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마르코 1,29-39)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행동 패턴으로 분류한 인간의 세 부류
세상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를 쉽게 꺾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사람이 우유부단하게 되는 이유는 선과 악의 중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세븐’(1995)에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연쇄 살인범을 쫓는 두 명의 형사로 출연합니다. 이 살인자는 일곱 가지 대죄(탐욕, 시기, 나태, 분노, 폭식, 교만, 색욕)를 작전 방식으로 사용하여 정교하고 상징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어둡고 분위기 있는 배경과 강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라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브래드 피트는 연쇄 살인범을 사살합니다. 그것이 범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쇄 살인범 존은 일곱 가지 대죄를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그의 궁극적인 계획은 형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지막 두 가지 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존은 브래드 피트가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누리는 평범한 삶에 대한 질투를 인정함으로써 질투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분노에 빠지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바로 임신한 그의 아내의 머리를 보여줌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브레드 피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갈등합니다. 그는 법 집행관의 의무와 복수에 대한 압도적인 열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의 파트너 모건 프리먼이 그를 진정시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와 슬픔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분노의 화신이 되어 살인자를 사살하고 일곱 가지 대죄를 모두 대표하는 살인자의 뒤틀린 비전을 완성합니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가끔 그러한 상황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에서 좋지 못한 선택을 합니다.
그러면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좋을까요? 어떤 사람이 무엇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리옷 유다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히틀러도 뭔가 확신을 하고 독일을 선동하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차라리 이런 이들보다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낫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아주 큰 악행은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확신은 ‘영’에서 옵니다. 영이 믿음을 줍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세상에 악을 행하게 만드는 확신은 악령에 의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통쾌한 복수극이라고 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다 좋은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의롭고 금자 씨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목사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너나 잘하세요!”
누구도 그녀의 확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13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정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런 확신은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벽에 혼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을 가차 없이 떠나십니다. 기도는 분명 ‘확신’을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항상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1956년에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 정글로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전부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요? 복수를 계획했을까요? 그들은 분명 기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선교사 중 일부, 특히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어린 딸 발레리와 함께 화오라니족과 함께 살기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짐 엘리엇과 함께 죽은 네이트 새인트의 여동생 레이첼 세인트(Rachel Saint)도 오빠가 하려던 선교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 부족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많은 선교사와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선택을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분명 기도로 응답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 생각만으로는 어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는 ‘복음을 전하려는 확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기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혹은 분심만 하다 끝났는지를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