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첫날 이른 아침, 빈 무덤에서 열린 희망
다시금 찾아온 부활의 때를 맞아, 과연 이 시간들을 보내며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는가! 자문해 봅니다. 생생한 부활의
기쁨과는 다소 멀어진 듯한 고민과 아쉬움이 떠오르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그 길을 밝혀줍니다.
오늘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의 첫 장면은, 찬란함보다는 조용하고 낯선 가운데
펼쳐집니다. 부활을 전하는 이야기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이야기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른 아침’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이 순간은 어느 때보다도 어둠이 깊지만,
빛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희망을 기다리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신앙도 아직은 ‘새벽’에 머물고 있는지 모릅니다.
믿음과 의심,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아슬아슬한 새벽 말입니다.
그 새벽,
사도도 아닌 여인들이 먼저 무덤을 찾았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옮길지조차 크게 걱정하지 않은 채
나아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을 움직인 것은 단 하나,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참된 신앙은 결국
주님께 대한 집중이며, 그 집중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또한 이들이 놀란 것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졌다는 점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먼저
그 큰 돌이 치워진 데 놀랐을 법도 하지만, 복음 속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빼앗긴 것은 주님의 시신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한 부활의 첫 징표는 화려한 기적이나 감각적인 놀라움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곧 끝이라 여겼던 인간적 판단의 증거가 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빈 무덤의 의미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 만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안의
‘빈 무덤’을 마주해야 함을 되새기게 됩니다. 마음 가득 들어찬
내 생각, 감정, 계획들을 내려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머무실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활 시기에는
내 안에 한 칸씩 빈자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이웃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주님의 이름으로 조용히 십자가에 맡겨
봅니다. 그렇게 비워진 마음으로 다시금 내 곁에 있는 이들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전과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는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조용히 찾아오시는 주님. 그분을 알아보고,
기쁘게 맞아들이는 부활 시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글 : 崔光熙 Matthew 神父 – 서울대교구
왜 이럴까?
청소년들에게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니?” 하고 물으면 보통 가족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이 가족보다
또래 친구들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단정 짓곤 합니다. 그들이 가족보다는
또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학교에 입학한 청소년들이 가족들보다는 또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보통 아침 8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그 이후 시간에는 방과 후 수업을 하거나 다양한 학원에
다니다가 밤 10시 이후에나 집에 돌아오니까요.
자연히 가족과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은 부모와 대화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청소년기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속내를 나누고 싶어 하고,
관심 받고 싶어 합니다. 청소년기 아이들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면,
몸은 이차 성징으로 자랐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의 아이들은 이런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감추려고 더
강하게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의 기복 앞에
“왜 이럴까?” 의아해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이런 특성을 감안하여
청소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여전히 청소년에게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은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답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부활을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는 청소년과 부모님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도, 부모들도 서로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로운 숙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인 청소년들이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부모님이 인내로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표현 그대로 아이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경험할 때까지
부모님들이 참고 견디며 ‘버텨주기(Holding)’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담아내기(Containing)’를 배웁니다. 버텨주며 담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이
과정이야말로 누군가의 고통에 동반하는 것이며, 부활을 맞이할 때까지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긴 숙고의 시간을 통해 부모님과 청소년들
모두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경험하며 부활을 체험하게 되길 희망합니다.
글 : 崔南植 peter 神父 – 살레시오회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