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저는 울산의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울산성(西生浦倭城)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지휘하여
축조한 성입니다. 출정 당시 30세였던 가토는 1592년 4월 조선에 상륙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지령에 따라 그해 7월 이 곳에 일본식성 축조 공사를 지휘하여 이듬 해 1593년에
완공했습니다.
해발 200m 산꼭대기에 본성[本丸]을 두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간 둘레에 제2성[二之丸],
가장 아래에 제3성[三之丸]을 두었고, 성벽의 높이는 6m, 기울기는 15도로 성의 전체 모습은
직사각형입니다.
본성에는 장군 처소인 천수각(天守閣)과 우물인 장군수(將軍水)가 있었습니다.
1594년(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곳에 와서 평화교섭을 했으나 실패했지만
1598년(선조 31년)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다시 빼앗았고, 1년 후 왜적과
싸우다 죽은 53명의 충신들을 위해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일제시대에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서생포진성도(西生浦鎭城圖 : 1872년 작성)를 보면 이 성의 일부가 우리의 진성(鎭城)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성의 본 모습은 대부분 소실되어 성벽의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산 꼭대기 부분까지 올라갔더니 이런 안내판이 설치돼 있더군요
우물인 장군수(將軍수)가 있었던 곳 표지판
장군 처소인 천수각(天守閣)이 있었던 자리 표시
산 위에는 현장관리인이 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관리인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며,
이 곳에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온다고 하면서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현장관리인은 일본인에게서 받았다는 이곳 왜성의 상상도(等角投象圖)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투상도를 보는 순간 몇해전 큐슈(九洲)여행 때 본 구마모토성(熊本城)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마모토성은 가토가 정유재란 후(1598년) 퇴각하여 본국에
돌아가자 자기의 영지인 구마모토에 축조한 성입니다. 후퇴하면서 그는 울산에서 데려간
수많은 조선인 토목기술자들의 도움으로 1607년, 7년만에 성을 축조, 완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음은 일본 3대성의 하나인 구마모토성의 전경입니다. 위의 모형도와 비교해보면
누구나 쉽게 울산성이 구마모토성의 모태(母胎)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일본 구마모토(熊本)에는 임진왜란후 울산에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곳의 지명은 울산(蔚山)이라 불렸고 몇해 전까지만 해도
울산역(蔚山驛)이라고 하는 전철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씨는 대부분 西生이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왜 자신의 성이
西生인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나다가 몇해 전 뿌리찾기에 나선 그들 후손중 일부가 울산에 와서 서생마을과
왜성을 보고 조상의 고향을 알았고 자신의 뿌리를 알고나서는 매년 이 곳을 찾아온다고
관리인이 말해주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맑은 날씨에 울산성 앞 동해의 풍경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附記]
加藤淸正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때에는 주군이었던 豊臣秀吉 편에서
이탈하여 德川家康의 東軍에 가담하였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59만석의 녹봉을 받아
熊本城에서 계속 영화를 누리다가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2대 44년으로
끝나고 熊本城의 주인은 호소가와(細川)家로 바뀌게 된다.
한편 그와 앙숙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西軍에 가담한 결과 패했으나 그는 자결을 금지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할복을
거부하여, 교토(京都) 로쿠죠(六條)의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되어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