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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열경(金悅卿.김시습)은 불우한 환경에 빠졌었으나 시문이 극히 고매하였다. 서달성(徐達城.서거정)이 일찍이 한 차례 초대하여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를 내어놓고 화제를 청하였더니, 즉시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썼다.
비바람이 소소히 낚시터 스치는데 / 風雨蕭蕭拂釣磯
위수의 고기ㆍ새 기심을 망각하네 / 渭川魚鳥識忘機
어찌하여 늘그막에 응양장되어 / 如何老作鷹揚將
공연히 백이 숙제 주리어 고사리 캐게 하였노 / 空使夷齊餓采薇
달성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앉았다가 말하기를,
“자네의 시는 바로 나의 죄안(罪案.범죄 사실을 적은 기록)일세.” 하였다.
● 정장원 인인(鄭壯元麟仁)의 어머니는 문장에 능하였다. 비록 스스로 숨기고 시험하지 않았으나 내놓게 되면 아주 뛰어났다. 그의 오빠가 일찍이 굳이 청하였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자못 여자가 할 일은 아니나 공을 위하여 한번 보여 주리다.”
하고, 인하여 벽에 걸린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를 제목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머리 흰 낚시꾼이여! / 鶴髮投竿客
초연하여 세상 늙은이 아니네 / 超然不世翁
만일 서백(西伯.주문왕)이 사냥가지 않았던들 / 若非西伯獵
길이 오가는 기러기나 벗하였으리 / 長伴往來鴻
뒤에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의 시 보기를 청하므로 이 시를 써 주었더니, 읊조리기를 한참 동안 하다가 말하기를, “아무래도 여자의 의태가 있다.” 하였다.
양주(楊州) 회암사(檜岩寺) 문미(門楣.문 위 대들보)에 ‘천보산(天寶山)’이란 세 글자가 걸려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원 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와서 보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이 글씨에는 귀족의 기습이 있다.’하고, 한 사람은 ‘부처의 의태가 있다.’고 하였다.”
하는데, 과연 이것은 전조(前朝)의 왕자로서 중 노릇한 사람의 글씨였다.
● 유응부(兪應孚)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장군의 인의가 오랑캐를 진압하니 / 將軍仁義鎭夷蠻
국경 밖에 전생 사라져 사졸이 조네 / 塞外塵淸士卒眠
긴 낮 빈 뜰에 볼 것이 무엇인고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백 마리 다락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남추강(南秋江.남효온)은 그 말구를 들어, 족히 그 기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전편이 세상에 많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한다.
삼탄(三灘.李承召)이 중국에 질정관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의 끝 구는 다음과 같은데,
이문을 결정하는 것은 심상한 일이니 / 吏文質正尋常事
단적으로 주역 가져다 괘상 이전 일 물으렴 / 端取羲經問象前
박눌재(朴訥齋.박상)가 또한 질정관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의 끝 구도 삼탄(三灘)의 끝구와 한 자도 가감이 없었다. 선후로 논하면 눌재가 당연히 삼탄을 습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눌재와 같은 고항(高亢.뜻이 높아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음)한 분이 우리나라 사람의 어구를 전용함이 이러하였을지, 참 이것은 알 수 없을 뿐이다.
● 김하서(金河西.김인후)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 한 구를 지었다.
영산홍이 사양 속에 비치고 / 映山紅映斜陽裏
오래도록 이 대구를 찾지 못하다가, 하루는 좌랑 이후백(李後白)이 찾아 왔기에 말하였더니, 그가 지황(地黃)이 뜰에 난 것을 보고 이렇게 지었다.
생지황이 가는 빗속에 났네 / 生地黃生細雨中
하서는 그럴싸하게 여겼다.
● 직학 김천령(金千齡)은 아이 때에 그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안겨 있는데, 손님이 시 한 구를,
구름 거친 하늘 가에 둥근 달이 높고 / 雲收天際高輪月
라고 짓고, 그의 조부로 하여금 대구를 채우라고 하였는데, 미처 대답하지 못하자, 김천령이 그 조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바람 멈춘 강 가운데 한 조각 배러라 / 風定江心一葉舟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하므로,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김천령은 후에 과연 과거에 장원하여 문장으로 이름났다고 한다.
● 신영성 기재 상공(申靈城企齋相公.신광한)은 한번은 낮잠을 자다가 소나기가 화분에 심어 놓은 연[荷]에 지나는 것을 듣고 깨어서,
꿈은 연잎에 쏟아지는 비에 서늘하고 / 夢涼荷寫雨
라는 시 한 귀를 얻고 수년 동안 알맞은 대구를 채우지 못하여, 인하여 근률(近律)을 지을 때에 있어서도 그 줄을 비워두고 기필코 기묘한 대구를 얻어 채우려고 하였다. 박사문 난(朴斯文蘭)을 만나 언급하였더니, 박난은,
옷은 돌에서 생기는 구름에 젖네 / 衣濕石生雲
라고 지어, 기재에게 고하였으나, 기재는 안 된다고 하여, 종신토록 그 짝을 얻지 못하였다 하니, 시인들의 시구를 찾는 부지런은 이러하였다.
● 김이숙(金頤叔.김안로)은 정자를 동호(東湖)에 지었는데, 창 밑에 있는 소나무가 눈을 이고 있는 것을 보고,
창은 소나무 위 눈을 누르고 / 窓壓松頭雪
라는 시 한 구를 얻었으나, 오랫동안 대구를 찾지 못하였다. 마침 정호음(鄭湖陰.정사룡)이 찿아왔으므로 김이숙이,
“먼저 이 시의 대구를 채운 연후에야 앉을 수 있소.”
하자, 정호음이 즉석에서,
마루는 기러기 등 바람에 임했도다 / 軒臨雁背風
라고 응대하였더니, 김이숙은 되었다고 하였다.
● 시인들이 뜻을 붙여 읊은 것은 대저 풍자를 함축한 것을 기묘함으로 삼는다.
김이숙이 동호에 있는 정자를 보락정(保樂亭)이라 편액을 붙이고, 정자 운(韻)을 신기재(申企齋)에게 청하였다. 기재는 이숙에게는 그의 누님 아들이 된다. 시에,
진퇴에 걱정 있어도 공은 낙을 보존하고 / 進退有憂公保樂
행장에 뜻이 없어 나의 참을 온전케 하네 / 行藏無意我全眞
강산은 모두 한손에 농락되고 / 江山盡入陶甄手
달 아래 피리는 비단옷 입은 사람에게 마땅하네 / 月笛還宜錦繡人
라고 시를 지었는데, 김이숙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또 심정(沈貞)의 소요당(逍遙堂)에 쓴 시에는,
낙엽은 가을 산골에 쌓이고 / 落葉藏秋壑
사양은 빈 산에 비춘다 / 斜陽映半山
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대개 왕가(王賈.왕안석과 가도)로써 논한 것이었으나 심정은 또한 자못 깨닫지 못하였다.
● 상사(上舍) 홍유손(洪裕孫)은 남양(南陽)의 향리였다. 본읍에서 침해하여 역사시키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생원에 합격한 뒤에 과거보려 하지 아니하고, 방외의 선비가 되어 방랑하면서 스스로를 높게 여겼다. 금강산 석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몸이 단군 무진년보다 앞에 생기고 / 身先檀帝戊辰歲
눈으로 기왕이 마한이라 이름함을 보았다 /眼及箕王號馬韓
영랑과 수부에서 놀려고 하다가 / 要與永郞遊水府
우연히 술에 이끌려 인간에 머물렀네 / 偶牽春酒滯人間
당시 사람들은 신선이 지은 시라고 하다가, 뒤에 홍유손이 왕래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홍유손의 지은 시임을 알았다.
● 소퇴휴(蘇退休.소세양)가 파직당하고 호남에 있을 때에, 상영부(尙領府)가 정승으로 있으면서 김제 노안(金堤蘆雁) 두 족자에 시를 써 주기를 청하니, 소퇴휴는 절구 두 수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돌려 보냈다.
단풍지고 마름 향기롭고 갈대꽃 피었는데 / 楓落蘋香蘆荻花
성근 깃이 뜻대로 갠 물결에 떠 노네 / 疎翎隨意泛晴波
변방 하늘 어젯밤에 풍상 사납기에 / 塞天昨夜風霜厲
갑자기 강남의 세월을 사랑하였네 / 却愛江南有歲華
쓸쓸한 외로운 그림자 저문 강가에 / 蕭蕭孤影暮江潯
붉은 여뀌꽃 쇠잔하고 양 언덕 어두운데 / 紅蓼花殘兩岸陰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친구 부르지만 / 漫向西風呼舊侶
구름과 물의 깊이 몇만 겹인지 알 수 없네 / 不知雲水萬重深
이는 모두 자신을 비유한 것이지요, 또 너무도 그림과 같았으니, 적특한 읊음이라고 할 만하다.
● 용재(容齋) 이상공(李相公.이행)은 젊을 때, 한 재상이 반죽(斑竹)이 그려진 장자(障子.안팎을 가리는 병풍의 유) 하나를 내어, 다른 노신(老臣)에게 시를 써 주기를 청하니, 그가 중얼거리기만 하고 아직 짓지 못한 것을 보고 먼저 한 절구를 다음과 같이 썼다.
눈비 내리는 소상 언덕에 / 淅瀝湘江岸
소소한 반죽 수풀이러라 / 蕭蕭斑竹林
이 속에 그려내기 어려운 것은 / 這間難畫得
그 당시 두 왕비의 마음이네 / 當日二妃心
제공들은, 비록 노숙한 사람이 짓더라도 이만 못할 것이라 탄복하고 드디어 써 넣었다.
● 이목은(李牧隱.이색)이 당(唐) 나라에 들어가 유학할 때에, 당 나라 사람이 다음 한 구로 대구을 구하였는데, 자못 조롱하는 뜻이었다.
잔 들고 바다에 드니 바닷물 많음을 알겠다 / 持杯入海知多海
목은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대구를 채웠다.
우물에 앉아 하늘 보고 하늘 적다 하네 / 坐井觀天曰小天
당 나라 사람은 부끄럽게 여겼다 한다.
● 양재(良齋) 최연(崔演)이 지은 인종의 만사에는 이런 시가 있다.
삼년 복제 줄임은 마음으로 한 나라 가볍게 긴 것이요 / 三年短制心輕漢
오월 시묘한 것은 예가 등 나라보다 낫다 / 五月居廬禮過滕
임형수(林亨秀)는 이렇게 지었다.
차마 오늘의 눈물 가지고 / 忍將今日淚
거듭 지난해 젖은 수건 적실 줄이야! / 重濕去年巾
대개 인종과 중종이 연달아 승하한 것을 말한 것이니, 그 때에 잘 지은 시라고 하였었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을 때 사암(思庵) 박순(朴淳)은 보덕(輔德.세자 시강원의 벼슬)으로 있었는데, 만사를 이렇게 지었다.
승화(세자궁을 가리킴)는 상심하는 곳이 되었는데 / 承華已作傷心地
옥루는 오히려 새벽 문안 시간 알리네 / 玉漏猶傳問寢晨
말이 매우 애절하였다.
● 모재(慕齋) 김상공(金相公.김안국)이 돈재(遯齋) 성상공(成相公.성세창)의 집에서 여러 재상들과 이야기할 때에 시의 운(韻)자 달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데, 모재가 말하기를, “어찌 달기 어려운 운자가 있겠소?”
하였더니, 여러 재신들은,
“지나친 말씀이외다.”
하고, ‘독역(讀易.주역을 읽는다는 뜻)’이라는 것으로 제목을 청하고 강한 운자를 불러 짓게 하였는데, 모재는 좋다 하고, 즉시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큰 솥에 국은 원래 매실이나 소금으로 간하지 / 大羹元不和梅鹽
지극한 도는 붓이나 혀끝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 至道難形筆舌尖
고요히 앉아 묵묵히 소장의 이치 관찰하니 / 靜坐黙觀消長理
달은 둥글어서 거울 같다가 또 낫과 같네 / 月圓如鑑又如鎌
여러 재신들은, 공연히 큰소리 치는 것이 아니라고 탄복하였다.
● 기재(企齋)는 스스로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다른 사람의 시를 읽어보지 아니하였고, 처음으로 두목(杜牧)의 화청궁(華淸宮) 시 배률(排律)을 배우다가 인하여 시 짓는 법을 배웠는데, 비록 말년에 있어서도 지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한 번 외운 연후에야 집필하였다.” 하였다.
● 박눌재(朴訥齋)는 비록 바쁜 벼슬을 맡았을 때에도 밤이면 반드시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외우고 근률(近律) 한 수를 지은 연후에야 취침하였다고 한다.
눌재(訥齋)는 일찍이 문생(門生)에게 모함을 당하였었다. 하루는 그 사람이 문에 찾아왔는데 보지 아니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여 주었다.
화열한 말을 잘못 겸손하고 공순한 줄로 알았더니 / 誾誾誤解示謙恭
소매 속엔 남몰래 예를 쏘는 활을 감추었었네 / 袖裏潛藏射羿弓
우습기는 인심이 참으로 험악한 것 / 堪笑人心眞九折
바지 찢어 발을 감싸고 구름 속으로 향하려오 / 裂裳裏足向雲中
그가 비록 죄짓고 저버리기는 하였으나 눌재의 꾸지람은 또한 너무 과하지 않은가?
● 상사(上舍) 심극효(沈克孝)는 중종 때 서울에 은거하여 남산 밑에 집을 지었는데, 율정(栗亭)이 있어 더욱 좋았었다. 한때에 유명한 집이라고 하였는데, 한 재상이 찾아와 술 마시며 즐기다가 새 집을 주고 바꾸려고 하자, 심극효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천하의 반을 갈라 주고 악양루(岳陽樓)로 값을 더 준다 하여도 바꿀 수 없소.”
하였다. 한상 형윤(韓相亨允)은 농담을 잘하였었는데,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반분에다가 악양루로 값을 더 주고 바꾸기로 한다면 그대의 교환하는 일을 모름지기 애써 이루려 할 것이오.”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여 전하였었다. 그가 작고하니, 용재(容齋)는 만사를 이렇게 지었다.
한 골짝도 천하의 반을 당하는데 / 一壑自當天下半
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꿀쏘냐 / 栗亭寧換岳陽樓
● 영(令.종5품의 관명) 조성(趙晟)은 용문(龍門.조욱)의 백씨로 어진 덕이 세상에 칭해졌다. 일찍이 꿈에 삼각산에 놀면서 지은 시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달 사랑하는 것은 유혹된 게 아니고 / 愛月非爲惑
산 탐내는 것은 염치에 해롭지 않다 / 貪山不害廉
매화를 읊은 시에는 다음의 글귀가 있다.
한 가지 두 가지 높고 / 一枝二枝高
석 점 넉 점 희다 / 三點四點白
일찍이 심병(心病)을 앓게 되어서는 못을 파서 ‘양심지(養心池)’라 하고, 연[藕]을 심어 ‘양심화(養心花)’라고 하여, 모두 시를 지어 스스로 경계를 삼았다고 한다.
상(尙) 정승은 꿈에 높은 다락 호화스러운 잔치 자리에서 이렇게 근률(近律)을 지었다.
백 자 넘는 높은 닭 중천에 기대었고 / 百尺高樓倚半天
세 줄 분바른 여인들 호화로운 자리에 벌여 있네 / 三行粉黛列華筵
앞의 강은 한 띠와 같이 평야를 둘렀고 / 前江一帶圍平野
먼 산의 일천 봉우리 짙은 안개 속에 드러났네 / 遠峀千岑露抹煙
때로 아름다운 꾀꼬리 푸른 버들 뚫는데 / 時有嬌鶯穿翠柳
다시 경쾌한 제비 붉은 줄 건드리지 않는구나 / 更無輕燕點朱絃
끝 구(句)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놀라 깨었다. 인하여 꿈속의 말을 되새겨서 다음과 같이 채웠다.
다락에 사는 사람 장막 속의 손 아니니 / 樓居非是幕中客
금병풍 눈앞에 두르는 것 필요없네 / 不用金屛在眼邊
기개와 도량이 매우 좋았다.
● 교리 고이순(高而順.고경명)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
젊은 시절 풍류는 유독 뛰어났는데 / 少日風流獨不群
만년의 강호생활 병마저 나누어 가졌네 / 暮年江海病兼分
주저되기는 상강의 병이라도 앓아야 할까 / 趑趄肯作湘中病
호걸은 응당 영외의 글을 짓는다지 / 豪健應脩嶺外文
조수가 해문에 드니 하늘은 물을 치고 / 潮入海門天拍水
해가 포구에 지니 장기가 구름같이 이네 / 日沈漁浦瘴如雲
강남인지라 역마의 소식이 없기에 / 江南驛使無消息
매화를 꺾어 그대에게 주지 못하네 / 折得梅花未贈君
계해년에 인순의 아버지 및 그 장인이 모두 벼슬이 떨어져 호남으로 돌아갔었고, 이순 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순이 부임하지도 아니하여 논핵을 받아 파직되므로 또한 호남으로 돌아갔으니, 이시의 응험이 과연 적실하였는지 알 수 없다. 뒤에 고공(高公)이 동래 부사가 되었었는데, 문득 의연히 꿈속에 본 것과 같았다고 한다.
● 정(正) 김홍도 중원(金弘度重遠)은 진사ㆍ급제에서 모두 장원, 영남에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 서당(書堂)에 있을 때 대책(對策)하는 것이 대단히 좋았고, 세 번 장가들어 두 아들을 두었었다. 그의 벗 집의 강극성(姜克誠)ㆍ부사 정질(鄭礩) 등은, 중원이 청수(淸粹)하므로 쉬 죽을 것 같다고 하여, 다음과 같은 만시를 지어 희롱하였다.
나이 젊어 진사 급제에 장원한 사나이가 / 靑年蓮桂壯元郞
미원과 옥당을 출입하네 / 出入薇垣與玉堂
영남에 감군되어 이름이 알려지고 / 南嶺監軍知姓字
동호에서 대책으로 문장을 독차지하였다 / 東湖對策擅文章
한 사람이 세 아내로 두 아들 두었고 / 一人三室遺雙果
네 무덤이 천추에 한 상을 같이하리 / 四塚千秋共一床
검푸른 머리 세상 친구가 슬퍼하고 / 綠髮世間悲故舊
흰 머리 홀어머니가 당상에서 우네 / 白頭堂上泣親孀
오래되지 않아서 중원이 귀양가서 죽어 벼슬이 이에서 그치고 어머니가 아직 생존하였으니 어찌 시의 예언이 아니겠는가? 친구들의 장난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랴?
● 임석천(林石川.임억령)의 시는 옛 시구를 전용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창녕(昌寧) 추월헌(秋月軒)의,
만사는 이미 황발이 되었으니 / 萬事已黃髮
돌아가 창해에서 밭갈이 하려네 / 歸耕滄海濱
는 것과, 상(尙) 정승에게 올린 시에서,
안전하고 위태함은 대신이 계시니 / 安危大臣在
어찌 강호에 머무는 것을 한하리오 / 何恨滯江湖
라는 따위의 말이다. 여타의 것은 다 기억할 수 없으나 대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석천은 기운을 숭상하여 고분고분 법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큰 붓을 내둘러 오언 절구를 짓되 종이의 대소에 꽉 차니, 이따금 소루한 데가 있는 것이 또한 적지 않다. 그의 시에,
하늘은 큰 들에 드리우니 새파랗게 크고 / 天垂大野蒼蒼大
새는 빈 창에 지나니 점점이 밝네 / 鳥度虛窓點點明
라는 것이 있고, 또 장여필(張汝弼)의 초서첩(草書帖)을 읊은 시에는,
이 노인 가슴속에 백 가지 기괴 굼틀거려 / 此老胸中百怪蟠
장사가 쇠뇌 당기듯 웅장하네 / 雄如壯士挽黃間
갠 무지개 달을 꿴 듯 온 당이 그림이니 / 晴虹貫月一堂畫
정히 임옹이 밤중에 보기 좋겠네 / 政好林老中夜看
라고 하였으며, 구정봉(九井峯) 시에는,
사람들의 입에는 구정봉 위에는 / 人言九井上
연잎이 쟁반처럼 크다네 / 蓮葉大如盤
가을 오매 깊은 흥 일어 / 秋來生遠興
새파란 절벽 달밤에 오르네 / 靑壁月中攀
라고 하였으니, 그의 기운 숭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묶어 세운 삼각산이 하늘을 꿰었으니 / 束聳三角貫太淸
오르면 두성 우성 딸 수 있으리 / 登臨可摘斗牛星
봉우리가 구름 비만 일으킬 뿐 아니라 / 非徒岳岫興雲雨
능히 우리나라를 만세토록 편안케 하네 / 能使東方萬世寧
이 시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열경(金悅卿)이 아이 때 삼각산을 읊은 시라고 하였으나 그 자신의 변명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도 분명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는 곧 어느 사람이 지은 것인데 열경의 것으로 취급할까? 그러나 상사(上舍) 홍유손(洪裕孫)은 열경의 제문에서 또한,
“삼각산을 읊은 한 절구는 노유(老儒)로 하여금 마음이 싸늘하게 하도다.”
하였으니,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일으킴이 있다.
●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은 천품이 매우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시문을 일찍이 뜻에 두지 않았으나 손에서 나오면 반드시 아름다웠다. 〈병회부(病懷賦)〉라는 것이 있는데 신기재(申企齋)는 항시 한 통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읽었으며, 이용재(李容齋)는 또한 말하기를,
“형이 힘써 배워 그 재주를 확충하였더라면 우리 무리는 감히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었다.
일찍이 남산 기슭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뉘 집에 도가 있어 충천할 수 있는고 / 誰家有道可冲天
요리하면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리 / 料理終知却不然
시험삼아 산속에 들어 베개 높이고 누웠으니 / 試向山中高枕臥
이 몸 한가한 데가 즉 신선일세 / 此身閑處卽神仙
또 강정(江亭)에 놀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한강 가 좋은 곳을 다투어 차지하여 / 爭占名區漢水濱
강을 향해 단장된 누대가 몇 군데나 되는고 / 樓臺幾處向江新
붉은 난간이 대저 고요한 데가 많으니 / 朱欄大抵多空寂
술 들고 올라 앉으면 곧 주인이라네 / 携酒來憑是主人
뜻을 얽은 것이 다 사리가 달통하여 세상을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상(尙) 정승의 매형이었는데, 그는 매양 말하기를,
“형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그 시는 《여지승람》이나 《동문선》에 수록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그때에 수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천명이다.” 하였다.
● 상(尙) 정승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화죽(畫竹)〉과 〈청우(晴雨)〉두 장자(障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재(企齋)와 호음(湖陰)에게 나누어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는데, 각기 팔운 배율을 써서 보냈다. 기재 시의 한 구에는,
소자첨(소동파) 간 후에 진필이 없더니 / 子瞻去後無眞筆
여가(문동) 죽은 이후 이 사람이 있다 / 與可亡來有此人
하였고, 호음의 시 한 구에는,
정신은 소동파의 삼생의 동안 익힌 솜씨를 옮겼고 / 神移蘇老三生習
기세는 문옹(문동)의 만 척 길이를 압도하였네 / 勢倒文翁萬尺長
라고 하여, 다 칠운(七韻)이었다. 그 용사(用事)와 조의(措意)가 동일하였으되 시어를 쓰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평생 두 사람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는데 천연스럽고 독특한 것은 쉽게 우열을 논할 수 없다.
● 명종 정사년(1557) 가을에 상이 긍정전에 납시어 백관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인하여 어제(御題)를 ‘가을에 여러 신하들에 잔치를 베풀다[秋日宴群臣]’ 여러 신하들은 덕이 같다[群臣同德]’는 등으로 하여, 칠언율시를 짓되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그 날로 지어 들이게 하였다.
이때에 영평군(鈴平君) 윤개(尹漑)는 좌상으로서 연고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었는데, 뒤에 강연(講筵)하는 기회에 말하기를,
“인주(人主)로서 백관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는 것은 부화(浮華)에 가깝습니다.”
하였다.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은 이때에 도승지로서 은대(銀臺.승정원 별칭)에 있었는데, 한위공(韓魏公.韓琦)의, ‘20년 이래에 재차 모시게 되었네[二十年來得再陪]’라는 시구를 인용하기까지 하여 변론하면서, 이것 또한 고사(故事)인 것이니, 때로는 혹 해롭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었다.
● 기미년 이후로 상이 자주 내원에다 근신들을 모아 잔치하고 제목을 내어 열무정(閱武亭)에서 시를 짓게 하되, 문신으로 시종 한 사람은 시를 짓고 무신으로 초선관(貂蟬冠)을 쓴 사람은 과녁을 쏘게 하였다. 이언충(李彦忠)은 이때 부제학이었는데 그의,
별이 과녁에 떨어지니 분가루가 바람에 나부끼네 / 星流鵠面粉飄風
라는 시수에, 어필로 비점하여 내렸고, 당시 여러 사람의 지은 것을 모두 각자 생초 두루마리에 써서 내전으로 들이라고 하였는데, 정유길이 서문을 지었다고 한다.
● 열무정의 송별에서 상공(尙公)은 수상(首相)으로서 시의 끝 구에,
말을 잊고 균문 안에서 취하고 배부르니 / 忘言醉飽鈞文裏
덕을 공경함은 헌포(獻曝.임금께 미성을 드리는 것)하는 정에 관계된다 / 敬德惟關獻曝情
라고 하였으니, 늙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체를 얻은 것이다.
● 현령 성효원(成孝元)은 하산군(夏山君)의 조카다. 13~14세 때부터 병풍과 족자를 능히 썼고, 이미 시부(詩賦)를 잘 지을 줄 알아 한때에 유명하므로, 공경들이 다투어 초대하여 글씨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만년에 음직으로 용인의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사람됨이 구속받지 않는 기남자(奇男子)이었다. 일찍이 원루에서 잠들었다가 꿈에 사모하던 사람을 보게 되어 이런 시를 지었다.
그리던 가인을 꿈속에 만나 / 情裏佳人夢裏近
옛 얼굴 초췌해진 것 서로 놀랐네 / 相驚憔悴舊形容
깨어보니 몸은 높은 누대 위에 누웠는데 / 覺來身在高樓上
바람은 긴 강을 치고 달은 봉우리에 숨었네 / 風打長江月隱峯
당시에 절창이라고 하였다.
● 현감 이희안(李希顔)과 남명 조식은 다 유일(遺逸)로 등용되었는데, 조식은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았고, 이희안은 전후 세 번이나 임명되었다. 조식은 시를 주었는데, 대개 조롱한 말이었다.
산해정 속에서 꿈이 몇 번이던고 / 山海亭中夢幾回
황강에 늙은 사람은 눈이 뺨에 가득하네 / 黃江老漢雪盈腮
반평생 세 번이나 조회하러 갔으나 / 半生三度朝天去
군왕의 얼굴도 못 보고 왔네 / 不見君王面目來
이상의 시에 산해(山海)는 조식의 정자 이름이요, 황강(黃江)은 대개 이희안을 가리킨 것이리라.
● 좌랑 이후백(李後白)과 집의 박순(朴淳)은 모두 유생 때부터 시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박순의 〈절에서 자다[宿僧舍]〉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취하여 선가에서 자다 깨어보니 / 醉宿禪家覺後疑
흰 구름 깔린 골짜기 달 지는 때리라 / 白雲平壑月沈時
날 듯이 혼자서 숲 밖에 나서니 / 翛然獨出踈林外
돌길 지팡이 소리에 자던새 깨네 / 石逕筇音宿鳥知
이후백이 지은 시는 이러하다.
작은 집 높은 곳에 있어 자미성에 가까운데 / 小屋高懸近紫微
달 가에 주의 그림자 강을 건너네 / 月邊僧影渡江飛
서호 처사가 찾아와 자는데 / 西湖處士來相宿
동쪽 봉우리 흰 구름이 초의를 적시네 / 東岳白雲沾草衣
모두 절창이라고 일컬었다.
● 서당(書堂)의 학사들이 일찍이 하루는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 석양 빛이 선명하여 갠 경치가 보기 좋으므로 다 같이 시를 지어 기록하였는데, 박순(朴淳)의 시에,
여기저기 흐르는 물 들 지나 강가로 모여들고 / 亂流經野入江沱
낙수 물방울 오히려 난간 밖 가지에 남았네 / 滴瀝猶殘檻外柯
울에 걸린 도롱이, 처마에 말리는 어망 / 籬掛簑衣簷曝網
건너다 보이는 어부의 집에 석양 빛도 많구나 / 望中漁屋夕陽多
라고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탄미하여 참으로 소리나는 그림이라고 하였다.
● 통사(通事)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서자(庶子)다. 문익공의 집에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공의 수신(壽辰)이 바로 매화가 필 때였다. 뒤에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이 여러 일가들과 이 나무 밑에서 술을 들며 각기 시를 지어 감상하였는데, 정화가 먼저 시를 지었다.
삼십 년 전에 이 매화를 기억하니 / 三十年前識此梅
해마다 오래도록 수연 때에 피었네 / 年年長向壽筵開
지금 풍상에 꺾여진 뒤로 / 至今催折風霜後
매양 꽃필 때 되면 차마 오지 못하네 / 每到花時不忍來
이에 여러 손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붓을 놓았다.
● 노산(魯山.단종)이 영천(永川)에 있을 때 달밤에 명월루(明月樓)에 올랐다가 자규 우는 소리를 듣고 다음 시를 지었다.
소쩍새 울고 산 달은 밝아 / 蜀魂啼山月白
그리움에 속절없이 다락머리에 기대어 있다 / 相思空倚樓頭
네 울음 슬프면 나도 시름하고 / 爾啼苦我心愁
네 소리 없으면 내 근심도 없다 / 無爾聲無我憂
부탁하노니 인간의 이별한 사람 / 寄語人間離別客
부디 소쩍새 우는 달 밝은 다락에 오르지 마소 / 愼莫登子規啼明月樓
● 나는 젋었을 때 제천역(濟川驛)의 승청(丞廳) 벽상에 쓰인 다음과 같은 시를 보았다.
일찍이 전조에 오얏나무 심던 때를 보았는데 / 曾見前朝種李辰
동풍이 열두 번째 봄을 불어왔네 / 東風一十二回春
시는 화표의 천 년 기둥에 쓰고 / 題詩華表千年柱
눈물은 청산의 한 줌 흙에 뿌리노라 / 洒淚靑山一掬塵
단풍나무 언덕 종소리 울리는 데는 신륵사요 / 楓岸曉鍾神勒寺
연기 낀 모래 밭 석양 젓대 소리 나는 곳은 광릉의 나루러라 / 煙沙晩笛廣陵津
가을 바람은 느슨히 창랑의 돗대를 치는데 / 秋風緩擊滄浪枻
다락 위에는 여동빈(呂洞賓)을 알 사람 없네 / 樓上無人識洞賓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
○ 집의 강극성(姜克誠)은 계해년 봄에, 꿈에 선객(仙客)과 함께 주루(酒樓)에 올랐었는데, 한 선녀가 잔을 들어 술을 권하였다. 선객이 강극성에게 시를 보여 주기를 청하므로 절구 한 수를 지어 보여주기를,
술집 단장된 다락에 방종한 광인이 / 酒肆粧樓放縱狂
만 사람의 입가에 그 성명이 향기롭네 / 萬人牙頰姓名香
그대를 만나 전세의 일을 말하니 / 逢君說着前身事
향안 앞에서 옥황을 받들던 몸이네 / 香案前頭奉玉皇
라 하고, 이어 말미에 ‘선적(仙謫)’이라고 썼더니, 선객이 보고 묻기를,
“‘선적’이라는 것은 즉 ‘적선(謫仙) 이냐?”
하였다. 잠시 후에 그 선녀가 작별하고 가려고 하므로, 장극성이 만류하고 노래 한가락 부르기를 청하였더니, 선녀가 말하기를,
“첩은 노래에 익숙하지 못하니 원컨대, 시로써 화답하겠습니다.”
하고, 바로 둥근 부채에 시를 써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쁘게 단장하고 서루에 내려와 / 匆匆粧束下西樓
두 신선을 모셔 즐겁게 놀기를 권하오 / 來伴雙仙侑勝遊
그런대로 예주(신선의 궁전)가 한 곡조 부르노니 / 聊唱蕊珠歌一曲
노래 끝나면 금전두(가무자에게 상주는 물건) 위한 것 아니라오 / 曲終非爲錦纏頭
그는 쓰기를 끝내자 드디어 가버렸는데, 깨고 보니 꿈이었다. 강극성은 이해 가을에 어떤 일로 직위가 떨어졌으니, 적선의 예고가 아닐까?
● 조남명이 ‘띠집 서재에 구름을 본다[茅薺觀雲]’라는 글제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인정 탓할 것 없다 / 取舍人情不足誅
어찌 구름 또한 깊이 아첨하는 줄을 알리오 / 那知雲亦獻深諛
금방 갠 햇살을 받아 다투어 남으로 내려가더니 / 旋承霽日爭南下
어느새 흐려져 다투어 북으로 달려가네 / 却向陰時競北趨
●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 정당매(政堂梅)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강통정(姜通亭.강회백)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조남명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절은 헐어지고 중은 파리하고 산 돌은 오래되었으니 / 寺破僧羸山石古
선생이 본래부터 집지을 만한 곳 못 되어라 / 先生自是未堪家
조화옹이 한매의 일을 그르치어 / 化工定誤寒梅事
어제도 꽃피고 오늘도 꽃 피었네 / 昨日開花今日花
대개 그의 시절을 조롱한 것이다.
시를 논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되니 만일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그 시를 논하는 것은 고루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大東詩林)》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들은 말에 의하면 젊었을 때부터 제가(諸家)의 것을 수집하여 늙어서야 비로소 편집하였다고 하니, 그의 마음씀이 또한 부지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록(名錄)〉이라는 것을 볼 것 같으면 김열경(金悅卿.김시습)을 승려의 유에 끼어놓고 표제하기를, ‘승설잠(僧雪岑)’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시를 논하고 아울러 사람을 논한 것이겠는가? 나로서는 자못 그렇지 못하였다고 여긴다.
● 노공 수신(盧公守愼)이 진도에 귀양살이 하면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천하의 동쪽나라의 남쪽에 / 天下之東國以南
옥주산 밑에 두어 칸 암자여라 / 沃州山下數間庵
용서하기 어려운 죄 고치기 어려운 병이 있으니 / 有難赦罪難醫病
불충한 신하 불효한 자식이 되었다 / 爲不忠臣不孝男
귀양살이 삼천 오백 일만 된 것 다행이오 / 客日三千五百幸
나이는 올해에서 병진까지 산 것 부끄럽네 / 行年乙亥丙辰慚
너 노수신아 만일 죽지 않는다면 / 汝盧守愼如無死
공사간에 보답하는 일이 되게 하여라 / 報得公私底事堪
노수신의 나이 을해생이라고 하였으니, 이 시는 대개 병진년에 지은 것이요, 그의 귀양살이는 필시 3천 5백 일이었던 것이다.
또 아우를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아! 우리 형제 이 지경이 되어 / 嗟吾兄弟至於斯
십 년 동안 다섯 번 만났네 / 一十年來五見之
만일 정위가 바다를 메운다면 / 若使精衛能塡海
천리길 탐라를 걸어라도 가겠네 / 千里耽羅可步追
● 을묘년 호남의 왜변에,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여서 여러 장수 중에 군율을 잃은 이가 많았었는데, 남주역(南州驛) 벽에 다음과 같은 시가 쓰여 있다.
장흥 고을 백성들이 부모상 당한 것 같았으니 / 長興民若喪考妣
한공 온 의 정사가 인자한 줄 알았네 / 知公韓公 蘊 政術仁
구출 않은 광주목사 이희손 잡아먹고 싶고 / 不救欲食光牧 李希孫 肉
퇴각하여 도망친 수사 김빈 몸둥이를 찢어야지 / 却走當裂水使 金贇 身
초자한 이부윤 윤경 은 참다운 장부인데 / 超資李尹 潤慶 眞丈夫
전직된 변씨 원 협 은 간사한 신하러라 / 遷職邊倅 協 乃詐臣
감사 김주 는 어찌하여 대책에 어두웠노 / 監司 金澍 奈何昧圖策
방어사 남치근 는 어찌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길까 / 防禦 南致勤 胡爲嗜殺人
원수 이준경 는 나주로 물러서 굳게 앉았고 / 元帥 李浚慶 錦城堅退坐
절도사 조안국 는 일부러 중로에서 머뭇거리네 / 節度 趙安國 中路故逡巡
공 있는 달사 양 는 어디로 갔을까 / 有功達泗 梁 歸何處
뜻 없는 충정 유 은 강진으로 갔다네 / 無意忠貞 柳 任康津
성 강진 을 버린 언성 홍 은 마땅히 먼저 베어야 하고 / 棄城 康津 彦誠 洪 宜先斬
진 진도 을 비운 최 인도 죄가 똑같다 / 空鎭 珍島 崔潾罪唯均
녹만 먹던 그 당시 모두 시위 소찬하였기에 / 食祿當時俱尸位
위태로운 오늘 각기 그 본색이 나타났네 / 臨危此日各見眞
덕견 이. 영암원임 의 항복 애걸을 문책하여 무엇하랴 / 德堅 李靈岩倅 乞降何須責
원적 병사. 함몰되었음 의 경솔과 조급도 꾸짖을 것 없네 / 元績 兵使陷沒 輕躁不足嗔
횡행하는 왜적 뉘 능히 당하랴 / 橫行倭賊誰能敵
고을과 마을 타버려 민생이 곤궁하네 / 邑里焚燒困民生
상벌이 불분명하면 공도가 소멸되니 / 賞罰不明公道滅
슬프고 걱정스럽기는 인군의 수치를 씻을 수 없네 / 惆悵君羞雪無因
이것이 어떤 사람이 지은 시이며 논평 또한 모두 지당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또한 하나의 시사(詩史)가 아니겠는가?
● 윤장원(尹長源)은 아이 때에 그 아버지가 관등(觀燈)하는 날 저녁에 관장하다가 인하여 연구(聯句)를 지어보라고 하였더니,
장성과 화성이 번쩍번쩍이고 / 長星火星爛爛然
한 층 두 층 서네 층이러라 / 一層二層三四層
하므로, 그가 시재가 있는 것을 알고 학업을 독려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였었다.
찬성 홍귀달(洪貴達)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연구를 지으라고 하였더니, 즉석에서,
새가 꽃나무 가지에 앉으니 / 鳥坐花枝
가지가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 或枝動不動
하므로 식자들이 ‘혹(或)’자를 가지고 문장이 될 기습(氣習)이라 하였다.
● 어무적(魚無迹)은 자는 잠부(潛夫)인데, 서자이기 때문에 국법에 구애되어 과거를 보지 못하였으나 대단히 재주 있다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그 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절을 지나게 되었다. 산에서 구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연구를 지어 보라고 하였더니, 바로
푸른 산이 오는 손님 공경하여 / 靑山敬客至
머리에 백운관을 썼다 / 頭戴白雲冠
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함에 미쳐서는 〈신력탄(新曆歎)〉ㆍ〈창생난(蒼生難)〉등 여러 편을 지어 자못 널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길주서의 금오산을 지나다[過吉注書金烏山]’라는 글제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낙락히 지취 높은 길주서가 / 落落高標吉注書
금오산 아래서 문 닫고 살았다네 / 金烏山下閉門居
수양산 고사리는 은 나라가 남긴 풀이요 / 首陽薇蕨殷遺草
율리의 전원은 진 나라의 옛 터네 / 栗里田園晉故墟
천년을 이름이 남아 대의를 부지하니 / 千載名垂扶大義
지금도 지나는 사람 집앞에서 머리 숙이네 / 至今人過式前廬
사내로 생겨나 비록 담력 없지만 / 生爲男子雖無膽
우뚝 솟은 봉우리들 날 고무시키네 / 立立峯巒摠起余
내가 일찍이 금오산을 지나다 보니, 이 시의 둘째 연구가 정문 바깥 도리에 조각되어 있었다.
● 정 문익공(鄭文翼公.정광필)은 기묘년 사람들을 구출하다가 죄를 얻어 김해로 귀양갔는데, 도중에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산 같이 쌓인 비방이 결국 용서된다 하여도 / 積謗如山竟見原
이승에서 임금 은덕 보답할 계책 없네 / 此生無計答天恩
열 번 준령 넘으며 두 눈에 눈물 쏟고 / 十登峻嶺雙垂淚
세 차례 장강 건너며 홀로 혼이 끊어졌네 / 三度長江獨斷魂
아득히 외로운 봉우리 구름은 먹물을 뿌린 것 같고 / 漠漠孤峯雲潑黑
망망한 큰 들에 비는 동이로 퍼붓듯 하네 / 茫茫大野雨飜盆
저물녘에 임해 동성 밖에 다다르니 / 暮投臨海東城外
쓸쓸한 초가에 대사립이러라 / 草屋蕭蕭竹作門
● 심사손(沈思孫)은 중종 때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부임하였다가 야인(野人)들에게 살해되고 말 또한 탈취당했다. 돈재(遯齋) 성상공(成相公.성세창)은 만사에서,
구름 속에 한 필 말은 새 주인 슬퍼하고 / 雲中一馬悲新主
변방의 외로운 명정은 옛집에 돌아왔네 / 塞外孤旌返故家
라고 하였는데, 그 아버지 심정지(貞之.심정)가 붙들고 울었다.
● 김모재(金慕齋)는 선위사(宣慰使)로서 일본 사신 붕중(弸中)을 전송했다. 이때에 모재가 최고운(崔孤雲)이 지은,
모래톱에 말 세우고 돌아갈 배 기다리니 / 沙汀立馬待回舟
한 지대의 안개에 만고 수심 쌓였네 / 一帶煙波萬古愁
바로 산이 평지가 되고 물이 말라야만 / 直得山平兼水竭
인간에 이별이라는 것이 비로소 없어지리 / 人間離別始應休
라는 시 한 수를 써 주면서 말하기를,
“이 시는 내가 젊었을 때에 벗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이오.”
라고 하였는데, 붕중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기골(氣骨)이 선위사의 지은 것은 아니외다.”
하므로, 모재는 탄복하였다.
● 모재의 아우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일찍이 시를 볼 줄 안다고 자부하였다. 모재가 영남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에 한 교생(校生.향교 유생)으로 송(宋)가 성을 가진 사람이 시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월파정(月波亭)으로 불러서 근률을 짓게 하였더니, 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금벽루 훤하게 물밑 하늘 누르는데 / 金碧樓明壓水天
어느 해 뉘 이 봉우리 앞에 지었는고 / 昔年誰構此峯前
한 낚싯대 드리운 어부는 빗소리 밖에 섰고 / 一竿漁父雨聲外
십리 밖에 행인은 산그늘가를 가네 / 十里行人山影邊
난간에 든 구름은 무협의 새벽에 생기고 / 入檻雲生巫峽曉
물에 뜬 꽃은 무릉의 안개 속에서 나오네 / 逐波花出武陵煙
백사장의 갈매기 양관곡을 듣기만 하니 / 沙鷗但聽陽關曲
어찌 송별하는 자에 근심하는 마음 아리오 / 那識愁心送別筵
모재가 보고 대단히 감탄하여 칭찬하고 돌아가 사재에게 말하였더니, 사재는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귀신의 시요, 화식(火食)하는 인간이 지은 게 아닙니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송가는 요녀(妖女)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당초에 글을 알지 못하였으나, 요녀를 얻은 뒤부터는 그 요녀가 항시 글자 쓰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름이 나게 되니, 그 시편에는 매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뒤에 집안 사람이 술법을 가지고 위협하여 요녀를 쫓았더니, 그 요녀는 손바닥에,
화부는 이제 낙수의 물귀신 되리니 / 花婦今爲洛水神
세상에는 모두 박정한 사람일세 / 世間皆是薄情人
라고 적어 보이고 드디어 가니, 송가는 전과 같이 문자를 알지 못하였다. 이 말은 허탄한 듯하나 남쪽 사람들이 매우 자세하게 전한다고 한다.
사재는 더욱 자신이 시를 볼 줄 아는 것을 확신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즉 전조(前朝)의 도길부(都吉敷)가 영남루에 지어 붙인 시인데, 요녀가 필시 이 시를 전하여 말해 주므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리라.
● 참판 박영(朴英)은 중종 때의 무신으로 학문이 매우 해박하고 글씨와 시에 능하였으며 의술에도 밝았다. 그의 집이 선산(善山) 낙동강 가에 있었는데,
떨어진 지역 남쪽 변방 바다 기운 어두운데 / 絶域南陲海氣昏
투구에 쇠 갑옷 입은 늙은 왕손이러라 / 兜鍪金甲老王孫
기린각에 이름자 쓰는 건 생각에 없어 / 無心麟閣題名字
집이 낙동강 위에 있다네 / 家在洛東江上村
라고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사십 겨우 넘어 오십이 되어 가는데 / 四十纔過五十初
인간에 쓸모 없는 한 거저(籧篨)라오 / 人間無用一籧篨
여생은 오직 유령(劉伶)처럼 취하는 것 합당하니 / 餘生只合劉伶醉
강호에 산책하며 고기나 잡으리 / 散步江湖堪打魚
● 병사(兵使) 김석철(金石哲) 또한 중종 때의 무신이다. 그는 승지로 내원에 들었는데, 상이 앞에 매놓은 ‘백마(白馬)’로 글제를 내어 주었더니,
백마는 한가히 울며 버들가지에 매여 있고 / 白馬閑嘶繫柳條
장군은 일 없어 칼집에 칼을 꽂네 / 將軍無事劍藏鞘
나라 은혜 갚기 전에 몸 먼저 늙으니 / 國恩未報身先老
꿈에 밟는 관산에 눈 녹지 않았네 / 夢踏關山雪未銷
라고 하였는데, 자못 전하여 외운다. 어떤 사람은 판서 윤희평(尹熙平)이 지은 시라고 하니, 어떤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상사(上舍) 진우(陳宇)는 기묘년에 상소 사건으로 죄를 당하였는데, 그 후에 나라에서 집의(執義)를 추증하였다. 처형당할 때에 그 유부(乳父)가 붓을 쥐고 결별하면서 말하기를, “한마디 말을 하여라.”
하니, 이에 붓을 가져 시 한 절구를 다음과 같이 썼다.
아득한 창천이 나에게 밝지 못하여 / 漠漠蒼天不我明
뜬구름 종일 내 인생과 같네 / 浮雲終日等吾生
가슴속에 간직한 것 뉘 능히 알꼬 / 胸中所抱誰能識
속절없이 맑은 조정에 원귀의 이름 짓네 / 徒作淸朝冤鬼名
● 수찬 안수(安璲)는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지하에는 단연코 한을 녹일 술이 없고 / 地下定無消恨酒
인간에는 반혼할 향을 얻기 어렵다 / 人間難得返魂香
라는 시 한 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병이 나 죽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시가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 김모재(金慕齋)는 한 유생이 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시를 보았더니,
푸른 나무 그늘 속에 다시 주저하네 / 綠樹陰中更躊躇
라고 하였다. 모재는,
“이 시가 매우 단초(短楚.짧고 초라함)하니 미구에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 연산(燕山)이 한 궁녀를 잃고 몹시 상심하던 끝에,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를 불러 시를 짓게 하였더니,
궁문은 깊이 잠기고 달은 황혼인데 / 宮門深鎖月黃昏
십이 점 종소리 한밤을 알리네 / 十二鍾聲到夜分
어느 곳 푸른 산에 옥골을 묻었느뇨 / 何處靑山埋玉骨
가을 바람 낙엽소리 차마 못듣겠네 / 秋風落葉不堪聞
라고 하였다. 연산은 매우 좋아하였으나, 안분당은 이때부터 비방을 당하였다고 한다.
● 유생에 홍한인(洪漢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시재가 있고 산수에 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천마산(天磨山)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아침엔 백운봉 정상에 올라 놀다가 / 朝上白雲峯頂觀
석양엔 봉우리 아래 외딴 암자에 투숙하네 / 暮投峯下孤菴宿
밤 깊어 중은 말없고 손은 잠 못이루는데 / 夜深僧定客無眠
두견새 소리 속에 산달이 지네 / 杜宇一聲山月落
그는 뒤에 강산에 유람하러 가서 깊은 못을 탐내 구경하다가 실족하여 빠져 죽었다고 한다.
● 사인(士人) 이양국(李良國)은 자못 기풍이 있어 스스로 높은 체하고 법도를 따르지 않았다. 일찍이 금강산으로 유람가는 사람을 전송하는데, 대개 그는 유람한 지 이미 10년이 되고 전송하는 사람은 3년이 된다. 그러므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십년 된 사람이 삼년 된 손님을 전송하고 / 十年人送三年客
팔만 봉우리는 구만 장천에 솟았네 / 八萬峯高九萬天
휘파란 소리 부상에 떨어지는데 파도는 해를 흔들고 / 嘯落扶桑波撼日
읊조림은 울릉도에 울리는데 바다에는 안개가 일어나네 / 吟搖蔚島海生煙
또 신해년 겨울에 국가에서 두 종(宗)의 선과(禪科)를 다시 베풀게 되자, 유림들이 장차 소를 올리려고 회문(回文)하여 그의 집에 도착하였더니, 그는 자기의 이름 아래에,
불을 배척하여 상소한 것은 한유의 일이요 / 闢佛上疏韓愈事
학 타고 하늘에 간 것은 여동빈의 광기다 / 乘鶴橫空呂洞狂
라고 쓰고, 이어 말하기를,
“나는 내일 산으로 유람간다.”
하고 항소의 반열에 끼지 아니하였다.
또 일찍이 시를 가지고 그 애인을 이별하고자 부채에 시를 썼었는데, 그 애인에게 마음이 있었던 한 문관(文官)이 이를 보고 불살라 버렸다. 이 양국은 또 뒤에 타다 남은 끝에 다가,
지금까지 분서한 불이 꺼지지 않아 / 至今未盡焚書火
낭군의 석별시를 태우네 / 燒盡郞君惜別詩
라고 하여 문관은 그 기상을 가상하게 여겼었으니, 대개 소광(疎狂)하여서이다.
● 조용문(趙龍門.조욱)이 젊었을 때,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여러 문사들이 많이 모였었다. 그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였더니,
청산은 면면이 섰고 / 靑山面面立
한수는 유유히 흐르네 / 漢水悠悠下
아양한 산수 속에 / 峩洋山水間
뉘 지음하는 사람일까 / 誰是知音者
이에 온 좌석이 경타하였는데, 끝내 원대한 곳에 이르렀었다.
●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은 예언을 잘하여 갑자년에 사화가 있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무오년보다 심하리라.”
하였다. 하루는 그가 여막에서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더니, 사람들이 그의 신발이 강가에 벗겨져 있음을 보고 드디어 그가 익사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는 출발에 힘입어 다음고 같은 시를 남겼다.
해저문 창강 가에 / 日暮滄江上
날씨는 차고 물은 파도를 치네 / 天寒水自波
외로운 배 일찍 정박함이 마땅하다 / 孤舟宜早泊
밤에는 응당 풍랑이 많으리 / 風波夜應多
자못 세상에 전하여 왼다. 항간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모재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어느 원(院)을 장차 들어가려고 하는데, 벽상에 새로 쓰여진 시가 있어 아직 먹이 마르지도 아니하였다.
새는 무너진 담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頹垣穴
사람은 석양에 샘을 긷는다 / 人汲夕陽泉
천지로 집을 삼는 손이 / 天地爲家客
하늘과 땅의 어느 곳에 있을까 / 乾坤何處邊
모재는 허암(虛庵)이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어 널리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 참판 주세붕(周世鵬)은 항시 학문을 일으키는 것으로 뜻을 삼더니, 풍기 군수가 되어서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옛 집터에다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고, 황해 감사가 되어서는 해주(海州)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본관이라고 하여, 문헌당서원(文憲堂書院)을 건립하였는데, 모두 사당이 있고 서재가 있었다. 또 책 2권을 만들어 《심원록(尋院錄)》ㆍ《입원록(入院錄)》이라고 하여, 이름하였다. 조용문이 일찍이 문헌서원을 지나는데, 제생(諸生)들이 《심원록》을 가지고 제명(題名)하기를 청하므로, 용문은 절구 한 수만을 써 주었다. 모두 서로 의아하여 누구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뒤에 비로소 들어 알고 보니, 바로 용문이 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길에 방황하며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 / 客路栖栖久未還
하늘이 서해의 산을 다 보게 하였네 / 天敎看盡西海山
성명을 서원에 남길 필요없는 것은 / 不須姓字留書院
미친 이름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오 / 贏得狂名滿世間
● 호산(壺山) 송세형(宋世珩)의 아버지 명송(溟孫)은 일찍이 중종이 등극하기 전에 사부로 있었는데, 공은 더벅머리 시절이었고 또한 항시 따라 다녔었다. 생원이 되어서는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대궐로 불러들여, ‘자릉이 부춘산이 숨다[子陵淪富春山]’는 어제(御題)를 내려 시를 시험하고 어필로 제목을 쓴 서책을 하사하였다.
● 명종때에 친히 경회루 아래서 관사(觀射.궁술을 관람)하면서 시신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니, 한림 하응림 대이(河應林大而)가 응제(應題)하여 장원하였다. 한때 전하여 외우곤 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따스한 바람 갠 날 금지 동편에 / 暖風晴日禁池東
흰 과녁이 푸른 나무 속에 높이 걸렸네 / 粉華高張綠樹中
원숭이 팔 벌리자마자 별같은 표적 가득하고 / 猿臂乍開星的滿
오호 튕기는 순간 달 바퀴 사라지네 / 烏號俄拂月輪空
가죽 뚫음이 어찌 근력 들이는 것이랴 / 主皮豈是輸筋力
수양됨을 보이려면 기묘한 공력이 필요하오 / 觀德要須奏奇功
서액 사신들은 기술이 없어 / 西掖詞臣無伎倆
은혜 입은 술에 취하여 낯만 붉네 / 沐恩留得醉顔紅
대이는 시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을뿐더러 필법이 호건하고 그림 또한 기묘하였다. 그런데 나이 33에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고 죽었다. 나와 동갑인 병신생이었으므로, 나는 다음 같은 만사를 지어 곡하였다.
나의 동갑은 바야흐로 젊은 나이인데 / 吾庚方妙歲
그대만이 유독 이렇게 되었는가 / 君獨至於斯
재주는 시와 서화에 뛰어났는데 / 才絶詩書畫
하늘은 수명ㆍ벼슬ㆍ때에 인색하였네 / 天慳壽爵時
● 대이가 등과하지 않았을 대에 반궁(泮宮.성균관)에서 〈우정명(禹鼎銘)〉을 과시(課試)하였는데, 그의 시는 이러하다.
지기를 홍수에서 가두어 죽이니 / 支祈鎖殺洪流
옛날 컴컴하게 빠졌던 것이 어두를 면케 되었네 / 昔昏墊免魚頭
삼품으로 주조되고 구주에서 모았는데 / 範三品萃九牧
이 공을 형산 기슭에 표하였다 / 表玆功荊山麓
네 발의 괴인 것이 기묘하고 / 爾足之支奇兮
네 배가 퍼져 여유있다 / 爾腹之彭亨兮
신이 아끼는 것을 형상으로 그리니, 이매망량이 그 모습을 숨길 수 없고 / 圖像神慳魑魅魍魎莫能逃其形
풍토를 새겨 조작하였으니, 천심과 고하가 각기 그 명칭을 얻게 되었다 / 鐫刻風土崇深高下各得有其名
여기에 범벅 끓이고 여기에 죽 쑤는 것이 어찌 호구 위해서리요 / 饘於是粥於是爲餬口
큰 공 기록하고 크게 녹이는 것을 드러내 후세에 보인 것이다 / 勒鴻功揚景鑠留示厥後
아! 저 땅덩이를 차지한 자들이 그 덕을 닦지 않고 오직 차지하려고만 다투니 / 嗟彼有土不德其德唯爾之爭
솥이여 솥이여 무겁지도 가볍지도 말지어라 / 鼎兮鼎兮毋爲重輕
또한 절창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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