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나해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코 16,9-1)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안 믿으면 그냥 악하여서
세상에는 우리를 속이려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속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속이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주의하는데도 속습니다. 저희를 속이려 하는 이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강한 이들입니다. 그 속임수가 들통나더라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고 속입니다. 한 번에 목숨을 거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 이들이 사람을 잘 속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빵 하나 훔쳐도 큰 벌을 받지만, 힘 있는 이들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속적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돈과 권력을 노리고 속입니다. 혹은 결혼하기 위해서도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익이 없이 속이는 예는 없습니다. 수산나를 죽이려던 두 노인은 자기들의 분노를 풀기 위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설득력 있는 말로 속입니다. 설득력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쓴다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싱과 같은 경우는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갑자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부모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긴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 번째와 비슷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가 들어도 타당한 말로 사기칩니다. 만약 보이스 피싱을 하는데, 자녀가 지금 달나라에 가서 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황당한 주장으로 속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악한 마음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죽어서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 믿었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절대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첫 번째 이 주장을 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당시 숫자에도 들지 않는 여인들이었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도단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잘못 주장했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뒷일도 보지 않고 자기주장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사기꾼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부활의 증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 세상에서 얻는 이익이 있을까요? 사도들도 안 믿는데 무슨 이익을 볼까요? 이미 세상은 권력자들에 의해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건 속임수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들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냥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예수님이나 천사가 나타났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성적 조작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세상 창조 이래 가장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부처까지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고 하고 죽었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여기저기서 나타난다는 말은 우리 자녀가 달나라 가 있다고 하는 말보다 당시에는 더 황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냥 죽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그래도 안 믿는 것은 믿기 싫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 생각이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 “네가 하는 말에 네 목숨을 걸 수 있어?”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약자들이 세상 이익과 상관없이 비이성적인 가장 황당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진실일 확률이 그 무엇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황당한 주장으로 이미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으면, 그건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