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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 5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6월의 산하가 전화에 물들 때 ⓷ 나의 6.25... 4반세기만의 회억.
김병형.
한강대교 폭파
공병중위가 폭파 작업
약 50명 가량이 탄 트럭 속에 중위 계급장을 단 나도 끼여 있었다.
육군본부의 마지막 철수 요원이 나뉘어탄 몇 대의 트럭은 서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무질서하게 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트럭이 한강다리 중간 쯤 다다랐을 때였다.
꽝! 하는 요란한 굉음이 귀를 찢는 듯했다. 치마 저고리의 부녀자, 아기를 업은 여인, 잠바 차림의 노인들... 대교 양쪽의 인도를 메웠다. 지렁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인도교는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한강대교의 폭발음과 함께 부녀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아기들의 놀란 울음소리... 소리들. 새벽의 한강다리는 지옥의 수라장이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다리는 폭파된 것이다. 아찔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오렌지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 올라갔다. 우리 트럭이 한강다리 중간 쯤 왔을 때 일이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우리 앞으로 남행하려던 찝과 트럭 몇 대가 한강 물 속으로 떨어져 갔다.
우리 일행은 당황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순간 인파를 헤치며 마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휘하는 사람도 없다. 명령하는 사람도 없다. 명령도 없이 누가 가지고 하지 않아도 우리 일행은 마포 쪽으로 마구 달렸다. 마포 강에 다다랐을 때 마침 나룻배 1척을 붙잡았다. 흰 바지 저고리를 입은 노인이 모는 이 작은 배는 6명이 정원이라고 했다. 우리는 20명이 억지로 탔다. 사공은 말했다.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겠소."
"그래도 갑시다."
노련한 사공은 조심스럽게 배를 몰았다. 배는 당장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얼마나 긴 뱃길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대안의 모래사장에 배가 닿았을 때는 동이 훤히 터 가고 있었다.
저 멀리 끊겨진 한강다리에는 아직도 피난민들이 남행(남쪽으로 감)하려고 몰려들어갔다가 되돌아가는 인파가 붐비는 것이 새벽놀 속에 눈에 들었다.
실에의 찬 우리들 일행은 묵묵히 시흥보병학교로 향했다. 장교는 나 혼자뿐 나머지 9명은 모두 사병이었다. 패잔병과 부상병들이었다. 한 명의 병(병사)이 힐난의 말을 던졌다.
"한강 다리는 어떤 XX가 끊었습니까?"
이미 25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한강다리를 왕래할 때마다 그때 그 참상이 지금도 뇌리를 스쳐가곤 한다. 여인들의 귀를 찢는듯한 비명소리, 한강물 속으로 곤두박질해 들어가던 전우가 탄 자동차들...
그때 폭파된 다리 위의 인명피해는 얼마나 되는지? 차량과 군장비는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수자를 아는 사람은 없다. 대략 5백~1천 명이 희생되었으리라는 추산이다.
이제 어떤 참상이 우리 앞에 다가와도 이러한 비극이 없어야 하겠다.
아무리 전쟁 경험이 없는 초심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겁이 많고 목숨이 아까와도 조국의 운명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버리고 자기만이 살겠다고 뒤로 물러서는 비겁한 자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되겠으며, 한강대교 조기 폭파는 군 수뇌의 일대과실이기보다 조국에 대한 일대죄악이다.
이 원한의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직전 다리 위를 건너가다 물귀신이 된 많은 고혼과 원한의 눈물은 말없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 갔을지 모른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이 죄상은 우리와 함께 존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