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로마의 교훈
- 선교에 관한 신학적 성찰
에제 18,25-28; 필리 2,1-11; 마태 21,28-32
연중 제26주일; 2023.10.1.; 이기우 신부
1. 이스라엘의 교훈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며 전교성월의 첫날입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에제키엘이 전하는 선교의 메시지는 공정과 정의라는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여 공동선을 증진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보아라. 의인이 불의를 저지르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살 것이다(에제 18,26-27).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에제키엘의 경고를 듣지 않아서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고 바빌론에 끌려가서 70년 동안 유배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이 두 번째로 종살이를 해야 했던 쓰라린 체험은 민족적 대각성을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에제키엘을 비롯한 예언자들이 전해준 메시지를 바탕으로 그제까지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를 모아 모세오경을 편찬해 냈습니다. 여기에 율법은 물론 여호수아서를 비롯하여 역대기, 열왕기 등 역사서들도 빠짐없이 기록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세의 거울이 되게 하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패는 용렬하였으나 그에 대한 민족적 대각성을 불러와서 구약성경이라는 인류의 위대한 정신유산을 창조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기록해 낸 현자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역사의 교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지난 날의 실패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민족은 그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혁명당원들이 주동이 되어 로마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무모한 독립전쟁은 110만명이 학살되는 비극으로 끝났고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으며 요행히 목숨을 부지한 남은 자들은 2천 년 동안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멸시와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행히 이스라엘은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세워질 때 유럽 대륙에서 받은 차별을 피해 미국에 집결하여 자신들의 재산과 전문 지식을 쏟아부은 결과, 미국 내에서 ‘유대 권력’을 형성하고는 오늘날 미국을 움직여 세계 역사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에제키엘이 경고한 공정과 정의라는 공동선의 가치에는 한참 못미칩니다. 미국 내 ‘유대 권력’이나 이들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구약성경의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또 다른 실패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그렇고, 이를 뒷배로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 공화국이 팔레스티나 원주민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다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에제키엘이 말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 18,26)
2. 로마의 교훈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참이스라엘’이 되고자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고자 애를 썼습니다“(필리 2,5).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셨으므로”(필리 2,7) 초대교회를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 사도 2,43-44). 이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로마인들로부터 호감을 얻었습니다”(사도 2,47). 이것이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아 낮추고 비울 줄 알았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거둔 놀라운 선교적 성과의 비결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250년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박해를 종식시켰고 그 뒤를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로마화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급격하게 자기비허의 신앙을 상실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제국 대신에 로마의 영광과 권위를 갖추고 서유럽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어도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은 간직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속 국가의 왕들을 파문으로 위협하여 세속 정치 권력을 탐하는가 하면(1080, 카노사),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지를 이교도들의 수중에서 탈환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1095, 우르바노 2세).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여 7,500만 명 내지 2억 명이 희생당하여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 사라진 사태에서 교회는 비과학적인 대처로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또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사태로 실추된 교황의 권위를 만회하고자 기존의 라테라노 성전보다 더 크게 베드로 대성전을 지으려고 무리한 모금을 강행하다가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항의를 받고 교회가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으로 갈라지는 분열 사태를 자초하기도 하였습니다.
본시 아시아에서 태동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1,500년 만에야 아시아 선교가 감행될 수 있었던 배경이 이러하였습니다. 교회 분열로 인한 극심한 혼란 속에서 결성된 예수회의 젊은 선교사들은 당시 막 개척된 대항해 항로를 이용하여 인도, 일본, 중국 등지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놀랍게도 스스로 진리를 찾던 조선의 백성 안에서 맺어졌습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교황청이 내린 조상제사금지령으로 인하여 조선의 신생 교회는 무려 백 년 동안 박해를 받아야 했고, 관변기록으로만 8천 명, 신자들의 구전상으로는 2만여 명이 치명하였습니다. 교황청이 내린 조상제사금지령과 조선 왕조가 가하는 혹독한 박해라는 안팎의 시련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자발적으로 형성하여 교리에 담긴 복음 진리를 생활화함으로써 보편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선교적 활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신앙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잊지 않았던 덕분이었습니다. 교리에 대한 열성만이 아니라 어쩌다 순방하는 사제가 집전하는 성사에 대한 열망은 더 컸으므로,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이 늘어나는, 초대교회 시절 이래로 2천년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이 이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명백해지는 로마의 교훈은 자기비허의 신앙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하면 하느님을 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복음화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지킨 의인들이 구원받으리라고 에제키엘이 외친 이치와 정확하게 상통합니다.
3. 선교의 전망
그러므로 선교의 비결도 단순 명쾌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필리 2,1)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뜻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룬다면”(필리 2,2),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필리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일컬어 ‘현대의 성령강림사건’이라고 극찬하는 이유는 공의회에 모였던 5천여 명에 달하는 주교들과 이들을 실무적으로 보좌했던 신학자들을 성령께서 움직이셔서, 자기비허의 신앙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교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공의회도 회기 초에는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가 선교라고 규정하려 들었었습니다(선교교령, 6항).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 ‘부식적 선교관’이었습니다. 이는 근세 이래로 아시아 선교에서도 문제가 되어 문화 충돌을 일으키고 박해를 자초한 유럽 백인 중심적 오만이 작용한 비복음적 선교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회기 말 에 가서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1항)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 활동에 있어서 개종을 전제한 종교간 대결의식에서 벗어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영성을 드디어 회복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선교는 종교간 전쟁이 아닙니다. “복음화는 나의 인격 안에서, 나의 행동 안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개종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교황 프란치스코, 2023.4). 선교 즉 복음 선포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펴신 뜻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이 살다가 당신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도 현대 이스라엘도, 심지어 중세와 근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문제를 잘못 풀었습니다. 지구상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자 하는 미국은 물론, 세상의 학문을 이끌고 있는 서양 문명도 인류의 문제를 잘못 풀고 있기로는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는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