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게 하셨다
탈출 19,2-6; 로마 5,6-11; 마태 9,36-10.8
연중 제11주일; 2023.6.18.; 이기우 신부
1.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 관한 계시를 들었습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
베드로도 모세가 전해준 이 계시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 이를 두고 바오로는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즉,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2. 목자 없는 양들
예수님께서도 목자 없이 흩어진 채 질병으로 허약해지고 마귀 들려 고통 받는 처지로 살아가던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의학이 발달했고 의료진도 많아졌지만 질병으로 허약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많아졌고 갈수록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영혼도 잊어버린 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무신론자들도 죄를 짓는 줄도 모르고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과거에 비해 먹고 사는 형편이 훨씬 나아졌어도 예나 지금에나 목자 없이 흩어진 채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구마와 치유 기적에 대한 권한과 의무를 주시어 사람들을 도와주게 하시고는, 절대로 반대급부를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는 선교 활동의 철칙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
지난 주까지 교회는 큰 전례들을 대축일로 지내왔습니다. 시작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고, 그 사십 일 후에 예수 승천 대축일, 다시 열흘 후에 성령 강림 대축일, 그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 대축일, 그 다음 주일에 성체와 성혈 대축일, 그 다음 금요일에 예수 성심 대축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흩어져 사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그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대책을 세우셨으니, 그것이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뽑아 놓으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두 가지 권한과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구마의 권한과 허약한 이들을 도와주는 치유의 임무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기지은(四奇之恩)으로 믿는 이들이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구마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심은 물론, 허약한 이들을 도와주는 치유 임무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마귀에 들려 고통 받는 이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허약해 진 이들이 바로 ‘길 잃은 양들’입니다.
4.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분부하신 이 구마와 치유의 활동은 사실 그분이 평소에 실천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앓는 이들을 숱하게 고쳐 주셨으며 죽은 이들도 일으켜 주셨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신 데다가 마귀 들린 이들을 만나실 때마다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다시 본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아름다운 세상으로 창조하신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젖히신 이 새로운 세상을 넓히고 완성하는 임무가,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가 받은 계시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삶을 봉헌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사제들의 나라가 교회요, 이로써 거룩한 민족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일이 교회의 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봉헌의 삶으로 살아감으로써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는 일이 바로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직 활동입니다.
5. 자비의 얼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 50년이 되던 지난 2016년에 모두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을 닮자”(에페 2,4)는 취지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면서, 회칙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이 희년 선포 미사에서 교황은, “지금은 자비의 시대입니다. 평신도들이 자비를 실천하고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자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또한 회칙에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가 주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육체적 자비 활동을 먼저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적 자비 활동에 더하여 새로운 강조점을 보탰는데 그것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활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한 메시지입니다. 이 새로운 호소는 영적인 자비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6. 육체적이고 영적인 자비 활동
교황의 가르침 중에서 ‘육체적인 자비 활동’은 치유의 임무에 해당되며, ‘영적인 자비 활동’은 구마의 권한에 속합니다. 오늘날 자비가 갈수록 메말라가는 세상 현실은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하는 또 다른 모습의 반영입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의료진이 늘어나도 아픈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있고, 아무리 사법체계가 발달하고 법 전문가들이 늘어나도 사회적 불의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인 자비를 베풀어 허약해 진 이들을 돕는 치유의 임무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애덕의 실천이며, 영적인 자비를 베풀어 억울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구마의 권한 또한 대단히 중요한 정의의 실천입니다.
7. 기적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자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치유와 구마 행동으로 베푸시면서 숱한 기적을 일으키셨고, 당신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당신이 함께 현존하시면서 당신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모자랍니다. 과학만능주의가 세상을 온통 하느님 없이 세상이 돌아가게 만들어 놓았는데, 신앙인들마저 그에 물들어 복음 진리에 대한 믿음이 허약하게 만들었고 기적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눈 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관한 교의가 반포된 지 4년 후 1858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수비루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메시지를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징표로 메마르고 황폐했던 마사비엘 골짜기에서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샘이 솟아나게 하시고 그 물로 씻은 불치병자들이 감쪽같이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루르드 지방 신자들은 물론 온 프랑스 신자들이 거의 믿지 않았고, 기적을 직접 체험한 신자들과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신자들만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발현 이야기를 전해듣고 소설을 쓰고 영화로까지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소설과 영화의 제목은 ‘베르나데트의 노래(The Song of Bernadette, 1943)’이고, 원작자는 베르펠(Franz Werfel, 1890~1945)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첫 화면에는 이런 자막이 뜹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없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설명을 해 주어도 알아 듣지 못한다”.
8. 자비를 받아들이고 자비를 실천하라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또 그 자비를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베풀라는 교황의 호소는 예수님의 기적을 믿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새로운 메시아 백성으로 불림 받은 우리가 이 자비의 메시지를 외면하게 되면, 그것이 세상의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드는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육체적인 자비를 베푸는 치유의 임무를 이행하고 영적인 자비를 베풀어 구마의 권한을 행사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써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첫댓글 고정댓글: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이 위에 쓴 제 강론의 결론이었습니다만,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도직 활동을 실천해야 하고, 이 실천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나야 할 것인데, 좀더 구체적으로는 믿음이 온전해야 합니다. 즉,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을 신앙이라 하는데, 이 신앙이 함께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선행을 실천하는 이들에 대한 믿음 즉 신뢰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에 뿌리를 둔 신뢰가 사도직 활동을 실천하려는 이들 사이에 튼튼해야 그 신앙이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또는 공동체적인 인간관계를 이런 조건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신앙과 신뢰가 사도직 활동 실천에서 꽃피우게 되면 그 꽃은 관련된 사람들, 예를 들면 활동의 수혜자는 물론 관심자들 내지 복음화를 지향하는 교회에 속한 일반 신앙인들에게 신용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신용은 사회적 믿음입니다. 신뢰가 인격적 믿음이고 신앙이 종교적 믿음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신뢰와 신용이 조화를 이루는 온전한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고정댓글 2: 신앙과 신뢰와 신용이 조화를 이루는 온전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면, 치유와 구마와 같은 기적은 우선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할 만한 믿음을 간직하는 기적부터 일으켜야 합니다. 전자의 기적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기적이지만, 후자의 기적은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일으켜야 할 기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베푸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연중11주일
새벽미사를 참례하고
간만에 친구와 긴 담소를 나누고
이제 복음묵상의 글을 씁니다.
구마와 치유기적에 대한 귄한과 의무를 주신 주님!
저희에게도 굳건한 믿음을 주시어 치유임무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육체적자비활동인 치유의 임무와 영적인 자비활동인 구마의 권한으로 필요한 애덕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강인한 믿음을 주소서
일상의 삶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기적으로 찬미드리게 해 주시고
살아계신 당신을 만나게 해 주소서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진리에 대한 믿음을 허약하게 만들어가지 않게 해 주시고
눈 앞에 기적을 깨어 있는 맘으로 보게 해 주소서
강론중 베르나데드의노래의 영화 첫 자막인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설명도 필요없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설명을 해 주어도 알아듣지못한다" 는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공동체안에서도 놀라운 기적이 많음을 깊이 느끼는 오늘!
미사후의 기쁨이 살아계시는 주님을 느끼게 해 주시어 넘넘 감사드립니다.
또
11주간을 그 분안에서 잘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말씀의 은총을 풍부하게 받으셨습니다!
신심이 좋으시고 묵주를 손에서 떼어 놓지 않고 기도를 많이 하시는 89세 안나 자매님께서 평소 지병이 있으시기는 했어도, 평일 미사를 자주 나오셨는데,
어느날 부터 주일미사만 아들에게 의지하여 나오시는것 같았습니다.
그 어르신께서 며칠전
새벽에 갑자기 임종 하시어, 병자성사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시어
참 안타까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 병자 성사를 못하고 가셨는데
주님께서 어떻게 선처 하실지요 !!
장례미사도 사제 성화의날과 겹쳐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못 하시고 ,
전날 장례식장에서
장례미사 를 했습니다.
마음은 있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갈수
없는데 장례미사도 참석 할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관
예절도 참석하여 기도 했으며, 장지까지 가서 기도 할수 있었습니다.
감사 했습니다.
성체 조배로 늘 주님께 맡기며 기도 열심히 하는 애령부장이
그날 기도 선창하는데,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버스 안에서 연도하고,
자비의 기도까지
했습니다.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날 예령부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혼자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주님께 의탁하니 할수 있었고 , 많은분들이 봉사에 참여 하시니
힘들지 않고 행복하게
그분을 위해 봉사 할수 있었다고 했으며,
하느님께 영광돌리는것도 잊지 않고 하더군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믿음과 행동으로
실천하여 흐뭇했습니다.
오늘 주일 신부님 강론글 너무 감사해서 뭐라도 적고 싶은데
감히 적을수 없네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교황님께서 호소 하시는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라시는 말씀에 조금 이나마 실행 한것 같아 적었습니다.
신부님 강론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위의 두 댓글은 강 데레사님이 저에게 따로 보내주신 댓글을 두 군데에 나누어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