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순간
/이정희
늦더워가 걷히고 아침처녁으로 부는 바람이 서늘해졌다 며칠 전 가을옷을 껴내 입으려고 장롱문을 열다가 뒤로 나자빠졌다. 훤 했다. 순간적으로 오는 텅 빈 느낌! 옷걸이를 거는 가로 기둥이 주저앉아 옷들이 쓰려져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었다. 입으려 생각했던 옷을 힘들게 빼내 살펴보니 구김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잠깐의 다림질로 해결 될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애를 먹어야 할 것 같아 일을 무서워하는 내 가슴까지 답답해졌다.
옷을 바꿔 입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두어 정거장 거리인 책방에 다녀오려던 계획을 돌연 접을 수밖에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침대에 걸터 않아 그 꼴을 지켜보고 있다가 찬찬히 사태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저건 분명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언제부터였을까? 빽빽하게 결린 옷들이 저 기둥의 버틸 무게를 넘어셨던 모양이고, 기둥은 대책 없이 날이 갈수록 점점 지쳐갔을 터이다.
"주인님, 여기 좀 보세요. 너무 힘이 들어요.''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어 그 기둥은 내가 장롱문을 열어주기를 불볕더위 속에서 날마다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기둥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하는 주부가 여름 한 철이 다 가도록 옷장 문 한 번 안 열어보다니ᆢ. ''그동안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쩌면 나에게 이리도 버거운 짐을 주고 몰라라 할 수가 있습니까? 내 깜냥으론 견딜 만큼 견뎠거든요."
기둥이 나에게 손가락까지 들이대며 항의하는 것 같았다. 폭삭 쓰러져 앉은 옷들은 그들대로 통사정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야말로 모양새대로 반듯하게 걸려 있고 싶었어요. 버틸 만큼 버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옷장 문을 언제 열었는지 모르겠다. 혹독한 무더위의 연속으로 지루한 여름이었다. 초여름에 꺼내놓은 몇 벌 편하고 고슬고슬한 옷만 장롱 밖 간편 옷걸이에 걸어두고, 줄곧 그것들을 갈아입 기만 했으니 ᆢ. 꼭 그것만도 아니었다. 왜 나는 그리 많은 옷을 걸었던가? 언제 또 입겠다고 그리 오래된 옷들을 가려내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