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지유님
우리나라는 가을에 접어들지만 북극에는 겨울이 먼저 도착한다. 기온이 내려가면 북극은 조금 더 커질 준비를 한다. 남극과 북극이 다른 점은, 남극에는 대륙이 있지만 북극에는 없다는 점이다. 북극은 바다가 얼어서 생긴 빙하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되면 해빙(海氷)은 커진다. 해빙의 가장자리에 아기 얼음들이 들러 붙어 북극은 더 넓어진다. 반대로 여름이 되면 가장자리가 녹고 얼음이 떨어져 나가 조금 작아진다. 인공위성이 찍은 북극의 1년을 빠르게 돌려 보면 마치 뛰는 심장처럼 보인다. 실제로 북극은 지구의 심장과도 같다. 바다가 얼어 붙으면 물만 얼고 소금은 남아 북극의 바다를 더 짜게 만든다. 밀도가 높아진 물은 깊숙이 가라앉고 남쪽에서 온 물이 표면의 빈자리를 채워 전 지구의 바닷물이 순환한다.
북극의 얼음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120여 년 전 시베리아 연안에서 얼음에 난파된 자네트 호가 몇 년 후 그린란드 북쪽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얼음이 태평양 북쪽에서 북극점을 지나 대서양 북쪽으로 장장 4000킬로미터 넘게 움직인 것이다. 이것을 '북극 횡단 유빙'이라고 한다. 자네트 호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북극을 여행 한 셈이다.
오늘날 과학자들 역시 북극을 연구하기 위해 북극점 근처에 머물며 유빙(流氷)과 함께 이동 한다. 그들은 잘 만든 배를 타고 스스로 유빙과 함께 얼어붙어 어떠한 동력도 사용하지 않고 북극을 돌아다닌다. 자신들의 운명을 유빙에 맡긴 채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유빙에 얼어붙은 배가 자유를 얻을 방법은 오직 하나. 날이 풀려 얼음이 녹는 것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이라도 얼음이 놓아주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북극의 얼음은 인간이 가진 어떤 기술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남극에는 북극과 달리 대륙이 있다. 그래서 '남극 대륙'이라고도 부른다. 남극 대륙에 최초로 내린 눈은 육각형 결정체 사이에 공기를 가둔 채 고스란히 그자리에 남았다. 다시 내린 눈이 먼저 온 눈 위에 쌓이고, 그다음에 온 눈이 그 위를 뒤 덮었다. 그렇게 수십만 년 넘게 눈이 쌓였고, 그 아래에서 단단하게 다져진 눈이 바로 남극의 얼음이다. 오래전 눈 사이에 갇힌 공기는 여전히 얼음 속에 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구의 대기는 다양한 물질이 더해지거나 사라져 성분이 변해 왔다. 하지만 얼음 속에 갇힌 공기는 당시의 성분은 그대로 간직한 채 얼음 속에 존재하고 있다. 눈이 쌓여서 생긴 빙하 근처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빙하의 곁면이 녹으면서 터져 나오는 공기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과거에서 온 메시지다.
과학자들은 얼음을 기둥 모양으로 뽑아내고 잘라서 밀폐된 용기에 넣고 녹인다. 얼음이 녹으며 빠져나오는 공기는 지구 대기의 역사를 말해 준다. 공기의 성분을 분석하면 42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이산화탄소, 메탄. 산소 등 주요 성분의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남극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사막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 사막이란 1년 강수량이 250밀리미터 이하인 지역을 말한다. 사막의 정의에 기온의 높고 낮음은 포함돼 있지 않다. 남극이 사막이라는 것은 눈이 많이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불어 남극의 빙하가 아주 천천히 자란다는 의미다.
지금처럼 기온이 급격히 올라 남극의 빙하가 전례 없이 녹아내리면 예전의 모습은 다시 찾을 수 없다. 빙하의 면적이 줄고 대륙이 드러나면 햇빛을 흡수해 기온이 더 올라갈 것이고 종국에는 지구의 열 균형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구 양극에 존재하는 얼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쌓아 올리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져 내리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쌓는 중인가, 부수는 중인가.