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폭정에 저항한 진리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집회 42,15-25; 마르 10,46-52 / 성 유스티노 순교자; 2023.6.1.(목); 이기우 신부
6월, 예수 성심 성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뜻하는 ‘예수 성심’은 그분 가르침과 행적의 원천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성심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개별 인생과 인류 역사의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좌표 상의 원점으로 삼아서, 인생과 역사가 자기 좌표를 찾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시기 2세기 전에, 그리스계 왕조가 유다인들을 다스리던 시절에 집회서의 저자는 젊은 세대에게 유다교의 정통 신앙을 전하고자 책을 썼습니다. 그리스계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방침에 따라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세계 시민(Cosmopolitan)을 육성한다는 명분 아래 인위적으로 혼합하고, 종족과 종교의 경계도 허물며, 하느님 대신에 자연을 찬양하고 인간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적 특성을 지닌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유다교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물려주고, 유다교의 신관과 세계관을 옹호하며, 유다인들이 부여받은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그리스 사상이 현실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존재와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는 다신교의 사상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집회서는 유다교의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실천적 행동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집회서’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성 치프리아누스 이래 새로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초심자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의 배경을 이해시키려는 목표로 교회의 집회에서 읽혔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유스티노 성인은 시대상으로 초대교회와 고대교회를 이어주는 기원후 2세기 초엽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팔레스티나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이 그리스식 사고방식에 젖은 이교 가정이었으므로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영향을 다 받고 자라다가, 어느 날 신자 노인을 만나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인에게서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자신이 배워온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상을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 큰 깨달음을 얻고는 더 큰 신앙 공동체가 세워져 있던 에페소로 가서 정식으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르티매오처럼 눈멀었다가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더욱 학구적인 자세로 정진하여 유다인 학자와도 토론에 나서고(프리폰과의 대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로마황제에게 항의하는 호교론을 펴기도 하다가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집회서의 저자보다 더 명확하게 그리스도라는 원점을 알 수 있었던 유스티노는 헬레니즘은 물론 유다이즘에 휘둘리던 당대 사람들에게 정확한 사상적 좌표를 일러주고 원점으로 갈 수 있는 경로까지 일러줌으로써 1세대 호교교부(護敎敎父)로 불리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도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에게도 진리에 눈을 뜨게 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초대교회 시절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좌표를 용감하게 제시한 선각자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입니다. 그는 단지 천주교를 신봉한 ‘사학죄인’(邪學罪人)이 아니라 ‘대역죄인(大逆罪人)’이으로 처형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껏 논란의 대상이 되어 한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난주(정약현의 딸)와 혼인한 후 처삼촌이 된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학문이 출중하다고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나서는 명도회(明道會)의 일원으로서 지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 주는 등 한국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회의 선각자들이 부당하게 노론 일파에 의해 정치적 숙청을 당하면서 비인도적인 고문과 처형을 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글을 비단천에 써서 도움을 청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으로 몰려서 머리와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陵遲處斬) 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에서는 천주교 박해를 자행한 조선 왕조와 노론 일파의 주장과 똑같은 논리로 황사영을 국가반역자로 여기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심도 깊게 학술적 검증을 진행한 끝에, 신학과 종교, 교회법과 사회적 입장에서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예수 성심이라는 기준을 따라야 할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좌표를 명확히 하고 또한 이 기준과 좌표에 따라 하느님을 믿어야 할 우리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복음화라고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도 성 유스티노처럼, 굳셈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한국 초대교회의 호교교부였습니다.
첫댓글 정조 왕으로 부터 학문이 출중함을 인정받고, 성년이 되면 조정으로 부르겠다는 언약을 받은자가 벼슬길 보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박해시대에 민족이 나아갈 좌표를 용감하게 제시한 정의감을 기억하며,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 선각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겠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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