은 드러나지 않는 대신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두 작품이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인정하되 작품이 창작된 시대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