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창세 12,1-9; 마태 7,1-5 /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023.6.26.; 이기우 신부
연중 제12주간의 독서는 창세기로서 특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2천 년도 전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시고 사도로 양성하신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되어 주는 한편, 팔레스티나라는 좁은 지역에서만 행해진 예수님의 공생활을 후대의 모든 역사와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도록 확대재생산함에 있어서 하나의 보편적 틀이 되어줍니다. 즉, 예수 이전의 아브라함을 그리스도 이후 생겨날 또 하나의 선교사로 가정하여 바라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상 많은 선교사들이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소명을 이해해 왔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고,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낯선 땅’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종교분열 사태로 혼란스러웠던 유럽을 떠난 선교사들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아시아 대륙에 도착하여 활약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마테오리치는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언어와 학문을 20여 년 이상 배우고 익혀서 보유론적 관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산물이 한문으로 쓴 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義)’였습니다.
그 후임자인 판토하는 유럽교회의 교리를 한문으로 번역한 이 저술보다 더 뛰어난 노력을 전개했는데, 그는 아예 처음부터 유학의 논리를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담아 중국 선비들을 겨냥하여 한문으로 쓴 수양서 ‘칠극(七克)’을 펴냈습니다. 천주실의는 한역서학서였지만, 칠극은 유학적 정신풍토에 뿌리내린 보유론적 윤리신학 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 진리를 아시아의 정신문화에 토착화시키려던 이러한 지성적 노력은 당시 명 왕조 시대 선비들에게서보다 이웃 나라 조선의 선비들에게 더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벽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이 두 서적을 건네받은 선비들 가운데 정약용 사도 요한이 있었는데, 이 두 서적을 읽고 감화된 수백 명 조선 선비들 중에서 그만이 판토하의 토착화 노력을 본받고자 당시 조선 사회의 실정에 꼭 필요했던 개혁사상을 담았습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비롯한 여유당전서 5백여 권이 그 결실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젊은 나이에 천주교를 통해 알게 된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서 이루고자 꿈꾸었던 새 나라는 아브라함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가나안에서 일구고자 했던 하느님의 집안에 못지않게 거룩하고 정의로운 나라였습니다.
이벽 세례자 요한은 정약용 사도 요한을 포함하여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남인 계열의 젊은 선비들 스무 명을 한국초대교회의 주춧돌로 삼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는 말씀을 믿고 모여든 열두 제자를 본받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 제자들이 처음에는 고루하고 경직된 유다교의 율법사상에 물들어 남을 심판하기도 하고,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내주겠다는 식으로 함부로 인간관계를 맺으려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 즉 사도들의 공동체로 양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성숙한 처신으로 수양을 쌓은 공동체야말로 일곱 가지 죄악 즉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등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할 수 있는 겸손, 절제, 관용, 은혜, 정절, 인내, 근면 등 칠극의 집단이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2백여 년 전 한국초대교회를 이루었던 젊은 선비들을 매료시켰던 복음적 매력이 또한 이것이었습니다. 그 지도자들이 모조리 거세되었던 신유박해 이후에 그 선비들보다는 학식은 모자랐지만 믿음은 더 뛰어났던 일반 신자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는 용기를 내서 전국에 흩어져서 교우촌을 세우고 거기서 자유롭게 기도를 하고 교리를 서로 가르치고 배웠던 복음적 매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당하고, 못된 관리들로부터 무시와 착취를 당하던 모순 투성이의 조선 사회보다는, 만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고 남녀가 동등하다는 천주교 교리가 알려주는 교우촌은 새로운 세상이었고 복음진리의 해방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첩을 두었던 양반들은 첩을 내보내고나서 세례를 받았고, 노비들을 하인으로 부리던 양반들은 신자가 되자마자 그들을 자유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신분이 해방된 그들은 권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교하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된 그들 모두, 양반이건 천민이건간에 신분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교우촌에서 배우고 이 땅의 문명을 2백 년 이상 앞당겨 놓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 말씀에 따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사는 이 백성은 자신들을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자연스럽게 노력합니다.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가꾸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소유가 된 메시아 백성이며,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새로운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은 또 하나의 아브라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수많은 아브라함들을 부르시어 새로운 곳곳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오래전에 어느 수녀님께서 신부님이 안 계시어 말씀의 전례때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때 강론 내용이 너무 좋고 훌륭하게 잘하시어
탄복 한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깨달으신 말씀이신지 궁금 해서
여쭤 봤습니다.
칠극 이란 책 내용을 말씀
하신거 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칠극 이란 말을 처음 듣고 ,
전주에 있는 바오로서원에
갈 일이 있어
칠극 이란 책이 있는지요?
수녀님께서 일반 신자가
칠극 책을 찾는분 못 봤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구입 해서
어렵고 내용이 방대 하니 아직까지도 다 못 읽고 있습니다ㅜ
칠극 이란책이 어떻게 해서 쓰여진줄도 모르고 무지 했는데 신부님 설명으로 조 금은 이해 되었습니다.
다시 읽어 봐야 겠네요.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새로운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은 또 하나의
아브라함 이다는 말씀
새겨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셨군요. 우리 신앙 선조들께서, 양반이든 중인이나 상민이나 천민 등 신분을 막론하고, 인간의 윤리도 모른다고 무시하는 천대를 받으며 또 임금과 국법을 어긴다고 깔보며 가하는 그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고결한 품격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칠극'을 읽고 이를 풀어서 전해준 역사적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억지 논리로 문초하면서 배교하라고 강요하던 관장의 물음에 막힘없이 대답하면서 오히려 그 자리를 천주교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자리로까지 만들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천주실의'를 읽고 이를 풀어서 암송했던 역사적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 자리를 '말씀'과 '사회교리'가 자리잡고 있지요. 제가 이 카페를 통해서 매일 강론과 복음서 주해 및 묵상을 전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강론을 잘 읽고 이해하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