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기적을 전하는 성사
레위 23,1-37; 마태 13,54-58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17.8.4.
오늘 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주님의 축일들에 관한 규정들을 주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파스카 축일, 무교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등에 관한 전례 규정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으로 뽑힌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께만 시간과 제물과 제주를 바치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명과 이를 위한 축복이 그분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분의 지혜와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나자렛 마을을 비롯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때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 기적 역시 하느님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전해 듣고도 그 신적 기원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외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평가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인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1786~1859) 사제입니다. 그는 프랑스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활동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어서 수많은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요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이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복음적 구호를 내걸기는 했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살육과 약탈과 방화 같은 폭력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그 와중에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살해되고 수도원이 파괴되는 폭동도 일어나던 그 혁명의 시기에 시골 본당신부로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광기어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이 성당을 찾지 않고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세태를 목격하고는 말없이 본당 고해실을 지켰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일상활동을 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 평균 18시간 동안이나 줄곧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빈 고해실을 지켰습니다. 아마도 셀 수도 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한 두 명이 고해실로 찾아오더니 소문이 점점 퍼지면서 점차 늘어났습니다. 그 본당 신자들만이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고해성사를 보러 찾아왔습니다. 고해를 하는 신자들에게 주는 보속을 통해 그가 지닌 성덕이 알려진 결과, 그 시골에서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성덕이 출중했던 사제는 20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도 출현하였습니다. 로렌조 밀라니(Lorenzo Milani, 1923~1967) 신부는 파시즘의 광기가 휩쓸던 그 무렵에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던 본당에 부임하여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치게 해서 세상을 알게 하는 대안 교육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1954년에 부임한 바르비아나 본당은 전기도 수도도 길도 없는 산악 지대에 위치한 가난한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문맹인 것을 알고 그는 학교부터 세웠습니다. 그가 생각한 교육 이념은 ‘서로 돌보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예언자이며 스승’이라고 칭송한 밀라니 신부의 가르침에 대해 이탈리아의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습니다. “‘나는 학교를 사랑합니다. 학교는 현실과 그 이면의 실재를 향한 개방성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그래야 하기는 합니다! 학교가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기 때문에, 구조가 조금씩이라도 변화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닌다는 말은 실재의 다양한 양상에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개방한다는 말입니다. 실재와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학교는 이 실재를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곳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배우면 이 능력은 끝까지 우리에게 남아 현실에 개방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교육자, 사제였던 로렌조 밀라니 신부의 가르침입니다”(2014.5.10.).
밀라니 신부는 “성사는 … 그리스도께서 살아 활동하시는 현재적 존재를 드러내는 징표이며, ‘성스러운 말씀’ 혹은 ‘세속의 말씀’이라는 구분 없이 ‘말씀’ 자체이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지적하면서, 교육이 바로 성사이며 학교는 ‘여덟 번째 성사’라고 강조하였습니다(「Civilta Catholica」, 2017.6.17.).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고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시키는 교육제도 대신에, 그는 생동하는 행복한 삶을 교육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던 교육자로서,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지혜와 기적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강론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워주는 레위기의 가르침과 실제로 그 거룩한 지혜에 바탕하여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지혜와 기적을 행하고자 성사를 열성적으로 봉행했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심지어 교육도 성사로 바꾼 로렌조 밀라니 등 사제들의 삶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바와 같이, 학교는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고 기존의 사회 현실을 답습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현실을 배우고, 또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배우면서 미래를 현재로 앞당기는 창조의 현장입니다. 진정 학교는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기적의 힘을 체험하고 또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배우는 성사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고 그분의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고정댓글: 교황님께서 언급하신 ‘실재’라는 용어는 교황 문헌과 신학 논문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원어로는 realitas, reality인데 세상에서 말하는 ‘현실’과는 비슷하면서도 더 깊은 뜻으로 쓰입니다. 세상의 현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실까지도 포함한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도 실재이고, 현실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도 실재이며, 그 결과로 창조되고 나타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도 또한 실재입니다.
고정댓글 2: 그런데 학교라는 교육 현장에서 이 ‘실재’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거룩한 영감을 일깨워주기보다는, 보이는 현실에 대해서만 가르칩니다. 그것도 무신론적 성향이 농후한 현실 이해만 가르칩니다.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하느님과 신앙 현실에서 멀어지게 되는 현재의 사태는 이러한 학교의 실상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적과 암기 위주의 학습으로 많은 학생들을 낙오자로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고정댓글 3: 따라서 학교와 교육이 세상과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불평등한 절망을 재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과 학교가 개혁되면, 세상의 세속적인 지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지혜를 전해주는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학생들이 생기 발랄하고 자신의 미래와 세상의 미래를 더 알차게 꿈꾸는 존재로 변화되는 기적을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밀라니 신부가 '여덟 번째 성사'라고 불렀던, 학교와 교육 현장이 지혜와 기적의 자리가 될 수 있는 이치입니다. 교황님께서 고뇌하시며 하신 말씀이라 생각되어 제 나름대로 풀이해 드렸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에 대해 자세히 몰랐는데
너무 감동스런분이 셨네요.
더 놀라운것은 교육을 ^8번째 성사^ 라고 까지 하신 로렌조 밀라니 사제님에 대한말씀, 신부님 아니 셨더라면 몰랐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 하셨다는 ^실재^라는 단어뜻 이해 할수 있게 써 주시어 충분히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도 *실재*이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도 *실재 *
신부님께 너무 감동스럽고 감사 해서 댓글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너무 감사 합니다~
라고 밖에 쓸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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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댓글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 주시니,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